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취향은 귀족적이고, 내 행동은 대중적이다
내 취향은 귀족적이고, 내 행동은 대중적이다.
- 빅토르 위고 -
어느 금요일 저녁 7시, 내 차는 동대문 한복판을 지나고 있었다.
그것을 달리 표현하자면 러시아워 때 피해야 할 장소에 내가 있었단 얘기다.
도로에 꽉 들어찬 차들을 보며 매우 늦은 귀가가 예상되기에, 평소 같으면 조바심에 발을 동동 구르겠지만 그날은 그럴 이유가 하나도 없었다.
일단 금요일 저녁이었고 공교롭게도 난 어딜 가야 할 약속도 없었으며, 그렇다고 집에 일찍 들어가야 할 이유 따위도 없었으니까.
그런 순간에 맞이하는 러시아워는 평소 같지 않게 마음이 너그러울 수 있다.
심지어 음악을 들으며 주변을 둘러볼 수 있는 여유까지 갖게 해준다.
월요일부터 금요일 오후까지 정신없이 한 주를 보내다가 갑자기 느린 듯 멈춰버린 그 시간, 쳇바퀴처럼 반복되던 일상에서 벗어나 잠시 일탈이 허락될 수 있는 시간과 마주하게 된 것이었다.
차라리 카페에 들어가서 느긋하게 커피나 마시고 가야겠단 생각이 들던 참이었다.
동대문 디자인플라자를 지나 청계천에 들어설 때쯤, 당시 새롭게 오픈한 JW 메리어트 호텔이 눈에 들어왔다. 호텔의 1층 라운지 카페가 꽤 괜찮다는 기사를 읽은 기억이 떠올랐고, 난 자연스럽게 핸들을 돌렸다.
피아노 소리가 울려 퍼지는 라운지 카페엔 테라스도 있었다.
그곳엔 양초가 놓인 테이블과 기대기 편한 의자가 눈에 띄었다.
무엇보다 경치를 보기에 좋을 것 같아 난 망설임 없이 테라스에 자릴 잡았다.
노을빛 어둠 속의 도시, 그 도시 속에 조명으로 빛이 나는 흥인지문을 느긋한 자세로 감상할 수 있는 최적의 카페테라스였다. 더군다나 주문한 커피와 서비스로 제공된 초콜릿이 금요일 밤의 감미로움을 더해 주었다.
아, 이렇게 편안할 수가.
한편으로는 평소와 다르게 남다른 소회가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난 가져왔던 노트북을 열고 그날의 감수성과 떠오르는 단상들을 기록했다.
그렇게 이 시간과 공간과 떠오르는 영감을 오롯이 간직하고 싶었다.
2014년 4월, 그렇게 나는 새로운 취향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것은 호텔 라운지 카페에서 누리는 호사로움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편안한 곳에 앉아 세상을 관조하는 자세로 평소와 다르게 '딴생각'을 즐기는 것이 나의 취향이 되었다.
우리는 평소 자신의 취향과 무관한 삶을 살고 있다.
하루 일과의 대부분을 조직 안에서 생활하는 우리로선 개인의 취향을 고집할 수도 없는 일이다.
모두가 함께 식사하는 중화반점에서 상사가 자장면을 시키면 나머지도 자장면으로 통일하는 것이 미덕이고, 회식자리에서 첫 잔은 예외 없이 소맥으로 함께하는 것이 공감대이며, 다음날은 만장일치로 해장국을 먹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물론 대다수가 공감하는 취향이라는 것도 존재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거의 모든 여성들을 예외 없이 만족시키는 입셍로랑 립스틱이라든지, SK텔레콤 매장을 지날 때마다 설현의 포스터에 시선이 돌아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모든 남성들의 '취향저격'이다.
그러나 세상에는 다양한 개성이 존재하듯 개개인마다 다양한 취향이 존재해야 마땅하다.
만약 자신의 남다른 취향을 발견하지 못했다면 아직은 자아성찰이 부족하거나 자기계발이라곤 영어공부 밖에 모른다는 반증이다. 최소한 자기애가 빈약하다는 명백한 증거다.
