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르페 디엠
현명할 것을, 포도주는 그만 익혀 따르고,
짧은 인생, 미래에 대한 기대는 줄이게.
지금 우리가 말하는 동안에도, 시간은 우릴 시기하며 흐른다네.
현재를 잡게 Carpe diem, 내일을 믿지 말고.
- 호라티우스의 카르페 디엠 (기원전 65~8, 로마의 시인)
반복된 일상생활에 순응하던 사람들이 갑자기 일탈을 꿈꾼다면?
제일 먼저 무슨 생각을 떠올릴까?
십중팔구 여행이다. 그것도 세계여행.
세계일주에 관한 노하우를 알려주는 학교가 있다고 한다.
덕성여자대학교 평생교육원에서 2016년부터 개설된 'DS세계일주학교'다.
'먼나라 이웃나라'의 저자이자 덕성여대 총장인 이원복 총장이 여행 작가들과 손잡고 개설한 프로그램이다.
총 10번의 특강으로 이루어진 이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강사들의 면면도 솔깃하다.
전 세계를 누비며 경험과 식견으로 무장한 세계여행 경험자들이며,
여행 방법을 선도하는 리더들이 대거 출연한다.
우리 주변에도 불현듯 여행을 떠난 사람들이 있다.
신혼여행으로 1년 동안 세계일주를 떠나는 신혼부부가 있는가 하면,
아파트 전세금을 빼내서 세계일주를 떠난 용감한 가족이 있다.
수능 공부 대신 세계일주를 택한 수험생이 있는가 하면,
버스에 김치를 싣고 세계일주를 떠난 요리사가 있다.
누군가는 무책임하고 충동적인 일탈이라며 폄하할지도 모르겠지만,
가만히 살펴보면 그들이 선택한 '세계일주'는 분명 다른 점이 있다.
그것은 무작정 도망치는 <일탈>이 아니라 원래 자리로 다시 돌아오는 <일주>라는 점.
현실을 외면하는 충동적 회피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을 살아내는 현재지향적 실천이었다.
여행에 대한 로망은 노년층이라고 다르지 않다. 해외 사례를 보자.
55세 이상 시니어를 위한 교육과 여행 지원 기관인 미국의 '로드 스콜라 Road Scholar'가 있다.
이곳에서 특이하게도 21세 이상의 손주와 함께 떠나는 해외여행 프로그램을 운영하는데,
이 프로그램에 참가하는 노년층의 평균연령은 무려 72세에 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걷고 탐방하며 각 여행 테마에 맞는 예술과 문화 교육을 이수하는 등 그 열정이 뜨겁다.
심지어 어린 손주들과 눈높이를 맞추고 발맞춰 걸으려는 노년층의 모습은 감동적이기까지 하다.
마치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놀라운 생동감마저 느껴진다.
DS세계일주학교와 로드 스콜라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여행을 통해 또 다른 인생을 경험한다.
그것은 오로지 일상에서 도망치기 위해 타임커머스로 비행기표를 사버리는 충동구매와 다르다.
삶의 가치를 확장하고 재정립할 수 있는 체험의 선택, 그리고 결단이었다.
'지금 이 순간'에 우뚝 선 그들은 "왜?"라는 질문에 이렇게 외친다.
"한 번뿐인 인생, 욜로!"라고.
tvN 여행 리얼리티 프로그램 <꽃보다 청춘>의 아프리카 편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주인공인 청춘 4인방이 여행 중에 한 금발의 여대생을 만나게 되었는데,
그녀는 혼자 캠핑카를 끌고 아프리카를 여행 중이라고 했다.
혼자 여행하는 게 멋있다고 말하는 류준열에게 그녀는 이렇게 대답했다.
"YOLO!"
그리고는 류준열의 휴대폰에 'You Only Live Once'라고 적어준다.
(욜로 YOLO : You Only Live Once의 약자. '한 번뿐인 인생'이란 뜻)
이 방송은 시청자들에게 잔잔한 감동을 선사하며 순식간에 '욜로'라는 트렌드가 전파되었다.
욜로, 이 단어에는 미래의 행복을 위해 현재를 희생하지 말고 오늘을 즐기라는 뜻이 숨어 있다.
앞서 보여준 '호라티우스의 카르페디엠'처럼,
짧은 인생, 내일을 믿지 말고 후회 없이 이 순간을 즐기며 살라는 뜻이다.
간혹 이 '욜로'라는 표현은 쓰고 싶은 사람 마음대로 해석되는 경향이 있다.
