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꽃을 서둘러 피우지 않는다
늦은 밤, 한 흑인 목사는 아무것도 작성하지 못한 종이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고뇌에 휩싸인 그는 전화기를 들어 자신의 보좌관과 몇 가지 아이디어를 의논했고, 이내 다시 고뇌하기 시작했다.
그는 새벽 3시가 넘도록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고, 지칠 대로 지쳐서 거의 쓰러질 지경이 되었다.
1963년 8월 아침.
그렇게 일자리와 자유를 위해 대행진이 열리기로 한 워싱턴의 아침이 밝았다.
마틴 루터 킹, 그는 행사의 마지막을 장식할 연설문을 그날 아침까지도 완성하지 못했다.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연설이라고 하는 마틴 루터 킹의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킹의 마지막 연설에 주어진 시간은 5분이었다.
짧다면 짧은 시간이지만, 5분 연설이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다.
역사적으로 위대한 사상가들은 긴 연설보다 짧은 연설을 준비하는데 더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것을 간파했다.
우드로 윌슨 대통령도 이런 말을 했다.
"10분짜리 연설문을 준비하는 데는 꼬박 2주가 걸린다.
만약 시간 제약 없이 연설을 할 수 있다면, 오히려 아무런 준비도 할 필요가 없다"
5분 연설을 하려면 어휘 선택에 있어 신중을 기해야 한다.
그리고 짧지만 감동적이면서 전체를 관통하는 지혜가 담겨 있어야 한다.
마틴 루터 킹은 행사가 시작되기 두 달 전부터 연설을 해야 한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연설문의 완성을 서두르지 않았다.
어찌 보면 연설의 주제와 방향을 결정하는 일을 심사숙고했다고 해야겠다.
쉽게 말하자면, 그것은 '미루기'였다.
<오리지널스>의 저자, 애덤 그랜트는 킹이 위대한 연설을 할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그것이라고 강조했다.
'미루기' 덕분에 최고의 연설을 할 수 있었다니, 당신은 믿을 수 있겠는가.
어렸을 때부터 끊임없이 듣는 잔소리 중에 하나가 "미루지 마라"였다.
부모님은 숙제를 막판까지 미루지 말고 항상 미리 하라고 잔소리를 했으며, 교사들은 미루는 행위가 안 좋은 습관이라고 가르쳤다.
어릴 적 방학숙제를 미루다가 방학이 끝나갈 때쯤 아찔했던 기억이 떠오르는가.
밀린 방학 일기를 한꺼번에 써야 하는 것은 정말 끔찍한 경험이었다.
그것이 매우 큰 고통이라는 것을 아주 어린 나이에 겪어야만 했다.
기업에서도 미루는 행위는 좋지 않은 인식을 줄 뿐이다.
무엇보다 비즈니스에서는 항상 선발주자가 되어야 한다는 통념이 있다.
시장을 선점하기 위해서는 의사결정을 빨리하고 경쟁자보다 실행도 빨라야 한다는 고정관념이 강하다.
따라서 의사결정이나 실행을 미루는 행위는 정당하게 보이기가 어렵다.
그런 '선발주자의 이점(first mover advantage)'을 세상에 각인시켰던 대표적인 학자가 리버만과 몽고메리였다.
그들은 1988년 그러한 논문을 발표하여 비즈니스에 엄청난 파장을 불러일으켰지만, 현실에서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이 발생하자 선발주자에게 불리한 점이 많다는 사실을 10년이 지난 후에야 인정하게 되었다.
그렇다. 사실 시장에서 선발주자는 대부분 빨리 죽었다.
아니면 후발주자에게 "이렇게 하면 망한다"라는 반면교사 역할을 톡톡히 치르며 스스로 자멸했다.
그들의 선견지명과 빠른 실행력은 후발주자에게 좋은 인사이트를 주었고, 먼저 시장을 개척했으나 나중에 들어온 후발주자에게 무임승차를 허락했으며 대부분 시장을 빼앗겼다.
우리가 알고 있는 수많은 성공사례들은 사실 선발주자가 아니었다.
실제로, 우리가 시장의 '선구자'라고 생각하는 기업들은 대부분 후발주자라고 보는 게 맞다.
구글은 오버추어를 따라잡은 후발주자였고, 페이스북은 마이스페이스를 따라잡은 후발주자였으며, 마이크로소프트는 애플을 따라잡은 후발주자였다.
(물론, 애플이 다시 돌풍을 일으키기 전까지)
선발주자가 유리하다는 증거가 별로 없음에도 여전히 사람들은 선발주자가 유리하다고 믿는다.
그것은 성공 사례가 주는 강렬한 인상 때문이다.
실패 사례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 오래 머물지 못한다. 따라서 드물다고 착각한다.
인간이기에 가질 수 있는 판단의 오류가 발생하는 것이다. 이것을 가리켜 '가용성 편향'이라고 한다.
가용성 편향 availability bias :
자신의 경험, 혹은 익숙하고 쉽게 떠올릴 수 있는 것을 가지고 세상에 대해 판단하는 것.