취향의 사전적 정의는 ‘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방향, 또는 그런 경향’을 뜻한다.
우리는 매 순간마다 마음이 생기는 경향에 따라 영향을 받으며 무엇인가를 선택한다.
이때 우리로 하여금 무엇을 선택하도록 만드는 무의식의 기재가 바로 '취향'이다.
취향은 그 사람의 선천적인 기질에 기인할 수도 있고, 교육이나 환경처럼 후천적인 요인에 기인할 수도 있다.
누구는 아메리카노를 좋아하고 누구는 에스프레소를 좋아한다.
취향에 따라 빨간색이나 초록색을 선호하는 경향이 달라지듯이, 이러한 취향 중에 어떤 것이 더 좋은 것인지 판단하는 기준은 없다.
다만, 이 취향이 문화/예술의 영역으로 넘어가면 얘기가 달라진다.
취향은 그 사람만의 라이프 스타일이기도 하지만, 문화/예술 작품을 판단하고 향유하는 능력을 의미하기도 한다.
바로 여기서부터 취향은 ‘고급’과 ‘저급’으로 나뉜다.
물질적인 것보다 정신적인 것을 추구하는 고상한 생활양식, 예술을 즐기는 감수성과 그것을 알아보는 안목 즉, 고급 취향은 하루아침에 생기는 것이 아니다.
흔히 말하는 <벼락부자>라는 말속엔 돈으로도 메꿔지지 않는 문화적 빈곤과 저급 취향에 대한 경멸이 숨어 있는 것이다.
문화적 취향의 '저급자'가 서서히 자신의 취향을 발견해 가는 스토리의 프랑스 영화가 있는데 바로, <타인의 취향>이다.
영화 속 남자 주인공인 카스텔라는 한 기업의 CEO다. 그는 문화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다.
생전 연극을 본 적도 없고, 소설을 읽은 적도 없으며, 그림에는 관심을 가져 본 적도 없다.
단지 그에게 골치 아픈 것은 외국인 바이어를 상대해야 하는데 자신의 영어가 부족하다는 사실이다.
결국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영어를 가르쳐 줄 클라라(여주인공)를 섭외하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조카가 출연한다는 이유로 보고 싶지도 않은 연극을 보게 되는 카스텔라는 연극 속 여주인공의 연기에 감동하여 그만 눈물을 흘린다. 생전 연극이라고는 본 적이 없는 그가 연극에 빠져버린 것이다.
심지어 그 여주인공은 자신의 영어 과외선생인 클라라였다.
공연이 끝난 후 카스텔라는 클라라를 찾아가 연극이 매우 감동적이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클라라는 그를 냉정하게 대할 뿐이었다.
그녀의 눈에는 그가 문화적 소양이라고는 눈곱만치도 없는 무식쟁이로 보였기 때문이다.
사실 영어를 가르치기 위해 처음 카스텔라를 만났을 때부터 그녀는 은근히 그를 무시하고 있었다.
비록 자신이 무명 배우에 불과하고 집세조차 내가 힘들 정도로 가난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스텔라보다는 우월한 고급 취향을 갖고 있다는 일종의 자부심이 그와의 관계에 선을 그었다.
그런 것도 모른 채, 카스텔라는 영어공부를 핑계로 계속 클라라의 주변을 맴돌기 시작한다.
심지어 그녀의 예술가 친구들과 친해지고 싶어서 식사와 술을 대접하기도 하지만 문화적 안목이 부족한 그에게 돌아오는 것은 무시와 조롱뿐이었다.
카스텔라는 클라라에게 영어 숙제로 써온 영시(英詩)를 빌어 자신의 마음을 고백하게 된다.
하지만 클라라는 그의 마음을 거절한다. 카스텔라는 그녀의 취향이 아니었기 때문에.
어느 날 그는 클라라의 친구가 여는 그림 전시회에 참석한다.
그림을 둘러보던 그는 희한하게도 어떤 그림에 이끌리게 되었고, 그것이 자신의 취향임을 발견하게 된다.
결국엔 그 그림을 구매하게 되었고, 심지어 그 화가에게 대형 벽화를 주문하기에 이른다.
