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지의 고등학교 친구, 현서와의 과거 첫 만남
“내가 여고 다닐 때, 옆 남고 애들이랑 맨날 연락하고 소개받는 친구가 있었어. 나랑 같이 다니는 애였지. 제일 친한 사이였지만 그때의 나는 걔랑 달랐어. 공부밖에 몰랐고, 대학에 가기 전까지는 한 눈 팔지 않기로 다짐했었어.
맨날 자기가 어떤 남자를 만났는지, 얼마나 대단한 사랑을 하는지 들려주는 걔를 보면서 나는 그 애가 한심하다고 생각했어. 제일 친한 친구를 가지고 그런 생각을 하는 게, 나쁘단 걸 알면서도, 평가하는 마음을 멈출 수 없었어.”
“나였어도 멈출 수 없었을 거야.”
나는 지금도 네가 어떤 사람인지 가늠하는 일을 멈출 수 없으니까.
그게 어떤 건지는 내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그 애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는 말을 이어나갔다.
*
#혜지 시점의 글입니다.
수업이 듣기 싫을 때마다 자주 올라가던 옥상에서, 현서와 처음 이야기를 나눴다. 그때 나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열심히 주어진 것만 해내던 열일곱이었다. 마음속에선 폭풍이 일고 있지만, 아무도 알아채주지 않아서 늘 그걸 숨기고 살아가는.
우리는 같은 반이었지만 대화를 해본 적은 없었다. 내가 보기에 현서는 너무 ‘노는 아이’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엄마는 늘 그런 아이들을 가까이 두지 말라고 말하곤 했다. 이혼을 한 후 엄마는 사람을 가려 사귀는 일에 더욱 몰두한 사람처럼 보였다.
그러나 나는 항상 현서가 궁금했다. 왜냐하면, 그 애는 너무도 지루한 표정을 늘 짓고 있기 때문이었다. 노는 아이들과 같이 매점을 가고, 화장을 하고, 수업을 째고 학교 밖으로 나가 학주에게 걸려 혼날 때조차도. 늘 모든 것이 따분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고, 나는 그 표정이 꼭 나의 것과 같다 느껴져 현서를 알고 싶었다.
"너도 수업 듣기 싫구나?"
난간에 걸터앉은 현서가 미소를 지으며 내게 말을 건넸다.
“자주 와, 여기?”
나는 현서에게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응. 나는 이렇게 뚫린 데가 좋아. 교실은 너무 좁잖아.“
나도 모르게 이상한 말이 나왔다.
“계속 교실에 있으면…사람들 사이에 둘러싸여 있는데도 혼자인 거 같을 때가 있어.”
"맞아. 엄청 슬퍼지지. 외로워지고.“
현서가 내 말에 동의했다. 나는 놀라 말을 이었다.
"이 세상에 혼자 남겨진 것처럼 느껴져."
현서가 궁금한 게 있다는 듯이 나를 쳐다보며 물었다.
"너도, 외로움을 느껴?"
그 말을 듣자, 내가 지금까지 한 번도 내 외로움에 대해 제대로 얘기해본 적이 없다는 게 떠올랐다. 누군가와 이런 감정을 나누는 게 쉽지 않았다.
"외로워. 아주 많이."
"그러면 어떻게 해, 울어?"
"울지는 않아. 그냥 슬픈 거야."
"슬픈데 어떻게 안 울 수가 있어?"
"너무 슬프면, 그냥 아무것도 할 수 없이 슬픈 거야. 울 수도 없어. 항상 슬픈 일이 있으니까, 그때마다 울 순 없으니까. 그래서 눈물을 가둬놓는 거야. 진짜 슬픈 건 그런 거야."
왠지 그 말을 하면서 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울지는 않았지만.
"거짓말. 나는 진짜 슬픈데. 그래서 맨날 우는데."
현서가 무릎에 얼굴을 파묻으며 말했다.
"그래서 정말이지, 죽어버리고 싶은데."
"...네가 죽으면, 너보다 더 슬픈 사람들이 있을 거야."
현서가 고개를 들어 나를 보았다.
"그 사람들은 울지도 못할 거야. 그러니까, 죽지 마. 보란 듯이 계속 살아가. 더는 울지 못할 때까지."
주제넘은 말을 한 것 같아 조금 후회가 됐다. 나는 위로가 되어 줄 만한 사람이 아니라 미안했다. 그렇지만, 정말 해주고 싶었던 말이었다.
"고마워…."
그 말을 하더니 현서는 다시 무릎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러더니 엉엉 울기 시작했다. 내 말이 위로가 된 걸까. 놀란 마음으로 현서의 어깨를 토닥였다.
그날 이후, 우리는 둘도 없는 친구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