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안데르센 세계 명작 <눈의 여왕>
생경한 감각이었다. 언제부터인지 내 심장은 더는 뛰지 않았고, 심장이 멈춰버렸는데도 나는 살아 있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응당 사람이라면 팔딱팔딱 뛰는 심장이 생을 증명해주는 것이 아니던가? 도대체 언제부터지? 언제부터 내 심장이 뛰지 않았지?
5년 넘게 최소한의 시종만 배정된 작은 별궁에 머무르고 있던 나는 부왕 폐하의 부름으로 하루아침에 본궁으로 거처를 옮기게 되었다. 머지않아 나는 황위 계승식을 거쳐 갑작스레 제국의 여왕이 되는데 이 모든 것이 오래도록 병을 앓고 계시던 폐하의 병환이 깊어진 까닭이다.
며칠 전, 눈의 제국의 황제이자 나의 아바마마는 동이 트기도 전 왕위를 계승해야 한다며 귀족들을 바쁘게 불러 모았다. 그렇게 모두가 모인 자리에서 갑작스레 모든 권한을 나에게 일임한다고 선언하셨다. 어느새 왕관은 나의 머리에, 핏빛 포도주 아래로 반짝이는 가루들이 담긴 황금 잔은 나의 손에 들려 있었고 나는 무언가에 홀린 듯 그 잔을 단숨에 들이켰다. 방금 전까지 너무나 지쳐 보여 안쓰럽던 아바마마가 그저 늙어가는 노인으로 보였다. 눈빛이 변하는 나를 보며 아버지는 우는 듯 웃는 듯 이상한 표정을 지었으나 내가 그 뜻을 알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렇게 지루한 나날들이 시작되었다. 흩날리는 눈꽃송이가 더는 아름답지 않았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창에 스며 들어오는 햇살이 귀찮았다. 별궁에 있을 때는 모이를 챙겨주며 교감도 종종 했던 하얀 새들이 창틀에 모여 앉아 지저귀는 소리도 시끄럽기만 했다.
그 뒤로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이른 아침, 시종들이 다급히 집무실로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숨이 넘어갈 듯 달려와 노크하며 폐하의 상태를 알렸다. 예상은 했었다. 왕관을 내려놓으신 그날부터 급속도로 상태가 악화되고 있었으니까. 빠른 걸음으로 걸어 캄캄한 방에 들어서자 거의 빈미라와 같은 형상으로 침대에 누워 죽어가고 있는 노인이 보였다. 나를 제법 예뻐하셨던 거 같은데, 내가 태어난 이후에는 바쁘신 와중에도 시간을 내어 나와 시간을 보내주던 폐하이신데, 그런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데도 전혀 슬프지 않았다.
부왕 폐하가 힘겹게 입을 떼었다.
" 윈터야, 너를 진정으로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이 하나라도 이 세상에 있다면, 심장이 뛰고 있는 그 사람이 너를 위해 단 한 번만이라도 진심으로 눈물을 흘려준다면, 너는 원래의 너로, 따뜻하고 다정했던 사람으로 돌아갈 수 있다. 모든 것이 변해가고 잊혀 간다고 해도 희망을 잃지 말거라."
무슨 소리인지 몰라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그가 힘겹게 말을 잇는다.
" 내가 너를 위해 울어준다면 좋겠지만, 심장이 이미 멈춰버린 이 아비는 그럴 자격조차 없구나. 너에게 이렇게 무거운 짐을 지고 떠나게 되어서 미안하다
. 너는 워낙 사랑스러운 아이니, 곧 그런 사람이 나타나리라 믿는다. 도저히 답을 모르겠거든 호프 마을의 리사를 만나보거라, 사랑하는 내 딸, 윈터. 사랑한다, 그리고 미안하다."
숨까지 참으며 긴 말씀을 전하신 폐하는 그대로 눈을 감으셨고, 영영 일어나지 못하셨다.
"안녕히 가세요, 나의 아바마마, 황제여"
내가 차갑게 식은 부왕 폐하의 손에 입 맞추며 건넨 짧은 인사에 눈물을 찔금거리던 신하들이 눈물을 거두는 것이 보였다. 나는 눈물이 나지 않았다. 슬프지 않았다기보다는 '슬픔이라는 감정이 어떤 것이었는지 모르겠다'라는 말이 더 맞을 것이다.
그렇게 며칠이 지났는지 모르겠지만 나의 하루하루는 쳇바퀴를 도는 것과 똑같은 나날이었다. 일어나서 씻고 옷을 갈아입은 뒤 왕의 집무실로 이동해 국무를 시작하고, 때가 되면 배가 고프지 않아도 식사를 한다. 보좌관 말고는 굳이 누군가를 곁에 둘 필요가 없어 사람과 대화를 할 일이 거의 없다. 필요한 것들은 항상 때에 맞춰 준비되어 있는지라 굳이 누군가를 부르거나 찾을 필요가 없다. 그래서일까? 나는 나의 목소리를 잊어가고 있었다. 아무렴 어떤가. 올라오던 생각은 금세 흩어져 사라져 버린다.