밑도 끝도 없이 격렬하게 놀고 나서 일상에서 탈출해야 하는 이유를 찾는 식이다.
또는 지금 당장 지르고 싶은 충동구매를 참지 못해 지름신이 강림한 것을 '욜로!'라고 외친다.
무엇보다 직장에서 열심히 일할 이유가 없다는 합리적인 핑계로써 '욜로'라고 답한다.
사실상 '일탈', '과소비', '포기'라고 해야 할 말을 '욜로'라고 포장하고 있는 셈이다.
서울대 소비자학과 김난도 교수가 쓴 <트렌드 코리아 2017>에 따르면,
'욜로'란 현재의 행복을 위해 도전하고 실천하는 삶의 방식을 의미한다.
욜로족들의 소비 활동은 물질적인 가치를 구매하기보단 경험을 중시한 소비 행위라고 말할 수 있다.
그들의 소비 행위에는 얼마나 명품인가 하는 잣대는 중요하지 않다.
다만 그 소비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삶의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가 중요하다.
비유하자면, 월급을 쏟아부어 샤넬 가방을 구입했다고 해서 삶이 달라지진 않는다.
하지만 적금을 해지해 유럽여행을 떠나는 것은 삶을 바꿔놓을 경험이 될 수 있다.
따라서 욜로족들에게 위시리스트는 의미가 없다.
단지 버킷리스트가 중요할 뿐.
알 수 없는 미래와 녹록지 않은 현실 속에서 요즘 사람들이 꿈꾸는 <일탈>을 한편으론 이해할 수도 있다.
경기가 호황이었던 시절엔 오늘을 아끼고 내일을 준비하는 것에 무한한 가능성이 열려 있었다.
즉, 금리가 높고 물가가 빠르게 오르던 고도성장기에는 현재를 희생해 돈을 모으고 집을 사두면 가격이 오르는 등 투자가 차지하는 비중이 높았다.
하지만 지금처럼 세계 경제가 침체된 저금리, 저성장, 저물가의 디플레이션 시대는 다르다.
오늘 뭔가를 아끼고 희생하여 투자하는 행위가 내일은 이익으로 돌아올 것이라 보장하기 어렵다.
앞으로 다가올 마이너스 금리 시대엔 오늘 은행에 저금을 하면 내일은 이자를 받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보관료를 내야 하는 시대다.
어쩌면 지금과 같은 시대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패러다임의 전환이다.
대한민국의 근대화를 일구어 낸 새마을운동적 근면성실함만으로 오늘을 희생해선 안된다.
왜냐하면 지금과 같은 디플레이션 시대는 오늘의 가치가 내일의 가치보다 중요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근면성실의 이면에 도사린 '수동적 자세'를 탈피해야 한다.
그것은 삶에 대해 능동적으로 도전해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오늘도 순종하는 삶이 아니라 오늘부터 도전하는 삶을 뜻한다.
그런 모티브를 내재하며 새롭게 부상하는 트렌드가 바로 '욜로'다. 그리고 '욜로 라이프'다.
욜로를 단순히 소비적 라이프스타일로만 한정한다면 단조로운 해석이다.
그것은 현재를 잡으려는 구체적 실천이며, 호라티우스가 외친 '카르페 디엠'의 완성이라 말할 수 있다.
저성장 시대에 앞이 보이지 않는 현실 속에서 지금 세대가 선택해야 할 바로 그것이다.
삶에 대한 능동적인 도전으로 내일을 열어나갈 결단이기도 하며,
후회 없이 즐기고 사랑하며 배우라는 삶의 철학이자, 본인의 이상향을 희생시키지 않을 용기다.
그러한 긍정적 에너지가 결집되었을 때,
지갑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가슴에서 터져 나오는 한 마디가 '욜로'여야 한다.
1990년대 후반, 당시 젊은이들이 유럽여행을 떠나기 시작했던 도화선이 된 영화가 있었다.
바로 '비포 선라이즈 Before Sunrise'였다.
파리로 가는 여자 셀린과 비엔나로 가는 남자 제시의 운명적인 만남을 그린 영화다.
기차 안에서 시끄러운 독일인 부부를 피해 우연히 합석하게 된 청춘남녀는 순식간에 서로 빠져든다.
둘의 달콤한 대화도 잠시, 어느덧 기차는 비엔나에 도착하고 내려야 하는 남자는 마음만 조급해진다.
'지금 이 순간'이 아니면 여자를 놓칠 것만 같은 제시.
용기를 내어 그녀에게 말을 건넨다.
