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탁실 수납장을 떼는 데 홍수가 웬 말이냐.
이 동네에 산 지도 벌써 26년에 접어든다. 원래 살던 집에서 옆 옆 동으로 이사를 와 지금까지 살고 있는데 그게 벌써 14년째다. 이사를 가지 않고 한 집에서 오래 살다 보니 가전이나 가구를 크게 바뀔 일이 없을 뿐더러 이사를 가지 않으니 집을 깨끗이 비울 일이 없어 짐을 이고 지고 살게 된다.
세탁기는 이전 집에서 그대로 가져왔으니 최소 14년 되었을 것이고, 에어컨은 이 동네로 오기 전에 선물 받은 것이니 26년 이상 되었다는 이야기다. 세상에나! 이렇게 기간을 따져보니 와, 대단한데? 이걸 검소하다고 해야 하나 아니면 구두쇠라고 해야 할까? 에어컨은 거의 골동품 수준 아닌가 싶지만 그 시기에 가장 좋은 것으로 선물 받았고, 에어컨을 작동시키는 날이 손에 꼽혔던지라 불과 작년까지만 해도 잘 사용했다. 그런 우리 집에 작년 12월, 새로운 세탁기와 건조기가 들어왔고, 이상한 붉은색이었던 지펠 냉장고 대신 최신 냉장고가 들어왔다.
형부와 언니가 적극 추천하는 바람에 식기세척기까지 들여놓으려고 했는데 사전 점검 오신 기사님이 우리 주방은 빌트인이 가능하지 않다고 했다. 원하던 세척기가 아니라 다른 상품으로 바꿔야 한다고 하니 크게 세척기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우리집 식구들은 세척기를 환불하는 것으로 뜻을 모았다. 환불을 하려
다 이리저리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다보니 나온 결론은 계획에는 없었던 에어컨을 구매하기로 했다.
작년 2월에 태어난 사랑둥이 조카가 우리 집에 자주 올뿐더러 앞으로 몇 달 뒤부터는 같이 살게 되는 상황이라 조카의 쾌적한 환경을 위해 할아버지가 과감히 돈을 더 쓰더라도 필요한 에어컨을 사기로 결심하신 것이다.
“에어컨은 도담이만 안 와도 좀 더 써도 되는데, 도담이가 오니까 새 걸로 바꿔야지.”
그렇게 12월 말 에어컨까지 구매하며 에어컨을 빼고 모든 가전이 들어왔고, 내일 에어컨까지 들어오면 우리 집의 굵직한 헌 가전들은 나가고 새 가전이 들어온다.
사실 나는 예전부터 건조기가 그렇게 갖고 싶었다. 할머니 할아버지까지 합치면 6명으로 대식구가 사는 집이니 빨랫감도 많은데 그것을 또 나눠서 색깔별로 나눠 세탁기를 돌리려니 여간 손이 많이 가는 게 아니었다. 심지어 퇴근 후에 세탁기를 돌려 널어야 했으니, 늦게 들어오는 날에는 빨래를 돌릴 수가 없고 주말에 몰아서 돌려야 했다. 베란다에 있는 건조대는 너무 높기도 하고 불편해서 접었다 폈다 하는 건조대를 사용했는데, 빼곡하게 빨래를 널어도 턱없이 자리가 부족하곤 했다. 그 덕에 우리 집 세탁기는 매일 바빴고 건조대도 접혀 있을 수 있는 날이 거의 없었다. 친구들이, 지인들이 식세기와 건조기에 대해 극찬을 할 때마다 얼마나 부러웠는지 모른다. 그 세탁기와 건조기를 들이기 위해 나와 내 동생이 얼마나 눈물겨운 노력을 했었는지. 119 에까
지 전화를 거는 웃픈 상황이 벌어졌다.
우리 집 세탁실은 부엌 안쪽에 위치하고 있는데, 세탁기 위쪽으로 장식장이 달려있다. 실사를 나온 기사님께서 새로 들어올 세탁기와 건조기는 일체형으로 세탁기 하나 길이에 비해 두 배로 높은 공간을 확보해야 하기 때문에 수납장을 철거해야 한다고 했다. 가전이 들어오기 바로 전 날 실사를 했기 때문에 내일 오전에 세탁기와 건조기가 들어오려면 당장 수납장을 떼어내야 하는 상황이었다. 업체에 문의해보니 5만 원이면 와서 바로 떼어주신다고 했는데 아빠한테 말씀드렸더니 본인이 퇴근 후 저녁, 또는 내일 아침에 떼겠다고 하셨다.
생각할수록 ‘내가 한번 해볼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사람이 와서 떼는 것이니 특별한 공구가 필요 없는 한 나도 뗄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동생도 같은 마음이었는지 힘을 합쳐 수납장을 받치고 나사를 돌려가며 수납장의 패널들을 하나씩 제거하고 벽과 결합된 부분들의 나사까지 모두 풀어냈다. 자, 이제 수납장을 세탁실에서 빼내면 되는 일만 남았는데 거기에서 일이 터졌다. 생각보다 폭이 넓은 수납장이 벽과 콘센트에 걸려 쉽사리 세탁실 밖으로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장식장을 들었다가, 당겼다가, 돌리려다가, 비스듬히 눕히려다가 말 그대로 난리를 쳤다. 수납장이 생각보다 무거워서 계속 들고 있기는 무리였고 수납장을 눕힌 뒤 세탁기 위에 올려놓고 잠시 쉬며 수납장을 힘껏 들어서 비스듬히 돌려서 잘 빼보자는 작전을 세웠다. 수납을 힘껏 뒤 쪽으로 민 순간, 갑자기 엄청난 양의 물이 세탁실에 쏟아지기 시작했다. 이미 눕혀진 수납장 때문에 세탁기 뒤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지만 동생과 나는 뭔가 일이 잘못되었음을 직감했다.