혹은 머릿속에 잘 떠오르는 것이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
우리의 직관을 잘못된 길로 인도하는 일종의 마인드 버그.
드물게도, 가장 주목받은 선발주자였기에 실패마저도 유명해진 사례는 있다.
그것은 아마도 '세그웨이(Segway)'일 것이다.
2001년, 미국의 발명가 딘 카멘에 의해 개발된 1인용 이동 수단 말이다.
초기 개발 시, 몇몇 전문가들은 세그웨이가 인터넷보다 더 위대한 문명의 이기(利器)가 될 것이라며 극찬을 했다.
유명인사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이것이 판매되는 순간 엄청난 사회 변화가 일어날 것이라고 호들갑을 떨었다.
하지만 세그웨이가 세상에 출시되었을 때 판매량은 기대에 미치진 못했다.
세그웨이가 실패한 이유 중에 하나는 너무 서둘렀다는 점이었다.
'실리콘밸리의 철학자'라는 별명을 가진 랜디 코미사는 세그웨이 팀에게 이렇게 조언했다고 한다.
"인내할 것"
심지어 스티브 잡스도 세그웨이의 출시를 미루어야 한다고 그들을 종용했다.
우선 디자인부터 바꿔야 하고, 안정성과 유용성 조사를 실시해 사람들이 세그웨이가 어떻게 운용되는지 직접 보게 해야 한다고 말했다.
무엇보다 시중에 판매하기 전에 사람들이 갖고 싶은 마음이 들게 만들어야 한다고 잡스는 조언했다.
그러나 딘 카멘은 누구의 조언도 귀담아듣지 않았다.
고객의 호응, 안정성, 법적 문제, 가격, 디자인의 결함 문제 등을 해결하지 않은 채 서둘러 세그웨이를 시장에 내놓았다.
덕분에 대형 사건이 터지게 되었다.
당시 미국 대통령인 조지 부시가 텍사스에 있는 자기 목장에서 세그웨이를 타다가 그만 자빠지고 말았다.
당연한 결말이겠지만 미 백악관은 세그웨이를 리콜시켰고, 대통령을 자빠뜨린 이 요물은 혹독한 신고식을 치러야 했다.
불행은 미국 대통령으로 끝나지 않았다.
이후, 세그웨이사를 인수했던 영국의 지미 헤셀든 사장은 세그웨이를 타다가 낭떠러지에 떨어져 숨진 체 발견되었다.
하버드대학교에서 기업가정신을 연구하는 빌 실먼은 세그웨이를 개발 초기부터 관여한 인물이다.
그는 아직까지도 세그웨이가 안전성을 증명하고 주요 도시의 보도에서 탈 수 있도록 허가를 받는 등, 천천히 일을 진행시키고 출시를 미루었다면 엄청난 성공을 거뒀을 거라며 안타까워했다.
문득, 이런 속담이 생각난다.
서두르는 것은 낭비다.
사실, 마틴 루터 킹은 그의 위대한 연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를 미리 준비하고 있었다.
심지어 행사가 열리기 두 달 전부터 연설문 작업을 시작했다.
여러 사람들에게 자문을 구하며 다양한 의견을 듣기도 했다.
그러고 나서 그의 변호사이자 연설문 작성자인 클래런스 존스에게 연설문의 초안을 부탁한 상태였다.
그가 마음먹기에 따라서 연설문은 한 달 전에 끝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는 완성을 미루었다. 다시 말하자면, 심혈을 기울였다.
끊임없이 연설문의 아이디어를 구상했고, 덕분에 아주 오랜 기간 동안 연설문을 고민할 수 있었다.
미완성된 작업은 완성된 작업보다 더 오래 기억에 남는다.
이루지 못한 첫사랑이 왜 오래 기억되는 줄 아는가.
그것은 미완성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자이가르닉 효과 Zeigarnik effect'라고 한다.
마틴 루터 킹은 연설문의 완성을 미루며 자이가르닉 효과를 보게 되었다.
덕분에 그는 아주 오랜 시간 연설문에 정성을 쏟았고 깊은 잠재의식까지 끄집어낼 수 있었다.
그는 연설을 하기 나흘 전이돼서야 본격적으로 연설문을 작성하기 시작했고, 심지어 당일 전날 밤에는 연설문을 처음부터 다시 쓰기도 했다.
그는 완성을 서두르지 않았다.
다만 미루고 미루어 궁극에 도달하고자 노력했다.
위대함은 서둘러 완성되지 않기에.
역사적으로도 위대한 천재들 중에는 '미루기의 달인'들이 많았다.
그중 최고의 미루기 선수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일 것이다.
그의 대표적인 작품 <모나리자>는 1503년에 그리기 시작하여 몇 년 동안 그리다 말다를 반복하더니 1519년 그가 죽음에 임박해서야 완성했다고 한다.
완성하기까지 무려 16년이 걸린 셈이다.
그의 또 다른 대작 <최후의 만찬> 역시 15년 동안 그렸다고 한다.
그가 게으른 성격이기 때문에 미룬 것은 아니었다.