황궁에는 항상 눈보라가 불어오지만, 황궁 밖을 나서면 따스한 바람이 불어온다고 하던데.
'아, 이건 또 무슨 기억이지?' 그 생각마저도 사라진다.
여왕 즉위 후 1년이 지났을 무렵이던가, 타국의 왕자들이 하루도 빼먹지 않고 찾아와 구애를 한다. 온갖 귀한 금은보석과 본국에서만 나는 희귀한 것들을 가져오는 통에, 더 이상 궁에 보관할 만한 공간이 없을 정도라 한다. 왕자들은 격식대로 내게 가까이 와 무릎을 꿇고 내 손에 입을 맞추는데, 나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그들의 얼굴은 빨갛게 물들고 눈을 내리 깔으며 모두 똑같이 말한다. 하나 같이 짠듯한 대사다.
"여왕님, 눈의 여왕님! 듣던 대로 저 눈같이 새하얗고 아름다우십니다. 여왕님의 아름다움에 제눈이 멀 지경입니다.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도 여왕님의 아름다움에 대적할 수는 없습니다. 오 아름다우신 분, 제발 저와 결혼해 주세요."
그러나 나는 그들의 얼굴을 보고, 그들의 하는 말을 들어도 아무 생각이 들지 않는다.
보좌관이 내게 전하기로는 대신과 귀족들 모두 입을 모아 내가 나와 제국을 위해서 꼭 결혼을 해야 하고, 타국과의 제대로 된 교류를 통해 국력을 키워 대지를 늘려야 한다고 입이 닳도록 말한다고 한다. 나와 눈이 마주치면 단 한 마디도 직접 건네지 못하면서 보좌관에게는 뭐 저렇게 많은 말들을 전하는가 싶다. 보좌관이 몇 년간 하도 앵무새처럼 같은 말을 해대는 통에 후보들 중 제국에게 가장 도움이 되고, 땅을 가장 많이 나눠줄 수 있는 나라의 왕자와 결혼하기로 마음먹었다.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제국의 땅이 점점 얼어가고 있어 백성들이 살 터전이 사라지고 있으니, 결혼의 대가로 자신의 영토를 내어줄 수 있는 나라라면 그만한 결혼 상대국이 없을 것이다.
"보좌관, 나 이제 결혼할까 봐."
"아니, 여왕님. 듣던 중 반가운 말씀이십니다. 오늘 찾아온 왕자들 중 마음이 동하는 사람이라도 있었습니까?"
"그, 휴즈 왕국? 그 왕자 이름이 뭐였지? 하여튼 휴즈 왕국의 왕자랑 할게 결. 혼."
"네! 알겠습니다. 잠시만, 네?!! 아니.. 뭐라고 하시는 겁니까 지금? 아니, 윌리엄 왕자 이름도 모르시면서! 아니, 그럼 윌리엄 왕자 얼굴은 기억이나 하십니까? 휴즈 왕국이 어디인 줄은 아세요?"
보좌관은 아무리 그래도 결혼을 그렇게 해서 되겠느냐고 펄쩍펄쩍 뛰는데 결혼을 꼭 해야 한다고 할 때는 언제고 왜 저 난리인지 모르겠다.
"그래? 그럼 이 결혼은 없던 것으로 할까? 나는 평생 혼자 살까 싶은데."
하도 펄쩍펄쩍 뛰길래 한 마디 했더니 보좌관이 얌전해졌다.
결혼식은 이곳에서, 약혼식은 왕자의 나라에서 하기로 결정했다. 그렇게 며칠 뒤에 있을 약혼식을 위해 나는 태어나 처음으로 제국 밖으로 나가게 되었다.
간소한 차림으로 보좌관이 챙겨준 서류 뭉치들과 시종들이 챙겨준 요깃거리를 챙겨 준비된 마차에 올랐다. 꼬박 이틀을 달려야 하고 위험한 길이라며 보좌관이 따라오겠다고 아우성을 치는데 거추장스러우니 제국에서 가장 강한 기사 하나만 데리고 다녀오겠다고 했다. 보좌관이 입을 뻥긋거리는데, 뒷말을 가볍게 잘라버렸다.
"보좌관, 그 입 다물게. 내가 위험해 보이나? 내가 고작 내 몸 하나 지키지 못할 것으로 보여? 게다가 제국의 제1 기사이자 소드마스터, 그레이 경이랑 동행하지 않나?"
다른 이들은 내가 무슨 말을 하든 날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하고 대답도 겨우 하는데 보좌관은 너무 말이 많다. 내가 한 말에 뭐라 대꾸하며 마차에 올라타려던 보좌관은 내 미간이 좁혀지는 것을 보자마자 마차에서 거의 뛰어내린다.
