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임감 중독
나의 책임감이 크면 클수록, 다른 누군가의 책임감은 작아진다
직장생활한 지도 꽉 찬 2년 차 때, 밀려오는 하품을 늘어지게 하다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똑같은 업무가 2년째 이어지다 보니 '감'이란 게 완성됐구나 싶다가도 지루하기까지 했다.
시키는 일 척척해내고 시키지 않은 일도 알아서 할 정도였으니, 회사에서 제법 사람 구실 좀 하는 셈이었다.
그땐 그랬다. 지금으로부터 십수 년 전의 일이다.
그게 힘겨운 직장생활의 서막이 될 줄은 미처 몰랐다.
생각해 보면 열정도 많은 시기였다. 다만 그 열정으로 해야 할 일이 다소 아쉬웠을 뿐이었다.
2년 차 신입사원에게 어려운 일이 뭐가 있었겠는가.
예상 가능하고 루틴 한 업무의 연속을 처리할 뿐, 크게 책임감을 갖고 할 만한 일도 없었다.
그냥 일이 쉬워 보이기 시작했다.
그런 나와 다르게 내가 다니던 회사의 상황은 점점 어려워 보이기 시작했다.
성장하던 매출이 정체를 지나 하락하기 시작했는데, 기존 사업은 활로를 찾지 못했고 신사업은 아직 성과를 내기에 멀어 보이기만 했다.
안타까운 점은 이런 사태에 책임감을 갖고 완벽한 해결방안을 제시하는 사람은 없었다.
물론 나의 선임들은 매번 문제점과 해결방안을 논의하기 위해 회의에 소집되거나 보고서를 만들어야 했다.
문제는 보고하는 족족 상사에게 깨지기만 했다는 것이다.
그럴 때마다 늘어나는 것은 퇴근 후 술자리였고, 항상 안줏거리는 회사의 문제와 상사의 '뒷담화'였다.
술자리에서 선임들이 주고받는 대화를 듣다 보면 너무나 흥미로워 빠져들게 되었다.
그런데 이상한 점도 발견했다.
선임들이 술자리에서 주고받는 대화와 그들의 보고서 사이에서 상당한 이질감이 느껴졌던 것이다.
(선임들이 매번 보고서 출력을 나에게 시켰기에 난 보고서를 다 읽어볼 수 있었다.)
술자리에서는 매우 논리 정연하게 회사의 문제점을 조목조목 짚어 내는데, 그 언사가 어찌나 현란하였는지 두괄식과 미괄식을 오르내리는 선임들의 말솜씨에 감탄사가 절로 나올 정도였다.
그런데 정작 보고서를 보게 되면 맥이 탁 풀려버리는 것이었다.
물론 자유분방한 술자리와 뭔가 경직된 느낌의 보고서가 같을 순 없지만 말이다.
당시엔 다른 술자리도 정말 많았다.
어떤 날은 팀장이 주도하는 술자리가 있었고, 어떤 날은 임원이, 또 어떤 날은 사장과 사원이 함께 하는 술자리도 있었다.
나는 그 모든 술자리를 하나도 빠짐없이 참석하면서 또 한 가지를 느끼게 되었다.
선임이든, 팀장이든, 임원이든, 사장이든 회사의 문제점이 무엇인지 생각하는 바가 크게 다르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단지 그들 사이를 오르내리는 보고서만 그들 마음과 같지 않았을 뿐이었다. 참 희한하게도.
그때 느꼈던 이상한 상황을 지금 생각해 보면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그것은 회사의 문제에 대해 각자가 어떤 의식을 갖고 있는지, 일종의 체감 수준 차이였다.
예를 들자면 이렇다.
회사에 문제점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나와는 크게 상관없다고 체감할 수도 있다.
이때 회사의 문제점에 대해 언급하는 발언을 들으면 대략 다음과 같은 말본새를 가진다.
"우리 회사는 이게 문제야."
"이러니까 우리 회사는 안돼, 뭘 몰라!"
