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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딴생각 Aug 26. 2020

죽음을 청소하는 직업

'가난한 청춘들이야말로 이 시장의 무한한 잠재 고객이다.'



누군가 홀로 죽으면 시신은 옮겨지지만 해야 할 일이 남아 있다. 죽은 자의 집 청소. 간혹 영화나 드라마에서 죽은 자의 모습이 아름다운 자태로 묘사되지만, 그리 곱게 가는 죽음이란 없다. 만약 당신이 트와일라잇의 에드워드처럼 핏기 없이 해사한 얼굴로 말끔하게 죽을 거라 생각한다면 그건 판타지 로맨스다. 언제나 시신이 머물던 자리엔 유혈이 낭자하고 살점이 떨어져 나간 흔적과 몸속에 든 매스꺼운 것들이 자태를 드러내며 널브러진 상태일 거라 생각해야 지극히 현실적이다. 죽음을 미화할 게 아니라 직시해야 한다. 그래야 자신이 살아가는 이유를 반추할 수 있다.


인간은 죽지만 그 안에서 박테리아가 새 생명을 얻고 증식하여 온갖 내장이 부풀어 오르고 결국엔 복부가 터진다. 그러면 액체가 몸 밖으로 쏟아져 나오는데, 인체의 7할이 수분인 만큼 어마어마한 양이 쏟아져 나온다. 거기서 끝이 아니라 그 분비물이 부패하여 발생하는 냄새가 창문을 넘고 벽을 타고 올라 골목 어귀까지 펴지게 된다. 만약에 목을 매고 숨진 사람이라면 길게 늘어진 시체가 근육을 조절하는 힘을 잃은 탓에 온갖 오물을 배설해놓기 마련이다. 누워서 죽은 자라면 이불도 걱정스럽다. 피와 인체의 분비물을 잔뜩 흡수한 솜 이불은 그 자체로 시체와 같다. 그것을 둘둘 말아서 치우는 일이란 시각, 촉각, 후각이 곤두서다 환각을 경험한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일이다.


주변 사람들과 단절된 채 혼자 살다가 고독한 죽음에 다다르는 일, 일명 '고독사'가 만연한 세상이다. 그 뒤안길을 마중 나오는 사람은 안타깝게도 가족이 아니라 채권자들이다. 채무란 산 자의 몫이니까. 죽음으로써 채무를 잊을까 봐, 그를 찾아오는 첫 번째 손님은 시중 은행이고, 그다음 카드사와 캐피탈 회사가 찾아오고 그다음에 험상궂은 대부 업체가 찾아온다. 그렇게 제1~3금융권이 차례대로 회수하다가 회수하지 못한 채권은 그것을 헐값에 사 모으는 또 다른 채권자에 의해 양도되고 다시 독촉장이 보내지고, 전화가 오고, 몸소 집까지 찾아와서 초인종을 누른다. 어쩌면 그의 생사를 가장 걱정했던 이는 가족이 아니라 채권자다. 그렇게 혈육조차 발길을 끊은 곳에 채권자들이 찾아와 끊임없이 안부를 묻는다.


가난하면 더 고독해지는 걸까? 고독사는 가난과 맞닿아 있다. 그런 가난한 자의 죽음을 알리는 것은 부고가 아니라 냄새였고, 그 역한 냄새를 처음 맡는 사람은 이웃이다. 죽은 지 오래되어 악취를 풍겨야 비로소 발견되는 주검은 그제야 경찰이 사망 원인을 규명하고 유족을 찾아 나선다. 그렇게 나서야 할 만큼 가족은 멀리 있다. 혹시나 찾았더라도 장례식은커녕 빚이라도 떠안을까 봐 재산포기각서부터 찾는 것이 가족이다. 어쨌든 채무란 산 자의 몫이니까.


뭐든 부족할 것만 같은 죽은 자에게도 넘쳐나는 것은 있다. 그들의 우편함은 무언가로 가득 차 있는데 그것이 지인들의 편지는 아니고 각종 고지서다. 체납고지서, 독촉장, 가스와 수도와 전기를 끊겠다며 으름장을 놓는 각종 미납 요금 경고장, 경고한 대로 이제 공급을 중단하겠다는 최후통첩장 등이 우편함을 가득 매운다. 가득 꽂힌 고지서들은 주인을 닮아서 그런지 가난에 등이 휜 것 마냥 구부러져 있다.


우편함뿐만 아니라 현관문 앞에도 각종 딱지들이 붙는다. 압류를 알리는 붉은 딱지 위에 전기 공급 차단을 알리는 노란 딱지, 거기에 우편물이 도착했으니 기일 내에 찾아가라는 흰색 딱지가 알록달록 붙는다. "여기 죽은 자는 가난했습니다"라고 표시라도 하는 듯 온갖 가난의 메타포들이 부적처럼 덕지덕지 붙는다.


