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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딴생각 Sep 04. 2019

지리멸렬한 사랑

사랑에 대한 딴생각


2050년이 되면 결혼 제도가 소멸될 것이라고 '유엔미래포럼'이 예측했다. 간혹 이러한 예측은 '중앙아프리카에서 고릴라가 멸종될 위기에 처했다'는 뉴스와 비슷한 뉘앙스로 전달되기도 한다. 내가 초등학교에 갓 입학했던 시절, 그 옛날에도 두려웠던 미래 예측은 있었다. 당시엔 돈을 주고 물을 사 먹을 것이라는 미래의 모습이 경악스러웠지만, 2019년 어느 날 편의점에서 생수를 고르는 일은 아무렇지 않은 일상이 되고 말았다.


오늘에 순응하는 시대 정서로 미래를 바라보면 십중팔구 두려움으로 요약될 뿐이다. 우리의 현재도 알고 보면 과거의 우리가 상상했던 경악스러운 모습이니까. 혼외정사를 금기시했던 중세 시대를 상상해 보자. 당시에 <섹스앤더시티>를 방영했더라면 가히 지구 종말에 버금가는 패닉 사태가 벌어졌을 것이다.


미래가 정말 심각한 것은 인간의 기대 수명이 점차 증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어느덧 100세를 바라보는 시대가 되었다. 19세기만 해도 기대 수명이 50세를 넘지 못했다는 사실을 상기해 보면 오늘날 우리는 두 번 사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따라서 결혼도 두 번 할 수 있는 일이다.


2019년 7월, 나는 P의 두 번째 결혼식에 참석했다. 기대 수명이 100년쯤 되는 사람들만 모인 탓인지 그의 두 번째 결혼을 놀라워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다만 놀라운 일은 따로 있었는데, 그의 새로운 아내가 스무 살쯤 어리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지구 종말에 버금가는 패닉을 느꼈던 것은 사실이었다.


결혼식장에서 8년 만에 만난 후배 K와 나는 방금 맞닥뜨린 지구 종말에 대해 얘기를 나누게 되었다. 일본 관동 대지진 같은 P의 사랑에 대해 숙연함과 존경심으로 수군덕거렸고, 그러다 어쩌다 보니 화제의 중심이 나로 바뀌고 말았다. 내가 아직 미혼이라는 사실도 후배에겐 적잖이 충격이었나 보다. 나란 존재를 고릴라 멸종급으로 취급하더니 갑자기 이런 질문을 했다.


"왜 사랑을 안 하세요?"


나는 잠시 어리둥절했다. 낯선 질문이었다. 내 평생 왜 결혼을 안 하냐는 질문은 받아봤어도 왜 사랑을 안 하냐는 질문은 처음 들어봤다. 그건 선택지가 없는 질문이었다. 결혼이 객관식이라면 사랑은 철학적 주관식에 가까우니까.


이 질문을 한 후배에게 제대로 질문한 거 맞냐고 물어보자 어이없게도 말이 헛나왔단다. 그러니까 사랑과 결혼에 대해 이야기하다 보니 결혼에 대해 물어볼 걸 사랑으로 잘못 물어봤단다. 그 어이없음에 한바탕 웃어넘겼지만 애먼 가슴에 파문을 일으킨 건 웃어넘기가 힘들었다.


'나는 왜 결혼에는 당당하면서 사랑에는 당당하지 못할까?'


40년을 넘게 혼자 살아왔다. 왜 결혼을 안 하냐는 질문엔 수없이 단련된 몸이다. 오히려 그런 질문을 되받아쳐 상대방을 조선시대 유생급으로 만들 수 있는 레퍼토리도 몇 개 갖고 있다. 결혼은 나에게 아무런 데미지를 주지 못한다. 그런데 그걸 사랑으로 바꾸니까 사정이 달라졌다. 결혼이 현실이라면, 사랑은 마치 두려운 미래 같았다.


아마도 그건 내가 사랑에 대한 확신을 갖지 못했기 때문이리라. 오래전 사랑이라고 믿어왔던 일들이 결국엔 지리멸렬함으로 변했기 때문이리라. 다가왔던 사랑은 늘 나의 경험과 지혜로는 감당할 수 없는 지구 종말처럼 보였기 때문이리라. 결혼은 못 해도 안 아픈 현실이지만, 사랑은 하면 할수록 아플 것 같은 미래 예측이었기 때문이리라. 어느날, '유엔미래포럼'이 내 사랑을 다음과 같이 예측할지도 모르겠다.


"딴생각님의 사랑은 처음엔 뜨겁지만 가까운 미래에 권태스러워질 것입니다."


누구나 예측 가능한 이 사랑을 멸종 위기에 처한 고릴라급으로 두려워할 것인지, 아니면 편의점에서 생수를 사 먹듯 일상처럼 받아들일 것인지는 오로지 나의 몫이었다. 그랬다. 나는 어쭙잖은 미래 예측으로 사랑을 했었나 보다. 어차피 권태스러워질 사랑도 그게 사랑인 것을, 그게 사랑의 일상인 것을, 당시엔 어설픈 현실 감각으로 사랑이 어정쩡해지는 것이 두려웠었나 보다.