쉽게 말하면, 회사의 문제란 강 건너 불구경과 비슷하다.
뭐가 문제인지 알더라도 자신이 문제 해결을 위해 적극성을 보여야 할 이유가 그다지 없는 상태다.
어쨌든 회사의 문제가 뭔지는 알고 있으니 딱 <문제 의식> 수준에 해당한다.
하지만 이와 다르게 체감 수준이 높은 사람이 있다.
회사에 문제가 있을 때,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자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즉, <문제 의식> 수준에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문제 해결을 위해 고민하게 된다.
그리고 문제가 심각할수록 스스로 위기감이 고조된다.
보통 직책을 가진 사람들이 이에 해당하며, 문제가 곧 자신에게도 위기라고 느껴지기에 <위기 의식> 수준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위기 의식>보다 더 높은 체감 수준도 있다. 회사의 문제가 곧 자신에게 직결되는 사람들이다.
이때는 문제 해결을 위한 의무감 정도가 아니라 책임감을 느끼게 된다.
의무감이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를 자각하는 수준이라면, 책임감은 더 나아가 반드시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의지의 원천이 된다.
뿐만 아니라 회사의 문제는 곧 자신의 문제라는 강력한 동일시를 갖는다.
이렇게 동일시가 강력한 사람은 이른바 C레벨(CEO, COO, CFO 등)에 있는 사람들이며, 이 정도가 되어야 비로소 최상위 의식이라 할 수 있는 <당사자 의식>에 해당한다.
그렇다고 모든 조직 구성원들이 책임감을 가지며 <당사자 의식> 수준에서 일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자신에게 주어진 의무와 책임을 각성하여 스스로 느끼는 것이다.
대부분의 경우, 자신의 직급에 따라 조직의 위계가 잡히듯이 의식 수준에서도 자연스럽게 위계가 잡히는 것이 일반적이다.
아무튼 <문제 의식> 수준에 있는 사람이 쓴 보고서를 <위기 의식> 수준에 있는 사람이 만족할 리 어렵고, <위기 의식> 수준에 있는 사람이 쓴 보고서를 <당사자 의식> 수준에 있는 사람이 만족할 리 어렵다.
우리가 쓰는 보고서가 상사에게 자주 퇴짜 맞는 이유는 이와 같은 이치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당사자 의식>을 갖고 있다 하더라도 반드시 문제 해결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의외로 아주 엉뚱한 곳에서 문제 해결이 될 수도 있으니까.
예를 들어, 그 문제에 깊게 관여하지 못했지만 상황을 주시하게 되는 사람이 있다.
당시에 내가 회사 문제에 관여할 수 있는 일이란 선임들이 쓴 보고서를 출력하여 스테이플러를 찍는 일이었다.
또 한 가지는 선임, 팀장, 임원, 사장을 번가라 가면서 술을 마시고 회사의 문제점을 경청하는 일이었다.
마치 남이 두는 바둑판을 옆에서 구경하는 입장과 비슷했다.
하지만 이렇게 구경하는 자는 의외로 놀라운 인사이트를 가질 수 있으니, 그것은 바로 '훈수'라는 것이다.
바둑판 안에 갇힌 자들은 볼 수 없으나, 바둑판 밖에서 보는 자만이 볼 수 있는 수, 훈수(訓手).
나의 훈수는 아주 간단했다.
회의실에서는 들을 수 없고 보고서에서는 볼 수 없지만, 매번 술자리에서 나오는 창의적인 아이디어와 통찰력 있는 의견들을 모아서 하나의 보고서를 만드는 것이었다.
술자리는 거의 매일 있었기에 아이디어와 의견을 수렴하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다만, 그렇게 술자리에서 나눈 이야기들을 곱씹으며 판단하고 메모하는 일과 그것들을 하나의 보고서로 만들기 위해 파워포인트로 작업하는 일이 버거울 뿐이었다.
하지만 나는 이렇게 만들어진 보고서가 분명 회사의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될 것이란 확신이 있었다.