자, 어쨌든 죽은 자를 애도함과 동시에 남기고 간 것들을 치워야 한다. 이것은 죽은 자가 남기고 간 흔적과 냄새를 없애야 하는 비즈니스, 죽은 자의 집 청소다. 이 별스러운 용역을 의뢰하는 사람은 의아하게도 유족이 아닐 때가 많다. 진작 인연이 끊긴 가족이거나 생면부지의 먼 친척이라면 비용을 책임지는 일이란 기대하기도 어렵다. 오히려 집주인 또는 부동산 중개업자의 의뢰인 경우가 많다. 유족은 아니지만 '재산'을 원상 복구하고 싶은 사람들이다. 그곳이 만약 범죄 현장이라면 검찰이나 경찰의 의뢰를 받기도 한다. 그렇다면 정부에서 비용을 부담하는 '범죄 피해자 지원 사업'의 일환으로 진행된다.


지금까지 밝혀 온 고독사의 민낯이 현실이 맞을까 싶기도 하겠지만 이것이 앞으로 유망 직종이 될 거란 점은 명백하게 현실이다. 고독을 부추기는 '1인 가구'는 전체 가구의 30%에 육박하고 지금도 서서히 증가하고 있다. 고독사는 고령화 시대의 가난한 '노인'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우아한 가난의 시대'라 자위하는 이 시대의 가난한 청춘들이야말로 이 시장의 무한한 잠재 고객이다.


이전 세대에 비해 좋은 스펙을 가졌으나 취업난과 낮은 연봉에 길들여진 밀레니얼들은 결혼과 출산을 포기하고 집과 차도 포기한다. 어쨌든 독립과 배움이 풍부한 세대답게 혼자서 월세 원룸을 전전할지언정 '취향'이라는 고급진 단어를 소비하며 가난을 디폴트 삼는다. 고독사의 바로미터인 '나 홀로 가난'이 늘 그들을 따라다닌다.


설상가상 이 세대가 성인이 되어 맞이한 건 '포스트 코로나'이다. 그건 '사회적 거리두기'가 만연한 세상이다. '가까이하기', '다가가기', '손을 내밀기', '서로의 체온을 느끼기'가 혐오가 돼버린 세상에서 고독사는 이를 자양분 삼아 창궐한다. 혈연, 학연, 지연 등 그 어떤 인연도 관계가 희미해지고 거리두기가 일상화되는 '무연사회(無緣社會)'는 일본에 이어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은 풍경이 돼버리고 말았다.


*무연사회(無緣社會) :

2010년 일본을 충격에 빠뜨렸던 NHK의 다큐멘터리. 처음엔 자살의 증가 원인을 취재하다가 우연히 고독사가 급증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취재 방향을 바꿔 '고독사'를 조명하는 '무연사회'란 제목으로 방송하게 된다. 이는 여러 매체에서 후속 보도가 이어질 정도로 일본 사회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쌍쌍바


여기는 홀로 죽은 여성의 원룸, 다른 세입자들의 아우성을 견디다 못한 건물주가 부랴부랴 청소 용역을 의뢰했다. 지하 복도 끝에 있는 방에서 죽은 자의 향기가 피어오른다. 두렵지만 죽음을 직시해야 한다. 그래야 이 일을 할 수 있고, 그래야 내가 살아가는 이유를 반추할 수 있다.


현관문을 열어 방 안으로 들어서자 도시가스 배관에 매달린 주황색 빨랫줄이 보인다. 그녀는 그 줄로 고리를 만들고 스스로 목을 매었던 것이다.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빨랫줄에 맞닿은 벽지는 거꾸로 그린 거대한 물음표 모양으로 피가 검붉게 물들어 있다. 무엇이 그녀를 자살로 이끌었을까? 사다리를 밟고 올라서 빨랫줄의 매듭을 하나하나 푼다. 피에 젖은 벽지를 뜯어내고 바닥에 피로 흥건히 젖어 있는 이부자리도 걷어서 위생 봉투에 담는다. 희한한 점이 있다면 사람이 죽었다는 생각만 지운다면 아주 깨끗한 방이었다.


먼저 옷걸이용 행어가 눈에 띈다. 바지는 바지대로 예리하게 날을 세운 채 일렬로 걸려 있고, 코트나 점퍼는 보관용 커버가 씌워져 일정한 간격을 두고 매달려 있다. 플라스틱 서랍장에는 양말과 속옷이 색깔별로 구분되어 있고 부채꼴로 접혀 수직으로 차곡차곡 포개져 있다. 실로 완벽한 정리 정돈이다. 샴푸나 보디클렌저 용기의 펌프 노즐이 향하는 방향도 어디에서건 정북방향을 가리키는 나침반 같다. 문득 화장실 거울 앞 양치용 컵에 나란히 놓인 칫솔 두 개가 눈에 띈다. 혼자가 아니었던 것일까?