"허.. 여왕님은 역시 너무 차가우십니다..."
보좌관이 이상한 얼굴로 건네는 말을 뒤로하고 출발하는데 눈송이가 흩날리기 시작했다.
눈길을 달리는 줄만 알았는데 어느새 꽁꽁 언 강물 위를 달리고 있다. 꽁꽁 언 강물 위를 지나고 나니 조그만 마을 하나가 눈에 들어오는데, 길목에 있는 조그만 두 채의 집 창문에서 남자아이 하나, 여자 아이 하나가 마주 보며 웃고 있다. '잠깐, 웃고 있다고? 웃는다는 게 뭐더라. 저런 표정은 무슨 뜻이지?' 갑자기 뭔가 떠오르는 듯하여, 그 집 앞에 마차를 세우라 일렀다.
마차를 세우기 무섭게 아이 둘이 쪼르르 바깥으로 뛰쳐나오며 외친다.
"우와, 이렇게 크고 예쁜 마차는 처음 봐!!!"
"어??? 여왕님이다! 여왕님이시다!! 어쩜 너무 아름다워!! 제국의 하얀 꽃,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우신 눈의 여왕님 맞죠?!!"
신기한 수식어에 뭐라 대답해야 할지 몰라 아이들만 바라보고 있는데, 어디를 가는 중이냐고 묻는다. 이웃나라 왕자를 만나러 가는 길이라고 하니 함께 가도 되냐고 묻는다. 눈이 반짝 거리는 게 귀여워서, 잠깐, 귀여워서? 그게 뭐지? 하여튼 알겠다고 답하는데 말이 끝나기도 전에 두 아이가 마차에 뛰어오른다. 반짝이는 눈을 바라보니 가슴께가 뻐근한 것 같다. 투구 밖으로 보이는 기사의 눈이 한참 나를 향하기에 허락의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마차는 넷을 태우고 다시 달리기 시작한다.
마차에 탄 순간부터 온종일 마차 안에서 종알거리던 아이들이 지루했는지 남자아이는 잠에 빠져들었고, 여자아이가 마차 벽에 기대어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아주 먼 옛날, 악마가 가진 거울이 있었지
악마와 천사들과의 싸움에서
그 거울은 쪼개져 가루가 되었지
그 가루는 이 세상 곳곳에 스며들었고,
제국의 왕관에까지 스며들었네.
오오 불쌍해라. 왕가의 자손들.
그들은 부귀영화를 누릴 것이나,
아무 감정도 느끼지 못할 것이라네.
그렇게 온 땅이 꽁꽁 얼어붙을 거라네.
이게 다 맥시멈의 피의 골짜기 때문이지.
'무슨 노래가 저렇담, 악마의 거울? 피의 골짜기는 뭐고, 응? 맥시엄? 맥시멈이 왜 거기서 나와?'
맥시엄은 제국의 3대 황제로 폭군 중의 폭군으로 알려져 있다. 근데 그에 관한 노래가 있다고? 금시초문이다. 고개를 갸웃하며 여자아이를 쳐다보는데 아이가 들고 탄 제법 두꺼운 책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묘한 궁금증이 일어 책을 좀 봐도 되냐고 물으니 웃으며 선뜻 책을 건넨다.
"리사 할머니가 빌려주신 책인데, 재국의 저주에 대한 이야기랍니다. 무섭기도 하지만 너무 재미있어서 저는 열 번도 더 읽었어요!!"
마침 지루했던 참이라 책을 펼친다.
눈의 제국에는 대대로 내려오는 저주가 있다. 제국의 3대 황제인 맥시멈은 소문난 폭군이었고 대륙 제패를 꿈꾸며 불필요한 살생과 정복을 일삼았다. 전쟁을 일으키고 굳이 죽이지 않아도 되는 타국의 백성과 전의를 상실한 적군에 이르기까지 그에게 희생된 생명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그렇게 많은 이들이 흘린 피들이 흘러 흘러 그가 지나가는 길목을 뒤덮었고, 그 때문에 이웃 왕국에서 눈의 제국으로 향하는 길에는 피의 길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그 억울한 죽음들이 모이고 또 모여 제국에 저주를 퍼부었고 그 염원이 크나큰 한으로 응집되어 제국에 크나큰 저주가 내려졌다.
순수한 왕가의 혈통이 스무 살을 넘기기 전 맥시멈의 칼에 달라붙어 있는 거울 가루를 먹지 않으면, 그대로 숨이 멎는다. 물론 거울 가루를 먹는다고 해서 모두 목숨을 부지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자격이 없는 자가 거울 가루를 먹는다면 며칠 내로 죽음이 찾아올 것이기 때문이다. 자격이 있는 자가 거울 가루를 먹으면 모든 감정은 잃게 되겠지만 목숨은 부지할 수 있다. 일종의 유예기간 동안 감정 없이 그저 살아가는 것이다. 거울 가루를 먹은 후 10년 안에 저주를 깨지 못하는 경우, 폐에서부터 극심한 고통이 시작되어 전신으로 퍼져나가며 각혈이 동반된다.
