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 2
"오 이거 칭찬 좀 받겠는데?"
깨깨오 통장에서 알림이 왔다. '모임 통장'이라는 것을 새로이 개설하면 5,000원을 준단다. 생활비 통장이 그렇지 않아도 필요했는데 남편과 둘이 이 통장에 모으면 되겠다는 생각이 번뜩 들었다. 마침 아이 학교 출자금 건으로 남편과 돈을 긁어모아야 하는 시기라, 알뜰하고 지혜로운 나는 바아~로 개설하기로 했다.
평소 00 데이, XX데이가 올 때까지 참고 참았다가 그날이 되어야 물건을 사는 남편은, 내가 전혀 모르는 저렴한 사이트를 발굴해내고, 쿠폰 신공을 발휘해 극한의 할인율을 찍는 엄청난 능력의 소유자다. 나는 남편이 미울 때는 '시간이 곧 돈이다.'라는 말과 한 통속이 된다. 그러고는 '나는 나의 시간을 더 아낀다'는 우쭐함을 드러내는 방법으로 배송비를 지불하고 1,000원도 안 되는 물건을 산 적도 있다. 아무튼 남편은 그런 '알뜰한 당신'이고, 지금 통장 개설하면 주는 돈은 무려 5,000원이다.
나는 일사천리로 통장을 개설하고, 이름도 완성했다. 이름하여 '행복은 가까이'
올해 일 년 간 소중히 모은 돈 몇 백만 원과, 어떤 오류로 어린이집에서 환불받은 200만 원을 통장에 입금했다.
그리고 기세 등등하고 위풍당당하게 남편에게 이 사실을 톡으로 알리고 오후 수업에 들어갔다.
수업을 마치고 돌아온 나는 생각지도 못한 남편의 긴 톡에 깜짝 놀랐다. 손 흔들고 있는 라이언이 민망했다. 참다 참다 못 참겠다는 듯한 남편은 열변을 토하고 있었는데 정말이지 핸드폰에서 침이 튀는 거 같았다. 무서워서 몇 줄 읽다가 톡을 닫아버렸다. (그때는 확실히 무섭다고 느꼈고, 지금 이 글을 쓰면서 '무섭다'는 말은 약간 위약적인 거짓말인가 생각해보았는데, 일단은 무섭다고 하는 게 맞다는 느낌이 든다. 가슴이 두근거리고 뭔가 혼나는 느낌이었으니까. 학원에 안 간 걸 아빠한테 들켜서 혼날 때처럼) 나는 대답할 말이 없었고, 남편이 뭐라 썼을지 궁금하지도 않았고, 억울하기만 했다.
나는 표정 관리가 안 돼서 교무실에 앉아있기 어려웠다. 계속 삐걱거리는 관계에 윤활유 한 방울이라도 뿌려보겠다고 한 일인데 남편은 내 의도를 봐주는 일에는 관심이 없다는 것이 슬펐고, 그 슬픔이 너무 찌질해서 화도 났다. 교무실에서 나와 주차되어 있는 차 안으로 들어가서 한바탕 눈물을 쏟아냈다.
"거 봐, 또 안 도와주네."
며칠 전 민이 말이 떠올랐다.
어린이집에서 준이 민이를 데리고 집에 도착해 함께 웃옷을 벗고 있을 때였다. 옷방에서 점퍼를 벗어 옷걸이에 걸고 있는데, 화장실 앞에서 옷을 벗고 있던 민이의 울먹이는 짜증 소리가 들렸다.
"힝"
"민아, 왜? 엄마한테 와, 도와줄게."
"힝~ 이거가 안 돼. 이거가 안 돼!"
내 옷을 걸고 아이들 겉옷을 마저 걸고 있는데 다시 민이 목소리가 들렸다.
"이거가 안 된다고!"
민이가 내게 울면서 다가왔다. 내복과 겉옷의 크기가 비슷해서인지 팔이 아무리 해도 안 빠지는 모양새였다.
"알았어. 엄마가 팔 한쪽만 걸고 얼른 도와줄게."
그러자 나를 향해 입을 크게 벌리고 '아앙'하고 울었다. 민이가 그때 울면서 한 말이다.
"거 봐, 또 안 도와주네. 엄마가 오라고 해서 왔는데!"
"거 봐. 또 내 마음 안 봐주네. 내가 노력한다고 해봤자 안 되잖아. 과연 당신 마음에 드는 나라는 존재가 어딘가에 있기는 한 거야?"
나는 네 살인가?
"거 봐. 내 의도는 안 보고 또 결과만 보네. 거 봐~ 거 봐~ 또 이러지."