내가 좋아하는 작가 은유도 이런 말을 했다. '어정쩡한 상태를 삶의 실패나 무능으로 여기지 말자고, 사랑은 뜨거울 때보다 어정쩡한 상태일 때가 훨씬 더 길다고'. 우리 주변을 둘러봐도 뜨거운 감정을 느끼는 연인들보다 너무나 익숙하고 느슨해서 친구인지 가족인지 헷갈리는 연인들이 더 많다. 늘 팔짱을 끼거나 뜨겁게 키스하는 부부의 모습은 보기 드문 일이며, 각자의 삶을 의식하거나 생활고에 허덕이는 부부의 모습이 훨씬 더 일반적이다. 생각해 보면 그런 지리멸렬한 사랑이 가장 흔한 사랑이었다. 우리는 대부분 그렇게 살며 또 그렇게 사랑한다.



그렇게 예식이 끝났다. P는 두번째라 그런지 제법 익숙한 발걸음으로 신부와 함께 웃으며 퇴장하고 있었다. 얼마 전 뉴스에서 인간의 기대 수명이 150년이 될 것이라는 미래 예측도 나오기 시작했다. 세 번 결혼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P가 만약 세 번 결혼한다면 그는 진정 미래형 인간 게놈이다. (욕처럼 썼지만 욕이 아니라 영어로 genome)


인생이 150년이라면, 어쩌면 결혼에 대한 가치관이 달라질지도 모르겠다. 19세기의 삶이란, 20세쯤에 가정을 이루고 30년 동안 아이를 키우면서 부부생활을 하다가 50세에 생을 마감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150년을 사는 사람이 20세에 가정을 이뤘다간 130년을 아이를 키우면서 부부생활을 해야 한다.


주례사에서 "검은 머리 파뿌리가 되도록!"이 30년인 것과 130년인 것은 천지 차이다. 결혼 서약에서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가 알고 봤더니 130년짜리 결혼 생활을 약속하는 일이라면 왠지 주저할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 이유로 현 추세처럼 여러 번 결혼하는 '연속 결혼(serial marriage)'이 더 많아지거나 어쩌면 결혼을 한 적이 있지만 결혼하지 않은 기간이 더 긴 사람들이 많아질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따져봤을 때 2050년에 결혼 제도가 소멸될지도 모른다는 미래 예측은 신빙성이 있어 보인다. 그렇다면 사랑은? 사랑은 어찌 된단 말인가.


안타깝게도 사랑에 대한 미래 예측은 그 어디에도 찾을 수 없다. 나는 한 번 도 보지 못했다. 연애 스타일이나 연애 방식 또는 결혼 제도의 변화는 들어봤지만 궁극적으로 "사랑이 이렇게 변화한다"라고 말하는 것을 들어본 적이 없다.


사랑과 혁명, 사랑과 이데올로기라는 큰 틀에서 <사랑의 급진성>이라는 훌륭한 저작을 남긴 스레츠코도 사랑을 분석하는 일이란 마치 캄캄한 물속으로 뛰어드는 일처럼 느껴졌다고 토로했다. 이 세상이 아무리 발달해도 사랑에 대한 담론은 극단적인 고독에 처해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한편으로, 결혼의 감소 혹은 소멸이 결혼 제도를 없애야 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져서는 곤란하다. 그 안에는 복잡 미묘한 관계들이 얽혀있기 때문이다. 부부간의 관계,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 형제와 자매 간, 혹은 줄줄이 이어지는 가족 계보와 친족 간의 관계 등, 그런 관계들을 부정한다면 수 세기 동안 이어 온 인류 문명을 한꺼번에 부정하는 행위나 다름없다. 따라서 결혼 제도가 소멸될 것이라는 예측은 오늘날의 시대 정서로 감당하기엔 너무나 과격한 표현일지도 모르겠다.


아주 오래전, 돈을 주고 물을 사 먹는 미래가 무서웠던 초등학생이 먼 훗날 어른이 되어 편의점에서 에비앙 생수를 사 먹는 평범한 일상을 보내는 것처럼, 결혼의 감소도 먼 훗날 다른 무언가의 대안 가족으로 자생하며 자연스럽게 연착륙할지도 모른다. 중요한 것은 연인 간의 사랑도 혹은 혈육 간의 사랑도 그것이 소멸될 것이라는 미래 예측은 그 어디에도 없다는 점이다. 비록 그것이 권태스러울지언정, 결코 소멸되지 않는 것이 사랑이라 믿는다.


어느덧, 뜨거운 온기가 지나가고 처서의 한기가 느껴지는 가을이 왔다. 고독하기 좋은 날씨다. 한 시절을 사랑으로 보냈으니, 한 시절은 사랑 없이 보낼 수도 있으리라. 이 계절이 지나고 훗날 비슷한 온기가 느껴지면, 나의 사랑도 다시 생동할 것이다.



사랑에 대한 딴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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