"저와 함께 비엔나에서 내리지 않을래요?"
갑작스러운 제안에 망설이던 셀린, 그래도 결심을 한 듯 제시와 함께 비엔나에서 내린다.
그림 같은 도시 비엔나를 걸으며 청춘남녀의 꿈같은 대화는 지칠 줄 모르며 이어지고,
서로를 향한 강한 이끌림에 시간 가는 줄도 모르다가 어느덧 새로운 태양이 뜨는데...
1996년 개봉하여 잔잔한 파장을 일으킨 이 영화는 그 즉시 로맨스의 대명사가 되었다.
단 하루가 사랑에 빠지기에 충분한 시간임을 증명해 준 영화였으며, 당시 그 파장이 어찌나 컸던지 수많은 젊은이들이 나 홀로 유럽여행을 떠나 무작정 기차에 오르곤 했다. 사랑을 찾기 위해서.
물론 그런 여행이란 지금의 욜로 현상처럼 삶의 경험을 중시했다기보단 로맨스에 편중된 감이 있다.
그러나 그 로맨스에서도 욜로적 요소가 충분하다.
운명적인 만남이라 느끼는 찰나, 망설임 없이 '지금 이 순간'에 몰입하는 로맨스는 지극히 카르페디엠적이며 매우 욜로스럽다.
내일의 태양이 뜨기 전에, 오늘 그녀를 잡아야 한다.
집장만하고 결혼자금 모아서 넉넉할 내일이 올 거라 믿으며 프러포즈를 미루는 것은 욜로가 아니다.
따라서 제시가 셀린에게 제안했던 그 말, "저와 함께 비엔나에서 내리지 않을래요?"는 진정한 욜로 스타일이라 하겠다.
당시 수많은 젊은이들이 '비포 선라이즈'를 꿈꿨던 것처럼,
나 역시도 그런 로망은 있었으나 유럽여행을 가보진 못했다.
그러나 욜로적 로맨스가 꼭 유럽여행을 떠나야만 가능했던 일은 아니었다.
대학원에서 정보산업공학을 전공했던 나는 졸업 논문을 구상하던 시절이었다.
프로그래밍 전공자도 잘 모른다는 '통합 모델링 언어(UML)'에 빠져 관련 서적을 찾고 있었으나 국내에 책이 없었다.
어느 날, 광화문 교보문고를 샅샅이 뒤지다가 구석에 처박혀 있던 UML 서적을 발견하고야 말았다.
'심봤다...!'
너무나 기쁜 나머지 다 읽어버리겠단 욕심에 일산으로 향하는 광역버스 안에서도 그 책을 읽고 있었다.
그때, 옆자리에 앉아 있던 여성이 갑자기 말을 걸어왔다.
"그거 혹시, UML 책 아닌가요?"
놀라웠다. 이 언어를 아는 사람이 옆자리에 앉아 있었다니...
그녀는 나에게 책을 잠시 보여줄 수 없겠냐고 물어왔고, 나는 책을 건네주었다.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책을 읽고 있는 그녀를 쳐다보고 있자니 나 역시 호기심이 일었다.
"저, 근데 UML을 아세요?"
컴퓨터공학을 전공하고 있다는 그녀는 자신이 UML을 접하게 된 계기를 말해 주었고,
어느덧 우리는 이 요상한 언어를 매우 달콤한 언어로 주고받고 있었다.
예뻤다. 왠지 컴퓨터를 전공 안 할 것처럼 생긴 그녀는 나보다 UML을 많이 알고 있었다.
서로 질문하며 서로 대답하고, 끊임없이 대화가 이어지다가 갑자기 조급해지고 말았다.
창밖에 내가 내려야 할 정거장이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갑자기 가슴이 콩닥콩닥 뛰기 시작했다.
'지금 이 순간', 무언가를 해야만 할 것 같았다.
현재를 잡으려는 구체적인 실천 방안으로써 카르페 디엠을 완성하기 위해 결단이 필요한 순간이었다.
무엇보다 삶에 대해 능동적인 도전과 후회 없이 즐기고 사랑하리라는 삶의 철학을 실천하기 위해 용기가 절실한 상황이었는데, 아무튼 너무 길고 복잡하니까 요즘 말로 줄이자면 즉, '욜로YOLO'였다.
때마침, 나의 뇌리를 스쳐 지나간 것은 '비포 선라이즈'에서 제시가 셀린에게 건넨 그 말이었다.
드디어 내 입이 터졌다.
"저, 같이 주엽동에서 내리지 않을래요?"
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