이를테면, 다빈치는 <모나리자>를 그리던 중에 어떤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그는 그림을 그리다 말고 빛이 구(球)에 닿으면 어떻게 굴절되는지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광학 연구의 결과는 고스란히 <모나리자>로 옮겨졌다.
그는 새로운 회화 기법을 완성했는데, '스푸마토 기법'과 '공기 원근법'이 그것이다.
그런 덕분에 <모나리자>는 이전에 없었던 독특한 원근감과 공간감이 살아 있는 명작으로 탄생하게 되었다.
그와 동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은 다빈치가 실험을 하느라 그림은 내팽개치고 산만해졌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물론 다빈치가 실험에 정신이 팔려 의뢰받은 그림을 제때 끝내지 못한 경우가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우주의 섭리를 이해하려는 천재에게는 매우 하찮은 일이다.
위대한 창조자는 결과를 서두르지 않는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완성에 심혈을 기울일 뿐이다.
보통 사람들의 관점에서 그것은 게으름처럼 보이겠지만,
완성을 위해 때로는 미룰 수 있어야 한다.
인도에서 200여 기업의 CEO를 대상으로 연구한 흥미로운 사례가 있었다.
('CEO Personality, Strategic Flexibility, and Firm Performance' Sucheta Nadkarni & Pol Herrmann. 2010.)
이 연구 결과가 흥미로운 이유는 수익성 좋은 기업의 CEO일수록 신속함에 대해 자신을 낮게 평가했다는 점이다.
그 말인즉, 의사결정을 자주 지연하거나 제때에 일을 끝내지 못하는 CEO가 오히려 높은 수익을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심지어 그런 기업의 임원들은 자신의 CEO가 전략적으로 유연하다고 평가했다.
주도면밀하게 계획을 세우고, 빠르게 행동을 개시하며, 성실하게 일하는 CEO일수록 전략적으로 경직된 사고를 지닌 것으로 나타났다.
그런 유형의 CEO들은 일단 전략이 수립되면 그 전략을 고수했다.
급변하는 시장에서 전략의 경직성은 매우 위험한 것이다.
한편 전략에 융통성이 있어 새로운 기회를 잘 활용하고, 위협을 막아내는 임기응변에 강한 CEO들은 상대적으로 업무를 잘 미루는 것으로 드러났다.
마틴 루터 킹 역시 융통성과 임기응변에 강했다. 물론 미루기는 두말할 것도 없다.
그는 역사적인 대행진의 날, 연단에 서있는 순간까지도 연설문의 내용을 수정하고 있었다.
그렇게 연설은 시작되었고 한참 연설문을 따라 연설을 하던 중에 그의 등 뒤에서 누군가가 외쳤다.
"꿈에 대해 얘기해 줘요. 마틴!"
킹은 그 순간 무언가를 결심했다고 한다. 동시에 준비했던 연설문을 접었다.
그리고 25만 명의 군중 앞에서 그리고 수백만 명이 TV로 지켜보는 가운데, 미래에 대한 자신의 염원을 담아 즉흥 연설을 하기 시작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퓰리처상을 수상했던 역사학자 데이비드 개로우의 표현을 빌리자면 "마치 재즈 음악가처럼" 킹이 즉흥적으로 연설했다고 한다.
"I have a dream!"
그가 연설에서 이 구절을 반복할 때마다 거대한 군중이 같이 외쳤다.
그것은 메아리가 되었으며 온 세상에 울려 퍼졌다.
그렇게 세상의 약자들이 꿈을 꾸기 시작했던 위대한 역사가 탄생하게 되었다.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다한 후에 결과는 하늘에 맡긴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과정은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선이지만 결과는 어쩔 수 없는 운명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불교에서 말하는 인연법(因緣法)과도 일맥상통하는데, '인(因)'과 '연(緣)'의 상호작용으로 결과가 만들어진다는 뜻이다.
여기서 인(因)은 내가 노력으로 만들 수 있는 직접적인 원인을 말하고, 연(緣)은 나를 둘러싼 환경과 조건 등 간접적인 원인을 의미한다.
결국 '인'이란 나의 노력이 좌우하는 것이고, '연'이란 나의 노력을 벗어나는 것이 된다.
이렇게 보자면 결과는 어쩔 수 없는 하늘의 뜻이겠구나 하겠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인간이 할 수 있는 노력이 하나 더 있다.
그것은 '기다림'이다.
'연(緣)'이란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외부 조건이지만 그것이 나에게 이로운지 아닌지 스스로 판단할 수 있다.
지금 이 순간, 아직 '연'이 닿지 않았다면 할 수 있는 나의 노력은 '기다림'이다.
따라서 섣불리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것이 '미룸'이다.
아직 꽃이 만개하기에 이르다면 나의 꽃을 서둘러 피우지 않는다.
나의 조급함에 이끌려 '인'으로써 '연'을 망치지 않는다.
최선의 노력만이 성공을 보장하지 않는다.
때로는 지혜로운 인내가 필요하다.
인내하여 때를 만나면, 비로소 완성되는 것이다.
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