한편 이 사실을 알게 된 클라라는 카스텔라가 자기 때문에 그림을 사고 대형 벽화까지 주문한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자신의 화가 친구들이 이를 이용해 돈을 벌고 있다고 생각한 클라라는 카스텔라를 찾아가 이렇게 말한다.
“당신은 이용당하고 있는 거예요!"
그런 그녀에게 카스텔라가 말했다.
“그 사람들이 당신에 대한 내 호의를 이용했다고요?
난 그림이 좋아서 산 것뿐인데, 뭐가 문제죠?
내가 그림을 산 이유가 당신을 기쁘게 해주려고? 근사하게 보이려고?
아주 잠깐이라도 내가 그림이 좋아서 샀다는 생각은 안 해 봤어요?
난 그 그림이 정말로 좋아요.”
순간 클라라는 한 방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저급 취향을 가진 카스텔라가 그림을 구매한 이유는 온전히 자기 때문이라고 생각한 것이 오만과 편견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설사 자기와 같은 취향은 아니지만 타인에게도 남다른 취향이 있다는 것을,
본인도 모르게 잠재되어 있다가 어떤 계기를 통해 갑자기 표출될 수도 있다는 것을,
그것은 고급이냐 저급이냐를 따지는 것처럼 우월성과는 아무 상관없다는 것을 말이다.
사실, 취향이 고급이냐 저급이냐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다만 자신의 취향에 관심을 갖고 계속 연마해가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존재할 뿐이다.
취향이 도드라지는 사람은 우월한 취향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 정말 자신이 좋아하는 걸 찾은 사람이다.
물론, 취향이라는 그럴듯한 자질이 폭력이 될 수도 있다.
문화/예술적 자존감이 강한 클라라는 취향이 빈약한 카스텔라를 업신여겼다.
소설 <취향입니다. 존중해주시죠>에 보면 취향 없이 평범하다는 이유로 여자 친구에게 버림받은 남자가 등장한다.
하지만 그것이 취향의 문제일까?
그것이 취향이든, 총이든 간에 남을 겨냥하기 시작하면 모든 게 상처를 줄 수 있는 무기다.
취향이 남다른 사람은 자신이 뭘 원하는지 알기에 다른 사람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
다만, 그 자유로움으로 다른 사람의 취향까지 비난할 이유는 없다.
나는 가끔 일상에서 벗어나 평소와 다른 생각(딴생각)을 즐기는 걸 좋아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 시간과 공간에 대한 나만의 취향도 생겨났다.
그것은 딴생각을 하기에 좋은 시간과 공간을 의미한다.
이렇게 얘기하면 아무도 없는 장소에 틀어박혀 글을 쓴다고 오해하기 쉬운데, 꼭 그렇지도 않다.
딴생각의 발상은 오히려 사람들 속에서 이루어진다.
다만, 심리적 거리감이 충분해야 한다.
사람들 속에 함께 있지만 불편함을 느끼지 않을 정도의 심리적 거리가 확보된 공간이어야 좋다.
적당하면서도 일정한 소음이 있는 그런 곳에서 희한하게도 편안한 휴식과 집중도 가능하다.
이것을 ‘라운징(Lounging)’이라고 한다.
딴생각은 이 라운징이 가능한 공간에서 적절한 시간에 이루어진다.
이렇게 나를 위한 라운징 공간은 내가 발품을 팔아서 발견해야 하는 것들이다.
어느 날 러시아워 때 동대문에 갇혀서 우연히 발견한 장소도 있지만, 대부분은 라운징이 가능한 공간을 찾기 위한 목적으로 돌아다니는 일이 많다.
그러나 이런 일은 귀찮거나 힘들지 않고 흥미로운 놀이처럼 느껴질 뿐이다.
“당신의 취향은 무엇입니까?”
혹시 이 질문에 대해 이성에 대한 취향만 떠오른다면, 당신의 취향은 유아기 수준일 확률이 높다.
물론, 당신의 취향 수준을 저격할 생각은 없다.
다만, 취향이 있는 사람, 그리고 취향을 연마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행복을 자가발전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자신을 위한 취향의 발견, 당신도 해 볼만하지 않은가.
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