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 1
띠띠띠띠띠띠 띠리리~
잠겼던 문이 열리며 하나도 안 반가운 남편의 귀가를 알렸다.
아이들은 신발장 앞으로 도도도 마중 나갔다.
기다란 아빠를 올려다보는 아이들의 눈
아이들과 눈인사 후 집안을 휘이 둘러보는 남편
며칠 전부터 남편과 냉전 중이던 나는 그제야 느릿느릿 좀비처럼 일어났다.
이때 집안 모양새를 볼작시면
이불이 일곱 채 정도 마루에 나와서 산을 이루고 있고
책장에 있던 책은 단체로 바닥으로 다이빙 상태
레고 블록은 다이빙한 책 위에 우르르 쏟아져 있고
발 디딜 틈이라고는 눈을 씻고 봐도 없다.
남편의 얼굴이 대번에 찌푸려진다.
"너희 씻었어?"
"아니, 아직 안 씻었어."
준이가 대답했다.
"지금 열 시인데 엄마가 아직 안 씻겨줬어?"
"응"
"뭘 한 거야? 이제까지?"
오......
우리 여보 궁금한 거야? 당신의 사랑스러운 아내가 무엇을 했는지?
나느응~ 퇴근한 뒤 어린이집에 들러 애들을 하원 시키고, 당신이 늘 이야기하던 저렴한 주유소까지 굳이 애들을 싣고 가서 자동차 기름통 2/3를 채웠어. 집에 오는 길에 아이들과 장을 봤지. ('장 본다'는 짧은 말에는 주차해서 아이 둘을 차에서 각각 내린 뒤 마트에서 이거 사줘 저거 사줘 하는 아이들이랑 '사야 할 것 + 사지 말고(?) 싶은 것'을 함께 사고, 서로 계산하겠다는 아이 중 한 명에게 너는 다음에 하자 달래면서 남은 아이에게 카드를 건네어 겨우 마트를 나와서, 둘을 데리고 찻길을 건너 차에 태워 안전벨트를 채운 뒤, 집에 와 집 주차장에서 다시 한번 아이 둘을 차에서 각각 내리는 일을 반복한 뒤, 마트에서 산 짐과 어린이집에서 들고 온 짐을 모두 든 채 집에 겨우 도착했다는 뜻이야.) 집 도착해 장 본 것으로 밥, 반찬을 열심히 만들어 셋이 밥을 먹었고, 아이들이 이불산을 만들어 등산 놀이 하는 동안 설거지를 했으며, 집에 있는 책 중 정리할 게 있는지, 장난감 중 버릴 게 있는지 박스에 정리했고, 아이 둘에게 각각 서너 권의 책을 읽어준 뒤, 빨랫감을 넣고 세탁기를 돌렸어. 왜 안 놀아주냐는 아이들 원성에 아이들과 눈 맞추며 영혼의 대화를 나누기도 했고. (고작 이것만 했는데 시간이 그렇게 갔네~)
내가 애들한테 씻자니까 옛날이야기 딱! 하나만 더 듣고 씻겠다지 뭐야, 지금 딱 마지막 옛날이야기를 듣고 있는데 마침 당신이 도착했네...
아 진짜 궁금한 건 아니었다고?
근데 뭘 물어? 췌!
'내가 씻길게~ 피곤한 여보시여. 얼른 쉬어!.'
'아 내가 다른 거 하느라 아직 못 씻겼어. 정말 송구해.'
나는 이렇게 말할 마음과 마치 자석의 같은 극처럼 서로 확 밀려나는 느낌이었다.
억울함과 외로움이 분노로 폭발!
우리 부부는 서로의 육아 기여도를 촘촘하게 견주며 으르렁댔다. 우리는 오랜만에 언성을 높였고, 일곱 살 네 살 아이들의 눈동자는 방황했다.
"우리 집에는 아빠만 있어. 남편은 없어!"
"우리 집에 아내는 원래 없었고, 엄마도 없어!"
(아, 내가 진 거 같은데)
아이들의 눈동자를 외면한 채 서로에게 한 방씩 결정타를 먹이고 나서야 남편과 나는 돌아섰다.
밤사이 아이들 눈동자와 내가 한 말과 남편이 한 말이 머릿속을 헤매고 다녔다.
아침에 일찍 출근해야 하는 나는 잠든 아이들에게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 못한 채 나와서 마음이 내내 불편했다. 침을 쏘고 나면 자기 내장이 나와서 죽는다던 벌이 있었나, 나는 그 벌인가 했다가 그 벌도 알면서도 그랬겠지, 그럴 만했겠지 하면서 한없이 바닥으로 가라앉았다.
나는 어린이집 선생님께 문자를 보냈다.
'어제 남편과 크게 다투었어요. 준이 마음이 안 좋을 거 같아요. 한번 봐주세요ㅠ 죄송해요.'
점심시간이 지나자 선생님께 답이 왔다.
'아, 엄마 마음도 안 좋으시겠어요.. 그랬군요ㅠ 네 제가 살펴볼게요.'
선생님의 답을 보면서 아주 조금의 안심과 여전한 죄책감, 계속해서 올라오는 억울함이 뒤섞여 발이 땅에서 붕 뜬 듯했다. 수업하는 내내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오는지 몰랐다. 아이들의 불안한 눈이 자꾸 생각났다.
"준아, 민아, 엄마 아빠가 싸우고 있지? 너희 때문이 아니야. 준이 민이도 친구랑 다툴 때 있지? 그러고 다시 놀기도 하지? 그런 거야. 엄마 아빠는 준이 민이 사랑하는 마음은 언제나 같아."