저주가 끝나지 않는 한 그 무시무시한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조차 없다. 운이 좋으면 유예기간 안에 나를 아끼고 진심으로 사랑해주는 사람을 만나 다시 감정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고, 그렇게만 된다면 이 저주는 깨진다. 그럴 수 없다면 사랑을 하든 하지 않든 결혼하여 자식을 낳고 자식이 스무 살이 되기 전에 왕위를 계승하며 거울 가루를 먹도록 해야만 고통의 생을 끝낼 수 있다.
사람을 진정으로 위한 진실한 사랑만이 꽁꽁 언 제국의 후손의 심장을 다시 뛰게 할 것이니, 심장이 다시 뛰게 된다면 제국의 저주가 풀릴 것이며, 사계절이 사라진 제국에도 다시 봄바람이 불어올 것이다. 얼어붙은 대지가 녹아 예전의 풍요로운 제국으로 100년 전과 같이 최강의 왕국으로 거듭날 것이다.
자격 있는 자여, 부디 당신에게 신의 축복이 함께 하기를..
책을 읽어 내려가면 갈수록 나는 멍해졌다. '왕가의 저주? 맥시엄? 피의 골짜기? 저주는 뭐고 거울 가루는 뭐고 , 아이들이 읽는 동화책 내용이 뭐 이렇담?' 책을 덮으려는데 문득 지나온 날들이 스쳐간다. 왕위 계승식 때 황금 잔에 뿌려진 가루는 아주 고왔으며 반짝였다. 뭐에 홀린 듯 그 잔에 든 술을 들이켜고 나니 갑자기 가슴께가 뻐근해져 오며 정신을 잃었고, 정신을 차려보니 내 심장은 더 이상 뛰지 않았다. 게다가 맥시엄은 제국의 3대 황제가 맞다. 그러고 보면 이상했다. 나는 아버지 황제의 셋째 부인의 딸인데, 그 많은 왕자와 공주를 제치고 내가 어떻게 왕위를 이어받을 수 있었던 것일까? 황궁 안의 왕자나 공주의 씨가 마르지 않고서는 나에게까지 왕위 계승 기회가 올리가 없지 않은가?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있는데 생각을 더 해보려 할수록 머리가 아파온다. 갑자기 마차가 멈춰 섰고, 들려오는 기사 그레이의 말에 나의 생각도 멈췄다. 그의 말로는 제국과 휴즈 왕국을 이어주는 다리가 뚝 끊겨 있다고 했고, 두 왕국 사이에는 넓고 깊은 강이 존재하고 휴즈 왕국은 그 다리가 없이는 갈 수 없는 곳이라고 했다. 마차에서 내려 살펴보니 과연 그 말이 맞았다.
휴즈 왕국의 윌리엄 왕자와의 약혼은 단순한 약혼이 아니라 한 왕국과 왕국의 약속이며 협정을 의미하기에 그만큼 중요한 자리다. 이 약속을 지키지 못하게 되면 국가 간의 문제로 번질 수 있고, 그로 인해 예기치 못한 무력 충돌까지 일어날 수도 상황이다. 게다가 휴즈 왕국의 국력은 우리만큼 강한 나라가 아니던가? 예상치 못했던 상황이 벌어지니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앞이 깜깜하다.
'하, 유일한 이동로인 다리가 끊겨 있으니 휴즈 왕국으로 들어갈 길은 없고 그렇다면 3일 뒤인 약혼식까지 시간을 맞춰 도착할 수 있는 방법이 없는데 어쩌지..'
티는 내지 않았지만 가슴이 옥죄어 오는 느낌이 든다. 아, 이게 답답하다는 느낌이었던가? 데굴데굴 눈만 굴리고 있는데, 곁에 있던 그레이 경이 어깨에 묶어두었던 겨울 매를 통해 휴즈 왕국에 양해를 구하는 서신을 보내는 게 어떠냐는 의견을 전한다. 달리 뾰족한 수가 없어서 그렇게 하기로 했다. 시간이 많이 지체되어 곧 밤이 될 것이기에 아이들을 만났던 그 마을로 돌아가 하룻밤을 묵고 황궁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심란한 마음으로 마차에 올랐는데 여자아이 옆에 그 책이 또 눈에 들어온다.
'그 이야기가 사실이란 말인가? 아니, 그럴 리가 없다. 그런 저주는 들어본 적도 없고, 황제인 아바마마도, 어마마마도 저주에 대해서는 이야기를 꺼낸 바가 없다.'
이런저런 상념에 빠지려던 나는 또다시 아파오는 머리에 생각을 그만두기로 한다.
어둑해질 무렵이 돼서야 마을 입구가 보이기 시작했다. 저 멀리 호프 마을이라는 표지판이 보인다.
