그래, 우리 아름답자

그럼에도 최선을 다하여 나답게

by 임주리

영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원제 The Grand Budapest Hotel, 2014, 웨스 앤더슨 감독)을 좋아한다. 아름다움을 온몸으로 찬양하는 이 영화는 세트부터 의상, 작은 소품까지 기가 막힌다. 나는 이 작품을 처음부터 끝까지 사랑하는데, 특히 아끼는 장면이 있다.


부다페스트 호텔의 지배인 무슈 구스타프(랄프 파인즈)가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힌다. 탈옥을 계획하는 게 당연지사. 구스타프는 단골 빵집에서 일하는 아가사(시얼샤 로넌)에게 도움을 청한다. 우리의 아가사는 탈출 도구를 어떻게 감옥 안에 전달할 수 있을까 고민고민하다 묘안을 떠올린다. 손 대기 아까울 정도로 예쁜 빵을 만들어 그 안에 숨긴 거다.


글로 풀어 놓으니 참으로 유치 찬란한 계획 같지만 놀랍게도 구스타프 일행은 탈출에 성공한다. 매의 눈을 가진 검사관도 차마, 이 예쁜 빵만큼은 손 대지 못해 그냥 통과시킨 덕이다. 주인공은 무사히 빵을 받아 땅을 뚫고 탈출한다. 나이스.


기발해 미치겠음.
아, 이건 너무 예쁘잖아. 통과!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할 것이다”는 게 도스토예프스키의 말이었던가. 적어도 아름다움은 구스타프를 구했다.



쿠바의 수도 아바나는 낡은 도시였다. 모든 것이 사진이나 영화에서 보던 것보다 훨씬 낡아 있었다. 사진에서 본 색색의 올드카는(*1950년대 미국에서 들여온 차가 쿠바에서는 아직도 쓰임) 운치 있고 낭만적이었는데, 실제로 본 올드카는 정말로 심각하게 올드 했다. 사이드미러 자리에는 깨진 거울이 대신 달려있었고, 문은 제대로 열리지 않았다. 그놈의 매연은 어찌나 고약한지.

무엇보다 아바나의 건물들이 그랬다. 스페인 식민지 시절 세워진 건물들은 멀리서 보면 우아했는데 가까이서 보면 눈물이 날 정도로 낡았다. 먹을거리는 아주 빈한하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풍성하지도 않았다. 이 나라의 가난은 직시해야 할 현실이었다.



올드카. 낡은 골목
올드카 내부. 사이드미러가 없다.


그러나 묘했다. 쿠바 사람들에겐 어떤 ‘생기’가 있었다. 숫자로 증명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자세히 묘사하기도 어렵지만 그 기운은 생생했다. ‘그들은 가난하지만 행복해보였져염’ ‘미소가 참 순수하더군요’ 따위의 단편적인 감상으로 비칠까 봐 조심스럽다. 하지만, 분명히 있었다.

대체 이 독특한 생기는 뭘까. 나는 왜 이런 기운을 느끼는 걸까. 거리든 카페든 내키는 대로 춤추고 노래하는 사람들이어서일까. 그보다는, 사람들의 옷차림에서 받은 놀라움이 컸다.


어쩜 그렇게 다들 화사하게 차려입는지. 눈만 돌리면 강렬한 원색의 옷과 화려한 액세서리를 두른 사람들이 있었다. 각자의 체격과 피부색에 어울리는 사려 깊은 조합이라는 걸 멀리서도 알 수 있었다. 비교적 잘 사는 동네와 관광지구만 그랬느냐 하면, 뒷골목에서도 그랬다. 대부분 사람이 옷차림에 공을 들였다. 비록 낡고 헤졌어도, 오래된 옷과 장신구라 해도, 쿠바 사람들은 자신을 꾸미고 표현하는 데 거침이 없었다.


현지인 가이드에게 조심스레 물었던 것 같다.

-다들, 옷을 정말 예쁘게 입네요.

가이드가 답했다.

-쿠바 사람들은 구두와 먹을 것이 있으면 일단 구두를 사서 신고, 다음날 구두를 팔아 식량을 사요. 하하.

그것은 진담인 듯 농담 같은 진담이었다.


그 생생한 기운이 ‘아름다움’이었음을 그제야 알았다.



쇼핑을 싫어한다. 귀찮고 힘들다. 물건이 쌓여가는 것도 싫다. ‘더 많이, 더 비싸게, 더 화려하게’를 지향하는 패션계의 앙탈에 휘말리고 싶지도 않다. 패피(패션피플)가 되기 위해 노력하고 패피로 추앙받고 패피로서의 삶을 지속하기 위해 애 쓰는 일은 뭐, 나름의 재미는 있겠지만, 많이 귀찮을 것 같다.