“관리실, 관리실 전화번호가 뭐였지? 어떡하지? 어떡해?”
수납장을 피해 세탁실 안으로 들어가 살피니 세탁기와 연결된 호스 두 개가 수도꼭지에서 분리되어 있고 수도 두 개에서는 폭포수와 같은 물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정신없이 호스를 부여잡고 수도꼭지에 다시 끼워넣으려고 안간힘을 쓰는데 엄청난 수압에 엄청난 물이 내 얼굴과 옷을 다 적시고, 온 벽을 다 적셨다. 우리는 너무 어이가 없는 상황에 이미 웃으며 울고 있었고, 세탁실에는 계속해서 물이 차오르고 있었다. 눈에 보이는 수건들을 세탁실 바닥으로 던져 넣으며 '물아, 수건에 조금이라도 흡수되거라, 제발 역류하지 말고, 부엌 바닥으로 새어 나오지 말거라.' 간절히 빌었다. 세탁실에서 어렵사리 탈출한 나 대신 동생이 세탁실에서 고군분투하는 동안 나는 119에 전화해 횡설수설하며 숨 가쁘게 말을 이었다.
“여보세요, 지금 여기가 아파트인데요, 세탁기 호스가 분리되면서 엄청나게 물이 쏟아지거든요, 지금 거의 바깥으로 넘칠 것 같은데 관리실 번호는 생각이 안 나고 너무 급해서 여기로 전화드렸어요!”
“아, 지금 세탁기와 연결된 수도에서 물이 계속 나온다는 말씀이시죠? 가셔서 수도꼭지 잠그세요.”
내 목소리와는 다르게 너무 차분하고 간단명료한 대답이었다.
“네??, 수도꼭지 안 잠기던데요? 돌려봤는데 안 잠겨요. 어떡하죠?”
“그럼 돌렸던 반대 방향으로 돌려보세요. 그럼 잠깁니다. 수도꼭지 빨리 잠그셔야 해요.”
너무도 침착한 말투로 수도꼭지를 돌리라고 했다. 스피커폰이었기 때문에 그걸 들은 동생이 상대적으로 팔이 가깝게 닿는 뜨거운 물을 돌려서 잠갔다. 그런데 공간이 너무 좁아서 안쪽까지는 팔이 닿지 않아서 안쪽 수도는 언니가 들어와서 잠가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네, 감사합니다. 필요하면 다시 전화드릴게요.”
다급한 마음에 바로 전화를 끊고 좁은 틈 사이로 들어가 젖 먹는 힘까지 짜내어 수도를 잠갔다. 수도를 잠근 후 다시 그 틈으로 나가야 하는 나는 다리에 힘이 풀려 동생이 꺼내 줄 때까지 쪼그려 앉아 있었다. 한시름 돌렸다 싶어 우리는 한참을 마주 보고 웃었고 함께 안도했다. 너무 당황해서 모든 사고가 일시정지되었던 것 같았다. 차분하게 해결방법을 알려주셨던 그 구조 상담사 분께 깊은 감사의 말씀을 전한다. 그분이 아니었으면 진짜 온 집안이 물바다가 되었을 거고 그렇게 되었다고 생각하니 그 뒤에 벌어졌을 일에 정말 아찔했다. 좋은 일 앞두고 이게 무슨 일이람, 그래도 아직 일은 끝나지 않았다. 어떻게든 저 수납장을 꺼내야 한다.
비장한 표정으로 동생과 나는 눕혀놓은 수납장을 세웠고 이쪽저쪽 조금씩 돌리다 보니 드디어 수납장이 세탁
실을 빠져나왔다. 와, 그때 느낀 감정은 근래 들어 가장 기쁘고 뿌듯한 감정이었다. 동생과 나는 후들거리는 팔과 다리를 부여잡고 웃으며 마저 세탁실을 정리했고, 늦은 저녁을 먹으러 바깥으로 나갔다. 밥을 먹는 내내 기분이 좋았고, 몸을 움직인 터라 밥도 너무 맛있었다. 동생도 나도 그날의 느꼈던 보람과 성취감을 잊지 못한
다.
쉽게 할 수 있을 거라고 시도한 일에서 뜻하지 않은 복병을 만나 전전긍긍하는데 그러는 와중에 터진 사고 아닌 사고, 어찌할 바 모르고 발을 동동 구르다가, 어찌어찌하여 결국에는 그 일을 잘 해결했다. 아마 일이 착착 진행되었다면 이만큼의 성취감을 느끼지는 못했을 것이다.
늦게 집에 귀가하신 아빠는 공구상자를 사들고 들어오셨는데, 집에는 딸들만 있으니 수납함이 떼어져 있으리라고는 전혀 기대를 안 하셨을 것이다. 그러다 휑한 세탁실 벽면을 보시고는 놀라셨다. 우리가 했다고 뿌듯한 표정으로 이야기했고 그걸 듣는 아빠도 할 일이 덜어져 기쁜 표정이셨다. 당연히 우리가 느낀 보람은 배가 되었다.
새로운 세탁기와 건조기를 마주할 때 종종 그 기억이 떠오른다. 헌 가전이 가고 새 가전이 오는데, 기쁜 마음
과 함께 새로운 교훈을 몸소 체험하는 기회가 주어지니 감사했다.
할 수 없는 일은 없다.
시도하다 보면 고난과 역경도 겪겠지만 그것을 이겨내고 끝까지 한다면 결국엔 할 수 있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