화장실 벽면에 붙은 플라스틱 수납장 안에는 남성용 면도날 카트리지가 놓여 있고, 그중 두 개는 비어있다. 부엌살림을 치우면서 그녀와 함께 머물던 이의 존재가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혹은 존재의 부재가 드러났다고 할까. 싱크대 위의 수납장과 서랍 안에 숟가락, 밥공기와 국그릇은 모두 쌍을 이룬다. 인스턴트 라면도 종류별로 두 개씩, 찻잔은 물론 찻잔 아래 까는 티코스터조차 두 개씩이다. 남아 있는 술은 한 병인데 소주잔과 맥주 컵만큼은 저마다 두 잔씩.


스스로 삶을 끝내야 했던 싱글 여성이 남긴 살림만큼은 싱글이 아니라 더블인 셈이다. 죽기 전에 모든 것을 완벽하게 정리했어도 그와 함께 했던 물건만큼은 버릴 수가 없었던 모양이다. 먹고사는 일, 그것이 우리 삶에서 절대 도려낼 수 없는 가장 뿌리 깊고 본질적인 것일지도 모른다. 인생이란 아주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것처럼 보여도 사실은 함께 먹고살려는 단순한 동기에서 비롯되었고 그것이 인생의 출발점은 아니었을까. 살다 보면 출발점은 어느새 잊어버리고, 도착지 또한 애초의 목적지와는 거리가 멀어진다.


냉장고 속 음식을 비우고 나서 위쪽 냉동 칸을 연다. 서늘하게 텅 빈 가운데에 빙과류 하나만이 냉기를 품은 채 놓여 있다. 둘이 사이좋게 쪼개서 나누어 먹을 수 있는 쌍쌍바. 냉동 칸을 연 손이 그대로 멈춘다. 수없이 많은 죽은 자의 집을 청소하면서 감정의 동요 없이 침착했지만 유독 작고 사소한 것에 마음이 더 크게 흔들린다. 그녀와 함께 먹고 마시던 자는 그렇게 쌍쌍바를 통해 존재감을 드러냈다. 쪼개서 나눠 먹는 빙과류가 전하는 부재한 존재감. 그녀는 외롭게 죽었다. 그녀를 쓸쓸한 죽음으로 몰아붙인 것은 존재였을까 아니면 부재였을까.



존재와 부재


고독사에 의한 사망자 통계조차 아직 우리나라에 없다. 간혹 존재해야 할 사람이 부재한데 이유는 모른다. 이것은 부재한 존재일까 아니면 존재한 부재일까. 올해 3월, 고독사 실태 조사와 예방 계획을 주요 골자로 하는 ‘고독사 예방 및 관리에 관한 법률안’이 국회를 통과했다. 국가적 인프라가 작동하려면 내년 4월부터나 가능해진다.


돈이 없다면 가난을 막을 수 없겠지만, 돈이 없어도 고독하게 죽는 일은 막을 수 있다. 혹자는 가난하니까 더 고독해지는 거라고 주장하지만, 난 동의할 수 없다. 애당초 돈에 의해 형성된 관계라면 오히려 그 관계가 고독을 가중시킬 뿐이다. 애당초 돈이 꼬인 관계라면 그 관계란 무엇이든 채권자일 뿐이다. 고독은 부자의 옆구리도 비집고 들어간다. 결국엔 돈에 얽매이지 않은 돈독한 관계가 고독하게 죽는 일을 막아 줄 수 있다.


자, 이제 가장 궁극적인 죽은 자의 집 청소가 남았다. 그것은 바로 나의 집, 나의 죽음. 

그곳은 어떤 곳인가. 차디찬 쌍쌍바로 기억되었던 원룸인가. 아니면 밀레니얼들의 신조어인 지옥고(반지하, 옥탑방, 고시원) 인가. 어쩌면 인생의 순조로운 계획대로 드넓은 전원주택이나 한강 조망권이 보장된 한남동의 부촌일지도 모르겠다. 그것도 아니라면 당신의 건강 상태에 따라 병원이거나 요양원일 수도 있다. 사실 죽은 자의 향기는 동일하게 피어오른다. 그것보다 당신 주변에는 누가 있을까? 혹은 주변 사람 중에서 존재와 부재는 누구일까? 두렵지만 죽음을 직시해야 한다. 그래야 그 일을 할 수 있고, 그래야 당신이 살아가는 이유를 반추할 수 있다.




# 영감을 준 자료

죽은 자의 집 청소

김완 / 김영사 / 2020.05.30

우아한 가난의 시대

김지선 / 언유주얼 / 2020.07.01

무연사회, 외롭게 죽는 시대가 온다

SERICEO / 은퇴대국 일본보고서 / 전영수 / 2017.03.09


죽음을 청소하는 직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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