'호프 마을, 어디서 들어봤는데?'
마차에서 내려 주변을 좀 둘러보려는데, 아이들은 이미 집 쪽으로 총총거리며 뛰어가고 있다.
"크리스, 같이 가~ 왜 그렇게 혼자 빨리 뛰어가는 거야?!!"
"무슨 소리야 마스, 난 원래 달리기가 빨랐다고. 엇, 리사 할머니 왜 나와 계세요?"
'아, 저 아이들 이름이 크리스와 마스 군' 하며 되새기는데
'리사? 리사라는 이름도 낯이 익은데?'
이상하다. 분명히 생전 처음 듣는 이름인데 낯설지가 않다. 머리가 하얗게 센 여자가 집에서 뛰어나오고 있다.
"크리스!! 어딜 가려거든 나한테 말을 하고 가야지, 옆집 메리가 너희 둘이 갑자기 나타난 마차를 타고 사라졌다고 해서 이 할머니가 얼마나 놀랐는지 아니?"
"잇, 할머니 죄송해요. 저희가 우연히 눈의 여왕님을 만났거든요! 너무 반갑고 기뻐서 무작정 마차에 올라타 버렸어요. 걱정시켜드려 죄송합니다."
예의 바르게 사과하는 아이는 크리스가 아니라 마스다. 마스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크리스의 할머니로 보이는 이가 맹렬한 기세로 내가 있는 쪽을 향해 고개를 휙 돌린다. 당황한 나와 눈이 마주쳤는데 좀 이상하다. 그녀의 눈에는 이슬이 잔뜩 맺혀있고, 어깨는 사시나무 떨리듯 떨리고 있다. 그녀가 날아갈 듯 내 쪽으로 달려와 내 앞에 서더니 거의 외치듯이 말한다.
"설마, 윈터 공주님??????? 윈터 공주님이세요?? 정말 윈터 공주님이세요??!!"
'뭐야, 내 이름을 저 여자가 어떻게 알고 있어?'
그녀는 나에게 대답할 틈도 주지 않고 계속해서 말을 쏟아낸다.
"세상에나, 윈터 공주님 맞으시죠?!! 살아 계셨군요. 용케 살아남으셔서 여왕이 되셨군요. 정말 다행입니다. 다행이에요.."
"뭐지, 나는 네가 기억에 없는데 나를, 내 이름까지 어떻게 아는 거지?"
"아, 저는 리사입니다. 공주.. 아니 여왕님, 여왕님이 태어나실 무렵 3 황비님 곁에서 시중을 들며 여왕님의 유모도 겸했습니다. 정말 어여쁘게 잘 자라주셨군요."
"3 황비라면, 어마마마를 아는가? 그렇다면 자네는 어마마마와 내 곁에 있던 사람인가?
"네, 황비님 곁에서 공주님이 태어나시는 것도 보았고, 별궁으로 옮기시기 전까지만 해도 제가 그분의 가장 가까운 측근으로 두 분의 곁에 있었습니다."
잊고 있던 어마마마의 이야기를 하고 있으려니 전혀 기억이 나지 않던 어마마마의 얼굴이 떠오를 것 같았다. 그러나 애써 기억해내려고 하는 순간 머리가 타는 듯한 고통이 느껴지며 눈앞이 노래졌다. 가끔씩 찾아오는 두통이었지만 오늘은 정도가 너무 심해 눈이 멀 정도였다. 내가 휘청거리자, 기사 그레이가 황급히 다가와 나를 잡아 부축했다.
불현듯 호프 마을의 리사를 찾으라던 선황의 말씀이 생각난 나는 리사에게 물었다.
"리사라고 했던가? 오늘 아이들이 가져온 책을 읽었는데, 우리 황실에 걸린 저주에 대한 이야기가 쓰여 있더군. 그저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라고 여기려고 했는데, 맥시엄 황제와 피의 길, 거울 가루, 멈춘 심장에 대한 이야기는 그저 넘길 수가 없어서 말이지. 도대체 그 책은 어디서 난거지?"
내 질문이 끝나자마자, 리사의 두 눈은 터질 듯 커졌다. 잠깐의 침묵 뒤에 리사가 눈을 지그시 감고 깊은숨을 내쉬며 물었다.
"여왕님, 혹시 심장이 더는 뛰지 않으십니까?.."
내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이자 리사의 얼굴이 일그러졌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 금세 평온을 되찾는다.
"하긴, 여왕님께서 왕국을 이어받으셨다고 할 때부터 어느 정도는 짐작하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제 얼굴도 전혀 알아보지 못하시고 제 이름마저 잊으셨으니..... 여왕님, 제가 다 말씀드리겠습니다."
잠시의 침묵 뒤, 숨을 몰아쉰 리사가 힘겹게 말을 이어갔다.