결국, 확신을 가진 자가 일을 벌이고 만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나는 그 일을 직접 하기로 결심했다.
결코 쉽지만은 않은 작업이었다. 그렇게 보고서로 일목요연하게 정리하다가 막히는 경우가 참 많았다.
그러면 또 술을 마셨다. 술을 마시며 아이디어를 낸 당사자에게 질문을 하고 실마리를 풀어 나갔다.
간혹 나의 직무와 거리가 먼 개발이나 관리 부문의 의견이 필요할 때는 그 부서 사람들이 모인 술자리를 함께 해야 했다.
그렇게 나는 작정을 하고 의도적으로 술자리에서 질문을 던지며 아무도 모르게 하루 한 장씩 파워포인트 작업을 했다.
공식적인 회사 업무도 아닌데 보고서의 실마리가 풀려나가니까 이상하게 자꾸 빠져들었다.
이 작업은 생각보다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고, 어느덧 파워포인트로 70장짜리 보고서가 완성되었을 때 무려 2개월이 흘렀다.
기존 사업의 문제점을 개선하여 새로운 개념의 서비스를 론칭하자는 보고서가 그렇게 완성되었다.
나는 이 보고서를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가장 존경할 만한 선임에게 보여줬다.
그렇게 보고서를 읽은 선임은 팀장에게, 팀장은 임원에게, 임원은 사장에게......
일이 점점 커지고 말았다.
2004년 11월, 월례회의.
회사의 전 임직원이 모인 자리에서 내가 만든 보고서를 발표하게 되었다.
막상 일이 커지는 바람에 발표까지 하게 되다 보니 긴장하긴 했지만, 적어도 보고서의 내용만큼은 자신 있었다.
그동안 무수히 많은 술자리를 통해 여러 사람의 의견을 듣고 질문을 하며 검증된 내용이었다.
그때 함께 했던 술자리 멤버들이 전부 회사 임직원들인데 도대체 누가 발표 내용에 동의하지 않을 수 있을까?
발표 후, 이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사장님은 이 프로젝트를 실행할 TF팀을 당장 결성하라고 지시했고, 초기에 필요한 예산인 1억 5천만 원도 그 자리에서 승낙했다.
나는 연차가 낮은 이유로 TF팀장이 되지는 못했지만, 서비스 기획을 담당하게 되었다.
그렇게 2005년 새해를 맞이하면서 많은 변화가 생겨났다.
무엇보다 가장 큰 변화는 나였다.
나는 더 이상 바둑판 옆에서 '훈수' 두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선임들이 만든 보고서를 출력이나 하는 사람도 아니었다.
이 프로젝트에 대해 누구보다도 강한 책임감을 느끼며, 비로소 <당사자 의식> 수준에 올라선 사람이었다.
당사자 의식은 나를 전혀 다른 사람이 되게 만들었다.
TF팀에서 연차가 가장 낮은 사람이 나였지만, 그 누구보다 이 프로젝트가 성공하길 바라는 사람도 나였다.
직급이 깡패라는 말은 들어봤지만, 직급보다 더 강력한 게 있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
그것은 책임감이었다.
결국엔 책임감이 강한 자가 책임감이 약한 자를 지배하게 된다. 직급에 상관없이.
우리의 새로운 프로젝트는 평소 하던 업무와는 다르게 여러 가지 애매모호한 상황들이 발생했다.
그럴 때마다 선임들은 업무분장이 어떠하네 R&R이 틀렸네 하면서 책임을 미루기만 했다.
갑자기 그동안 존경하던 선임들이 작아 보이기 시작했다.
다른 무엇보다 그들이 프로젝트에 임하는 의식 수준과 책임감 정도가 매우 하찮아 보였다.
당사자 의식이 강하면 업무분장 따위는 아무 의미 없다.
결국 책임을 미룬 모든 일은 내가 하게 되었다. 아니, 내가 나섰다.
내 역할은 서비스 기획이었지만 콘텐츠가 시원치 않으면 콘텐츠 기획도 간섭했고, 마케팅도 간섭했다.