싸움을 마치고 이렇게 이야기했는데 그 말을 듣는 혼란스러운, 억지로 안심하던 아이들 눈이. 특히 일곱 살 준이 눈이.
그날 저녁 하원 할 때 만나 보니 아이는 의외로 밝아 보였다. 오히려 둘째 민이가 나를 보더니 제 나름대로 무시무시한 표정을 지어 잠시 위협하는 거였다. 나는 그냥 꼭 안았다. '어제 많이 놀랐지, 미안해' 하면서
아이들에게 전해 들으니 남편은 많이 늦는단다. 아이 둘에게 양팔을 한쪽씩 내어주고 셋이 누운 그날 밤, 잠을 청하면서 나는 슬쩍 물어보았다.
"준아, 오늘 별일 없었어?"
내가 물었다.
"어.. "
준이는 팔을 쭉 뻗어 얼굴 위에서 손에 든 로봇을 만지작거리며 답했다.
그러다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아.. 크레파스가 엄마가 안아주라 했다고 하면서 안아줬어."
"아 그랬어? 엄마는 그 말을 들으니까 크레가 고맙고, 준이 마음은 어땠을지 궁금해"
"어.. 싫었어."
"아? 크레가 안아주는 게 싫었다고?"
"어."
"아.. 왜 싫었는지 물어봐도 돼?"
"응. 엄마가 보고 싶은데 크레가 안아주니 싫어."
"그게.. 크레가 하면 엄마 마음 전달이 잘 안 돼서 싫은 거야?"
했더니 하는 말이
"아니... 내가 엄마 보고 싶을 때 크레가 안아주면, 몸이 갑자기 추워지고 눈물이 나올 거 같아... 그래서 싫어."
대답할 말이 없었다. 마음이 먹먹했다.
몸이 갑자기 추워진다는 아이.
벚꽃잎같이 연약하고 고운 아이의 감정에 닿으니 나 역시 몸이 갑자기 추워졌던 그때로 순간 돌아가게 되었다.
아이에게는 언제나 엄마의 자리가 있다.
나는 엄마의 자리가 빌 때면 몸에 구멍이 뚫린 듯했다.
몸에 스산한 바람이 불고 심장이 저 아래로 아래로 쑤욱 내려가는.
어제는 진짜 남편 말대로 엄마가 없었을까?
그랬나. 엄마가 없었네. 슬퍼졌다. 미안했고
"남편.. 내가 소중한 아이들에게 이렇게 상처 주면서까지 어필하는 거 봤어?
내가 얼마나 힘들면 아이들이 이렇게 불안해하는 것을 억지로 참으면서까지 이러겠어?
내가 오죽하면 이 사랑하는 아이도 안 보이겠어?"
라고 말하고 싶었던 건가... 나는 그랬나?
내 마음에 구멍 있다고 남편도 뚫어놓겠다고
아이들 마음에 구멍을 뚫으면서까지 이야기를 해야 했나?
그 방법이 이렇게 슬픈데... 오히려 나의 구멍이 더 커져 버렸는데....
내가 할 말은 '미안해' 밖에 없었다.
"미안해.."
"엄마, 아직도 아빠때매 많이 슬퍼?"
"응? 아니야, 엄마가 아빠한테 준이 민이만큼 엄마도 봐달라고 화낸 거야. 정말 너희 잘못이 아니야. 준이도 엄마가 민이를 더 많이 안아주면 엄마한테 화난다고 말할 때 있지? 엄마도 그런 거지, 진짜 아빠가 미운 게 아니야. 엄마 아빠는 서로 사랑하고 준이 민이가 너무 소중해."
"엄마, 크레가 안아주면 몸이 차가워지는 느낌인데 엄마가 안아주면 따뜻해지는 느낌이야."
"...."
(아이구ㅠ)
"엄마는 나를 안으면 엄마 눈에 눈물이 촉촉해."
정말 울컥해서 혼났다. 눈물이 나왔다. 내가 이렇게 사랑하고 사랑받고 있음이 느껴진다 할까. 나의 노력을 알아주는 존재가 무척이나 감사했다. 이 사랑스러운 아이들을 내가 더 많이 돌보았다고 그렇게 억울했다니...
아이들의 위로는 정말 강력하다. 치유의 깊이가 다르다.
나는 타인과 사랑하며 나누는 것에 익숙하고, 진심은 통한다고 믿으며 관계를 이어나가는 것이 어렵다고 느끼지 않았다. 공동육아가 공동체 생활의 전부는 아니겠지만 공동체 생활을 하면서 나는 행복했고, 초등학교도 비슷한 길을 선택하려고 한다.
하지만 남편과 소통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리고 이런 상처를 주는 소통, 진심이 전달되지 않는 소통은 우리 둘만의 문제가 아니라 아이들에게 실로 큰 영향을 미친다. 이제 나는 '내가 좀만 노력하면 되겠지, 남편이 잘하면 되겠지~' 이런 생각을 버리기로 했다. 나는 분명히 (다른 사람과 어떻게 지내든) 남편과 소통하는 것이 서툴고 그것을 배워야 함을 인정한 것이다. 전문가의 도움을 받고 공부하려고 한다. 나는 아주 잘 지내니 '남편 너만 잘하면 돼'가 아니었다는 것.
마음을 열고 솔직히 나를 더 바라볼 수 있기를.
준이 민이 덕분이야.
고마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