" 제3대 맥시멈 황제 때부터 시작된 황가의 저주가 있습니다. 여왕님을 이렇게 직접 뵙고 만나 이야기를 나눠보니 아마 그 저주는 지금까지도 진행 중인 듯합니다."
나는 이게 다 무슨 소리인지 알 길이 없었다.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나의 심장이 멈췄냐고 물어보는 리사에 말에 혼란스럽기만 했다.
"저주라니? 자네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아까 아이들이 이상한 노래를 부르고, 크리스가 가져온 낡은 책에는 왕가에 얽힌 저주에 대한 이야기가 쓰여있던데... 설마 그런 허무맹랑한 소리들이 진짜라고 말하고 싶은 건가?"
"여왕님, 당연히 이상한 소리로 들리실 것을 압니다. 그러나, 사실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심장이 멈추었는데도 살아계시고, 더 이상 식사를 하지 않으셔도 배가 고프지 않고, 잠을 주무시지 않아도 되는, 아무것도 느낄 수 없게 되신 여왕님의 상태를 설명할 다른 근거가 있으십니까?"
리사를 바라보니 어느새 그녀는 폭포수와 같은 눈물을 흘리고 있다. 숨쉬기가 곤란한 듯 힘겹게 말을 잇는데 갑자기 아무것도 들리지 않고 이명이 들려와 머릿속까지 꽉 채운다. 아까보다 더 심해진 고통이 번져 내려온 것인지 가슴께가 뻐근하고 숨이 막혀오는데, 그 무엇을 볼 수도 들을 수도 없다.
"여왕님, 괜찮으세요??" 여러 목소리와 여기저기서 달려오는 발소리가 들려오는데 까무룩 정신을 잃었다.
눈을 뜨니 낮은 나무 천장이 보이고, 고소한 음식 냄새가 온 집안을 감싸고 있다. 머리가 너무 멍해서 아무 생각이 들지 않지만 이곳이 궁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겠다. 침대 옆으로 동그스름한 머리들이 보이는데 아마 크리스와 마스일 것이다. 잠깐, 난 후각을 잃었었는데 고소한 냄새라고? 그 냄새에 침이 고이더니 이내 허기가 지고 배가 고파서 뭐라도 좀 먹어야 할 것 같다. 잠깐, 내가 배가 고프다고? 집 안 벽난로에 장작이 타탁 거리며 타고 있는데 그곳에서 나오는 훈기에 몸이 따뜻하다. 하, 분명하다.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던 지난날과 다르게 모든 감각이 요동치고 있다. 그 모든 감각에 모든 것을 맡기고 있으려니 마치 다시 살아난 기분이 든다.
침대에 기대어 잠들었던 아이들이 깨어나 소곤거리며 이야기를 하는데 이미 잠이 달아나 버려 그들의 말소리가 또렷하게 들려온다.
"마스, 여왕님은 정말 아름다워, 그렇지?"
"크리스, 그걸 말이라고 해?! 나는 태어나서 여왕님만큼 아름다운 사람을 본 적이 없어. 천사가 있다면 여왕님과 같으려나? 목소리는 또 어떻고? 어찌나 맑고 고운지 계속 듣고 싶은 목소리라고."
"맞아,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눈의 여왕님을 만나다니 우린 정말 행운아야."
아이들의 대화를 듣고 있으려니 낯부끄러운 말들이라 얼굴에 열이 확 오른다. 하, 더 이상한 소리가 나오기 전에 일어나야겠다. 힘겹게 몸을 일으키니 식탁에 테이블보를 깔던 리사가 달려와 침대 머리맡에 앉으며 묻는다.
"여왕님, 괜찮으셔요? 갑자기 정신을 잃으셔서 놀랐습니다. 주무시기에 침대가 너무 딱딱하지는 않았나요? 춥지는 않으셨고요? 몸이 불편하신 곳은 없나요? 혹시 배가 고프지는 않으신가요? "
아니, 무슨 질문을 대답할 틈도 없이 저렇게 쏟아내는 거야. 내버려 두면 질문 세례를 끝도 없이 이어갈 것 같아 황급히 대답한다.
"아니, 아주 잘 잤고 춥지 않았고 편안했어. 그리고 배는 좀 고파."
잔소리인 듯 걱정인 듯 들려오는 저런 말들을 언제 들어봤을까? 이런 일상적인 대화를 나는 왜 잊고 살았을까.
낯선 듯 익숙한 친근함에 배시시 웃음이 번져 나온다. 리사와 나를 번갈아 쳐다보던 크리스, 마스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금세 볼이 빨갛게 되더니 온 몸이 고장 난 듯 삐걱거리며 말한다.
"허어. 여... 왕님이 우.. 스.... 웃으셨어. 웃으시..ㄴ... 니까 백만 배는 더 아름...ㄷ.. 우시네. 사람이 아닌 것 같아 정말."
