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개가 입을 벌릴 때>의 연재를 마치며
이 소설을 쓰면서 나는 누군가를 이해하고 싶었다.
이해하고자 노력할수록 오해가 쌓였던 나의 지난 날들.
그 모든 관계를 맺고 끊어갈수록, 나는 내 모습을 알 수가 없어졌다. 어떤 집단에 속해 있느냐에 따라서 나는 자꾸만 달라졌다. 행동도 말도 전부 일관되지는 않아서, 스무 살의 나는 정말 많이 혼란을 겪었던 것 같다.
어떤 이들은 나를 이유 없이 좋아했고 또 어떤 이들은 나를 이유 없이 싫어했다. 나를 오해한 사람들은 뒤에서 나의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 아니, 그걸 오해라고 할 수 있을까? 그것 또한 내 안의 어떤 부분이겠지.
악역이 되는 기분은 생각보다 나쁘지만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나는 어떤 희열을 느꼈다. 내 귀에 내가 어떻게 이야기되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었다. 그러나 구체성을 지닌 이야기가 아니었기에 나는 더욱더 마음대로 상상할 수 있었다.
그런 희열에서 수진이가 탄생했다.
이 소설의 서술자인 수진이는 혜지를 사랑했지만, 끝내 그를 이해할 수는 없었던 사람이다. 어쩌면 수진이는 묘하게 혜지의 소문을 즐겼을지도 모른다. 혜지에 대해 함부로 떠드는 사람들과 달리 나는 그의 어두운 부분을 알고 있는 사람이니까.
혜지는 내 안의 약한 부분을 형상화한 인물이다.
앞서 악역이 되는 일이 속 편하다는 듯이 말했지만 그건 사실 반쪽짜리 진실이다.
인정욕구가 강한 나는 누구에게나 좋은 사람이 되고 싶었으나 결국 그렇게 되지 못했다.
만들다 만 관계들이 쌓여갈수록, 누군가가 나를 욕하거나 오해할수록 자책이 늘었다.
그러나 동시에 그 자책을 멈추고 싶어 악역을 즐기기로 마음먹었던 것이었다.
혜지는 얼마나 외로웠을까. 소문에 둘러싸여 혼자 시를 쓰는 혜지를 자주 상상했다. 혜지를 안아주면 내가 이해받는 느낌이 들리도 했다.
등장인물을 혜지와 수진이라는 이름으로 설정한 이유는 그 이름이 여성에 대한 멸칭으로 쓰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혐오하기 위해 이름을 활용하는 것은 참 저열한 방식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무쪼록 이 소설을 읽는 분들만이라도 혜지와 수진이라는 이름을, 이 등장인물로만 기억해 주셔도 참 좋겠다.
이 글을 쓰며 나의 모순을 안아줄 수 있어 참 좋았다.
수진이도 혜지도, 모두 내 안의 어떤 모습을 꺼낸 인물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제 내가 이해하는 한 가지 진실은.
그 누구도 상대방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나조차도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상대를 이해하는 것이 가능할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매 순간 흔들렸던 너와 나를 인정하고 나의 선택을 다독이며 살아가는 것뿐이 아닐까.
스물셋의 내가 써 내려간 이야기들을 십 년 뒤의 나는, 또 더 미래의 나는 어떻게 읽게 될지 참 궁금하다.
더 재밌는 이야기들을 들고 올 테니 많이들 읽어주시면 참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