결국엔 이 프로젝트에 할당된 예산을 쓰는 모든 업무에 간섭했다.
그러나 앞서도 말했지만 당사자 의식을 갖고 있다고 해서 모든 문제 해결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나는 강한 책임감과 당사자 의식을 가졌지만, 정작 원래 가지고 있던 소중한 것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다름 아닌 '소통'이었다.
회사의 문제 해결을 위해 술자리에서 선임들의 말을 경청하고 끊임없이 질문을 던졌던 2년 차의 풋풋함은 사라졌다.
그저 팀원들을 신뢰하지 않고 자기 생각만이 옳다고 믿으며 모든 책임을 혼자 떠맡으려고 하는 독선적인 3년 차 직원이 있을 뿐이었다.
책임감에도 물리적인 법칙이 있다.
<책임강 중독 responsibility virus>의 저자, 로저 마틴은 그것을 ‘책임감 보존의 법칙’이라고 했다.
어떤 일이든 책임감에는 총량이란 게 정해져 있다.
따라서 책임감이 잘 분산되어 모든 팀원에게 골고루 주어지면 팀워크가 살아난다.
이렇게 팀워크가 좋은 팀은 무슨 일을 해도 잘 된다.
문제는 책임감이 골고루 분산되지 않았을 때 발생한다.
팀원 중 누군가가 책임감을 많이 갖고 있으면 나머지 팀원들은 책임을 적게 가질 수밖에 없다.
즉, 누군가가 책임감 과잉이 되면 나머지 대부분은 반드시 책임감 결핍이 일어난다.
이런 팀은 팀워크가 좋을 리 없다. 따라서 성과도 좋을 리 없다.
모든 책임을 떠맡는 직원 하나 때문에 그의 주변에 <책임감 회피> 증세를 보이는 다수의 직원이 발생한다.
따라서 남다른 책임감을 갖고 있는 직원은 성과를 보장하는 <하이퍼포머>가 아니라 ‘책임감 회피 바이러스’를 퍼뜨리는 조직의 <암적인 존재>가 될 수 있다.
그 독선적인 3년 차 직원은 모든 책임을 흡수하는 <책임감 중독>이었다.
그러면서 동시에 TF팀에 ‘책임감 회피 바이러스’를 퍼뜨리고 있었다.
팀원들을 신뢰하지 않기에 소통도 필요 없었다.
따라서 책임을 나누는 것도 없으니 팀워크는 기대하지도 않았다.
마치 프로젝트를 혼자 하는 것인 양 모든 책임을 통감하면서 스트레스 때문에 속이 편할 날도 없었다.
결국, 신경성 위산과다 증세를 보이면서 위장약을 달고 살더니, 급기야 프로젝트 킥오프 3개월 만에 장염이 심해져서 병원에 입원을 하게 되었다.
<당사자 의식>까지는 좋았다. 그러나 모든 책임을 독식한 것이 화근이었다.
병원에 몸져 누운 불쌍한 3년 차 직원.
그는 병원에 있으면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아, TF팀은 이제 망했구나.'
(사실 그렇지는 않았다.)
'내가 없으니 프로젝트는 실패하게 될 거야.'
(장염보다 자아도취가 더 심각한 병이었는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책임감 없이 일을 한다고 여겨졌던 선임들이 얄미웠다.
내가 이렇게 된 것도 다 그들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병원 침대에 누워, 옆에 있던 어머니에게 불만스러웠던 직장생활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동안 내가 얼마나 무거운 책임감을 갖고 일을 해야 했는지, 사람들이 어쩌면 그렇게 책임감 없이 일을 할 수 있는지 온갖 불만을 쏟아 냈다.
가만히 듣고 있던 어머니가 한 마디 거들었다.
“이 녀석아, 그렇게 책임감이 강한 녀석이 제일 먼저 책임져야 할 것은 생각 안 하니?"
나는 의아했다.
“그게 뭔데?”
“뭐긴, 니 몸뚱이지."
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