"어... 어.. 나도, 나도 봤어. 여왕님, 한 번만 더 웃어주세요. 눈이 부셔서 죽을지도 모르지만, 한번 더 보고 싶어요. 한 번만 더요. 웃어주세요 천사님."
아니, 왜들 저런단 말인가... 정말이지 아이들이 말하는 것이니 아무 의도도 없고 뻔한 아부가 아닐 텐데도 몸 둘 바를 모르겠다. 청혼을 위해 찾아온 왕자들은 그보다 더 낯간지럽고 부끄러운 말들을 해댔던 것 같은데 그때는 왜 아무렇지 않았지? 아, 모르겠고 여기서 더 듣다간 창피해서 얼굴이 터질지도 모르겠다.
리사가 나를 한번 쳐다보더니 소녀처럼 깔깔거리고 웃는다. 왜 웃냐는 눈빛으로 쳐다보니 곤혹스러운 내 마음을 읽었는지 헛기침을 한 번 하고 식사 준비를 도우라며 아이들을 부엌으로 끌고 간다. 불만 어린 표정으로 부엌으로 끌려간 두 아이는 언제 그랬냐는 듯 조그만 손으로 식기를 준비한다. 리사와 아이들이 부엌에서 음식 준비를 하는 풍경을 바라보는데 그 모습이 참 정겨워 코 끝이 찡하다.
아침 식사를 마치고 세 사람과 옛이야기를 나누며 즐거운 한 때를 보내고 있는데 똑똑, 노크소리가 들려온다. "그래"라고 짧게 답하니 들어온 것은 그레이 경과 보좌관이다. 말 많은 보좌관은 나를 발견하자마자 내가 있는 쪽으로 달려와 무릎을 꿇더니 꺼이꺼이 울기 시작한다.
"아니... 여.. 왕님.... 끄윽.. 제가 분명 같이 가자고 말씀을 드렸느은데.. 저를 버리고 가시더니.. 이게 무슨 일이에요 도대체.. 어쩌다 쓰러지신 흑... 흐윽... 얼굴은 왜 반쪽이.. 되셨어어어... 끄윽"
하, 이 인간은 또 왜 이러는 거야, 자기 얼굴이 더 핼쑥하구먼, 누가 누굴 걱정하는 건지 나 원참. 피식 웃는 나를 바라보던 보좌관의 눈이 전에 본 적 없이 커지더니 울음을 뚝 그치고 갑자기 딸꾹질을 한다. 그 말 많은 인간이 말하는 것도 잊은 듯하더니, 갑자기 진진한 얼굴로 그레이 경에게 묻는다.
"아니, 그레이 경,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여왕님이 웃으시는 건가? 드디어 미치신 건가, 내가 모셔온 5년 동안 단 한 번도 웃으시는 걸 본 적이 없는데 이게 무슨 일이지?"
들려오는 대답이 없어 그레이 경이 서 있는 쪽을 바라보니 왜인지 그레이 경도 딱딱하게 굳어있다.
"보좌관님, 저도 여왕님을 호위하는 동안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모습이십니다."
다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궁에서 꽃잎만 굴러가도 까르르거리고 웃어서 어마마마가 그렇게 웃으면 헤프게 본다고 주의하라는 잔소리를 들은 게 몇 번인데.. 어? 이건 무슨 기억이지?... 전에 없던 기억들이다. 아, 잊었던 기억들, 기억하고 싶어도 도저히 기억해낼 수 없었던 장면들이 연달아 떠오르기 시작한다. 리사가 유모이던 시절 애지중지 내 머리를 땋고 묶어주던 장면들, 작은 별궁 정원에서 시간을 보내며 즐거웠던 티타임. 어마마마가 병석에 누우신 후 세 달만에 유명을 달리하신 일부터 갑작스레 이뤄졌던 여왕 즉위식, 아바마마가 애처롭게 나를 바라보며 숨을 거두시던 날, 어마마마와 아바마마의 얼굴까지도 모두 또렷하게 기억이 난다.
물밀듯이 머릿속으로 밀려들어오는 기억 속에는 그동안 이렇게 따뜻했던 기억을 떠올리지 못하고 헛헛하게 살았던 내가, 슬플 때 목놓아 울지 못하고 사람들을 내치며 고독하게 살아온 내가 보였다. 그런 내가 너무 가여웠다. 사랑받지 못해서가 아니라 아낌없이 사랑하지 못해서, 그 사랑을 표현하지 못하며 살아온 내가 가여웠다. 허벅지로 투두둑 뭔가가 떨어진다. 보좌관과 그레이 경은 거의 기절 직전의 얼굴이고 리사가 달려와 나를 품에 안아 그들의 시야로부터 나를 가린다.
"괜찮으시다면 두 분은 잠깐만 자리를 비워주시겠어요? 이 늙은이가 여왕님과 긴히 할 말이 있습니다."
그 둘은 혼이 빠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집 밖으로 나선다.
