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맞는 삶을 택했던 것 뿐.
어느 날 언니가 저에게 말했습니다. "너는 니 인생에 최선을 다하지 않는 것 같아. 충분히 더 노력해서 더 잘할 수 있는데도 그냥 어느 정도 선에서 타협하고 만족하는 것 같아." 아, 그 말은 꽤나 아팠습니다. 아픈 데를 깊게도 찔린 터라 바로 어떠한 대답도 하지 못했습니다. 머리로는 가까운 사람의 걱정이 담긴 말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기분이 상했습니다. '나는 한다고 했는데.. 그리고 나는 이대로도 괜찮은데.' 도대체 왜 저런 말을 하는 걸까? 마치 내가 살아온 인생을 부정당하는 듯 해 속상했습니다.
저는'실패'라는 단어를 참 싫어합니다. '실패'를 떠올리면 '패배자'가 자연스럽게 연상됩니다. 그리고 그 생각은 무언가와의 싸움에서 졌다. 이루어야 하는 것을 능력이 되지 않아 포기했다 등으로 연결됩니다. 제가 더러 여러 가지 일에서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최선을 다하지 않는다면 결과가 만족스럽게 나오지 않더라도 면피할 구멍이 있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최선을 다했는데도 만족할 만한 성과가 나오지 않는다면 저는 그것을 실패라고 생각하고 몹시도 괴로워할 사람이라는 것을 잘 압니다. 그래서 의도적으로 최선을 다하지 않는 방법을 택해왔던 것이죠. 대부분의 일에서 일말의 괴로움을 피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는 것을 이제야 속 시원히 인정합니다. 내 깐에는 최선을 다했는데, 나는 한다고 했는데, 등의 말들은 그저 그런 핑계였을 뿐입니다. '실패'라는 말을 왜 그렇게 부정적으로 느끼고 그 단어 하나에 벌벌 떨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사실 지금도 여전히 그렇습니다.
최선을 다하지 않은 것 외에 시도 자체를 하지 않은 경우도 있었습니다. 내가 잘할 수 있을만한 일만 시작한다거나, 못하는 일 자체는 아예 꺼려했습니다. 전형적인 안정 추구형 인간의 표본이라고 할 수 있죠. 그런데 이것도 해보고 싶고, 저것도 해보고 싶고 하고 싶은 건 많았습니다. 시작이나 시도 자체는 주변에 비해 많이 하는 편이었지만 특정한 성과를 달성해야 하는 일에는 예외였습니다. 그 성과를 내지 못하면 누구보다 제 자신이 제일 실망할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으니까요. 어찌 보면 조금 비겁했던 것도 같습니다.
참 모순이죠. 말로는 치열하게, 뜨겁게, 살고 싶다 생각하면서도 그런 삶을 살지는 못했습니다. 크나큰 열정을 불태워 본 적도, 미친 듯이 한 가지 일에 장기간 몰두해 본 적도 없습니다. 한편으로는 왜 모두가 치열하게, 뜨겁게 살아야 하는 걸까? 왜 그렇게 살아야만 잘 산 인생이라는 걸까?라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치열하고 뜨겁게 살아 얻는 것이 있겠지만, 잃는 것도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치열하고 뜨겁게 살지 않아 얻지 못하는 것도 있겠지만, 잃지 않는 것도 있을 것입니다.
저는 제 인생이 남들에 비해 쉬웠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누군가의 인생에 비하면 무사 무탈한 인생일 것이고, 또 다른 누군가의 인생에 비하면 굴곡 많은 인생일 수도 있습니다. 평탄했다느니 평범했다느니의 기준 자체가 모호하기 때문에 쉽게 단정 지을 수도 없습니다. 다만 그래도 제 인생은 그럭저럭 살만했고, 그럭저럭 잘 살아왔다고 생각합니다. 후회되는 일들이야 많지만, 최선을 다해 살았던들 후회되는 일들이 없었을까요?
얼마 전 친구와 나누었던 이야기도 떠올랐습니다. 친구가 제게 "너는 만약 고등학생 때나 대학생 때로 돌아가라고 하면 돌아가고 싶어?"라고 물었고 저는 "아니."라고 대답했습니다. 친구에게 똑같이 물었더니 역시나 똑같이 대답했습니다. “그래도 우리가 스스로 생각하기에 쉬웠던 날들은 하나도 없었던 것 같아”라는 말로 대화를 마무리했습니다. 우리가 생각보다 힘든 삶을 살았나? 아니면 생각보다 지금 현재가 만족스러운 걸까? 어떠한 것이 저에게 대답이 되어줄 수 있을지 지금도 잘 모르겠습니다. 어떤 질문에도 망설임 없이 '그렇다.'라고 대답하기도 어렵습니다.
저는 ‘나름대로’라는 말이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마다의 속도가 있고, 그 속도에 본인이 만족하다면 그 삶도 그저 그런 삶일 뿐인 것입니다. 여전히 삶을 치열하게 살아야 하는가? 에 대한 질문에 대한 답을 내리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꼭 치열하게 사는 것이 답이 아니라는 말 정도는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마다의 속도가 있듯 저마다 살아가는 방식의 차이가 있을 뿐일 테니까요.
뒤늦게 개화하는 꽃이 더 아름답고 귀하듯이, 뒤늦게 피는 인생도 그리 나쁘지 않을 거라 생각합니다. 치열하지 않다고 해서 노력하지 않는 것이 아니고, 애쓰지 않는 삶이 아닙니다. 무리하지 않고 나 자신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며 한 발 한 발 나아가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어제의 우리보다 더 성숙해지는 것일 테니까요. 누군가의 잣대에는 평범한 삶일지라도 본인 자신에게는 누구보다 치열한 삶이었을 수 있다는 것을 적어도 나 자신은 알아줬으면 합니다.
치열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오늘 하루도 잘 살아내었고, 내일 하루도 또 잘 살아갈 우리니까요.
오늘도 정말 수고 많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