"거 봐"에 담겼던 민이의 앙탈을 나는 갑자기 무거운 좌절감으로 해석하고 싶어졌다. 내가 남편의 마음에 드는 일은 내 능력 밖의 일이라 생각하니 피로감과 무기력함이 몰려왔다. 자꾸 노력해도 계속 떨어지는 시험처럼, 시험 자체를 포기하고 싶어지는 마음이랄까, 이 시험 때려치우고 다른 일이나 하자 싶은 마음. 정말 원하지만 나는 합격할 수 없는 시험인가 보다 하는.
그런데 또 남편과 따로 살 수는 없다. 나는 내 아이를 나만큼 사랑해주는 존재와 아이의 성장을 지원하고 싶고, 아이의 사랑스러움을 매 순간 나누고 싶다. 남편은 세상에서 나만큼 내 아이를 사랑하고 위하는 유일한 존재다. 결국 다시 내가 사랑을 선택하고 내가 문제를 풀어나가야 하는 것이다. 그러니 꼭 합격해야 하는 시험이고 포기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에 도달한다.
나는 "거 봐"에 담긴 나의 좌절감을 생각한다. 민이에게는 '아니, 엄마가 이거 하고 도와줄 건데 왜 그래. 금방 다 돼.'하고 넘겼는데 왜 나는 나에게는 '큰 일 났다, 이건 비상사태고 여기에서 절대 헤어날 수 없고, 그냥 이대로 죽어야 해'라는 메시지를 주는 걸까? 이것을 시험이라 표현하는 게 맞긴 한 건가? 그렇다면 시험에서 떨어지면 나는 어떻게 되는가?
학원에 몰래 빠진 것을 들켜서 아버지께 혼난 날 나는 어떻게 되었나? 아버지의 정답지(학원에 간다. 안 갔을 때는 솔직하게 말한다.)가 있는데 나는 다른 답지(학원에 안 간다. 그 사실을 숨긴다.)를 선택했다. 그래서 나는 아버지의 다정한 미소와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손길을 받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때 나는 나에게 올 사랑을 한 순간의 내 실수로 아버지께서 거두어 가버렸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학원에 빠진다는 것은 사실은 좀 다른 문제라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나는 그것이 오답인 줄 알고도 선택했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다정한 미소 대신에 꾸중이 올 것임을 모르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또 어떻게 생각하면, 혹시나 아버지가 내가 학원에 안 갔어도 '오늘은 피곤했어?' 하면서 다정한 미소를 거두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일말의 기대심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고 나서, 그렇게 조심스럽게 다른 답지를 선택해보고는 "거 봐"하면서 실망감을 감추는 것이다. 마치 알았다는 듯이. "거 봐"에는 사실 '이번에는 내 행동이 아닌 그냥 내 자체로 받아들여질 줄 알았어요.'가 들어있는 게 아닐까?
나는 남편의 톡이 왜 무서웠는지 나를 좀 이해하게 되었다. 내 행동이 우리에게 주는 이득이나 이점보다 '나라는 여자', '나라는 사람의 선의'를 남편만은 봐주기를 바랐나 보다. 그래서 그렇게 슬펐고, 그로 인해 다른 일을 할 원동력까지 잃었나 보다. 그랬었나 보다. 그랬었었나 보다. 또 그럴 수도 있고...
나는 남편의 톡을 해답지 살피듯 천천히 읽어 보았다. 우리에게는 이미 남편이 개설한 모임 통장이 있었고, 그래서 처음 통장을 개설하는 게 아닌 우리는 대상자가 아니라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앞으로는 무엇을 하기 전에 먼저 좀 물어봐 달라는 이야기. 다시 보니 그렇게 무시무시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아! 답을 찾는 방법이 있었구나 싶은 것이 나의 절망도 민이의 앙탈처럼 느껴지려고 했다. 쿨하고 멋지게 '한 방에 답을 고르는 방법'이 어렵다면, 구차하고 조금 자존심 상하는 기분이 들어도 '이게 답이야?'하고 물어볼 수 있다는 것. 그렇게 서로가 원하는 답을 찾아가는 방법이 있었다. 세상에 맞는 답이라는 게 있고, 그것을 찾아가는 게 맞는가 싶다가도, 남편이 생각하는 정답에 내가 맞춰갈 때 남편은 '나라는 남자, 나의 선의'를 아내가 봐준다고 생각하리라는 결론에 도달하니 말이다.(아 왠지 또 내가 진 거 같은데?)
그래서 오늘의 깨달음은 네 글자로 결론짓고 마무리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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