어느샌가 크리스와 마스가 다가와 내 양손을 그러쥐고는 같이 울고 있다. 아, 사람의 품과 체온이 이렇게 따뜻한 것이었단 말인가?
"여왕님, 지난 기억이 떠오르시는 겁니까? 그 기억 속에 이 늙은이도 있나요?"
내가 긍정의 뜻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리사가 환히 웃는다. 웃으며 운다.
"참으로 다행입니다. 다행이어요. 그간 정말 고생이 많으셨어요. 이제는 아픈 마음, 슬픈 마음, 참지 말고 속 시원히 우셔도 됩니다. 그러고 나서 툭툭 털고 다시 웃으면 되는 거예요. 맘껏 울고 또 우세요 윈터 여왕님. "
따뜻한 말을 건네는 리사와 나보다 더 서럽게 울고 있는 두 아이들을 보고 나니 여왕의 체면을 내려놓고 마음 편히 목놓아 울 수 있었다. 한참을 울고 나니 속이 다 시원해졌다. 밖에 서 있을 두 사람이 생각나 밖으로 나가려는데 일어나는 순간 허벅지에서 뭔가가 토도독 바닥으로 떨어진다. 고개를 숙여 바닥을 바라보니 뭔가가 반짝인다. 쭈그리고 앉아 쳐다보니 가루 같은 것이 몹시도 반짝거린다. '어, 저건 왕위 계승식 때 내가 술과 함께 마셨던 가루가 아닌가? 저게 왜?..' 맞은편에서 그 가루를 함께 바라보는 리사의 눈이 감동으로 넘실거린다.
아, 문득 깨달음이 밀려왔다. 왕가의 저주는 진짜였던 것이다. 리사와 두 아이들, 보좌관이 나를 위해 진심으로 울어주었고, 나 또한 나를 위해 마음을 다해 울었다. 오래전부터 내려온다던 저주는 분명 사실이었고 내가 그 후손으로 거울 가루를 먹은 마지막 사람이었다. 이 저주를 깨지 못했다면 나도 왕위에 오른 시점부터 10년 안에 폐부를 찌르는 고통이 시작되었을 것이고, 이 무서운 저주를 깰 수 있었을지 없었을지 모른다. 내 곁에 이렇게 따뜻한 사람들이 있고, 이들을 만나 함께할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앞으로는 모든 기억들을 추억하며 사랑하는 사람들과 잘 살아갈 수 있으리라.
드디어 이 지독한 저주가 풀렸으니 아바마마와 어마마마가 바라신 대로 우리의 왕국은 더 번성하리라.
생각을 갈무리하고 활짝 웃는 나를 리사가 힘주어 끌어안으며 말한다.
"여왕님, 정말 대견하고 대단하십니다. 저는 항상 여왕님이라면 이 저주를 깨실 수 있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전왕 폐하께서도 공주님이 마지막 희망이셨기 때문에 보호 차원에서 별궁에 모셨던 거랍니다. 제가 눈물을 머금고 궁에서 나와 호프 마을에 터전을 잡은 것도 다 훗날 이렇게 여왕님을 궁 밖에서 만나기 위한 이유였지요. 역시 윈터 공주님, 나의 여왕님. 감사합니다. 그 무서운 저주를 깨고 살아주셔서, 이렇게 저를 다시 만나주셔서. 이제 저는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사랑과 응원이 가득 담긴 말에 저절로 미소가 번지며 나도 리사를 힘껏 껴안는다. 두 개의 심장이 맞닿으며 힘차게 쿵쿵 뛴다. 창 밖으로 보이는 산기슭, 따뜻한 햇살 아래 새하얀 눈들이 녹고 있다.
그녀, 윈터 마침.
안데르센의 눈의 여왕을 다시 읽으며, 이 책이 이런 내용이었구나 싶었어요. 원작 속에서 눈의 여왕을 따라갔던 카이에게는 그를 찾기 위해 떠난 길에서 온갖 고난과 역경을 다 이겨낸 게르다라는 친구가 있잖아요. 카이는 게르다에 의해 다시 원래대로의 삶으로 돌아갈 수 있는 기회를 얻고, 그 둘이 행복하게 잘 살았을 거예요. 책을 덮으며 이 동화는 해피 엔딩인 듯 하지만 또 해피 엔딩이 아닌 것 같았습니다. 눈의 여왕에게도 그녀가 그렇게 변한 이유가 있지 않았을까? 그녀도 결국엔 좋은 사람이고, 행복해지고 싶은 사람은 아니었을까? 그저 너무 외로운 한 사람이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눈의 여왕에게 '윈터'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그녀의 입장에서 글을 써 내려가 보았습니다. 브런치 덕분에 오래전에 읽었던 동화들을 다시 읽어보고, 또 이런 글을 써볼 기회가 생겨 기쁘고 감사했습니다. 글을 쓰는 내내 왠지 즐거웠어요. 긴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첨부 그림/사진 출처 - Pixbay 무료 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