하지만 마음 한 편에선 옷을 예쁘게 잘 입고 싶은 욕망이 넘실댔다. 그날 입은 옷과 신은 구두와 손에 든 가방으로 내 정체성을 드러내고자 하는 욕망은, 꾹꾹 눌러두어도 가끔 튀어나와 신용카드를 움직였다. 정신을 차리고 보면 3개월치 청구서가 이미 브라보! 나는 회사를 열심히 다녀야 했다.


두 마음 사이에서 헤매며 나는 이쪽과 저쪽을 마구 오갔다. 쇼핑백을 잔뜩 든 날엔 ‘욕망에 굴복하고 말았어’라며 머리를 쥐어뜯었다. 소박하게 살겠다며 대충 입고 나가면 하루 종일 별일 없이 기분이 가라앉았다. 안 좋은 일이 있기라도 하면 악순환. 기분이 안 좋으니 대충하고 나갔고, 그러면 더 기분이 안 좋아졌다.


다시 영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이야기로 돌아와서.

구스타프는 급박하게 떠나야 하는 상황에서도 와인잔을 잊지 않는다. 촌각을 다투는 순간에도 향수를 뿌린다. 그가 지키고자 했던 아름다움은 곧 그의 스타일, 삶의 품격이 되어 결국은 그를 지켜낸다. 그랬다. 아름다움은 태도의 문제이지 물건의 리스트가 아니었다.

쿠바 사람들에게서 받은 기운도 그랬다. 그 아름다움이란, 최대한 힘 닿는 데까지 나 자신을 돌보고 가꾸려는 마음이지 남보다 돋보이기 위해 무리해서 획득해야 할 것은 아니었다. 자기 자신을 존중하고 아끼는 손길. 그 마음이 생기의 원천이며 생기 그 자체였다. -보다시피 풍족하진 않아. 그럼에도 나는 최선을 다하여 나답게 아름다울 거야.- 이런 씩씩함은 허세와 사치와는 달랐다.


그래, 우리 아름답자.


완벽한 몸매를 명품으로 감싸자는 게 아니다. 나를 소중히 관찰하고, 나의 취향을 계발해 내가 좋아하는 모습으로 나를 꾸미는 것.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정갈하게 나의 몸과 마음을 돌보는 것. 그런 아름다움은 삶에 생기를 부여한다. 그런 아름다움에는 많은 돈이 필요하지 않고.



웬만하면 헝클어진 모습으로 다니지 않으려고 한다. 반짝이는 신상을 마구 긁어모으진 않는다. 다만 물건을 신중히 고르고 오래 쓴다. 그렇게 고른 물건들로 정성을 들인 날엔, 확실히 기분이 좋아진다. (이래 놓고 동네 카페는 자다 일어난 몽유병 컨셉으로 나간다는 게 약간의 함정.)


한 번은 6년 넘게 신은 구두를 수선하러 구둣방에 갔다가 헌팅을 당했다. “아니 요즘에 이렇게 구두를 아껴 신는 아가씨가 웬 말이야. 아가씨, 우리 아들 좀 만나 볼텨?” 나와 구둣방 사장님이 나누던 이야기를 들은 어느 아주머니의 구애였다. 내 손에는 낡지만 깨끗한 신발이 있었고, 그건 뭐랄까, 나의 꽤 괜찮은 삶의 방식이었다. 조금은 아름다운.


거 봐.

아름다움은, 구둣방의 솔로도 구...구...원할 뻔했다.

(결과는 묻지 말자. 지금 입술 꽉 깨물고 있다.)


2011년 5월 쿠바_혼자서 출장



★ 내 맘대로 여행 팁. 꿀팁 아님. 틀려도 난 모름. 정말 모름. ★

얼마 전 미국과 쿠바는 극적으로 화해했지만, 사실 이 두 나라는 50여 년간 국교가 단절되어 있었습니다. 쿠바는 사회주의 노선을 고집했고 미국은 경제를 봉쇄했죠. 그래도 소련의 지원 덕에 그럭저럭 살만 했지만 1989년 소련과 동유럽이 몰락하며 경제는 급속도로 나빠지기 시작했어요. 아바나가 낡고 가난한 도시가 된 이유입니다.

다행히 지금 아바나에는 새로운 바람이 불고 있다고 합니다. 속속 도착하는 르포 기사 등을 살펴보니 확실히 쿠바 경제가 기지개를 켜고 있더군요. 한 번에 좋아지지는 않겠죠. 그러나 아름다움을 아는 이들의 삶이 좀 더 나아지기를 바랍니다. 아아, 쿠바 이야기는 해도 해도 끝이 없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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