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고기 잡아주려 하지 말고
수치심, 죄책감에 관심이 많다.
나에게 중요한 감정이기에...
어느 책에서도 읽었다.
수치심은 폭력을 부르는 감정이란다.
사람들은 수치심 때문에 참을 수 없이 고통스러울 때 자기 안에 있는 수치심을 남한테 떠넘겨서 수치심에서 벗어나려고 폭력을 쓴다고
그런데 살아보니 수치심은 누가 준다고 해서
그것을 모두가 꼭 다 받는 것은 아닌 듯하다.
혹은 누가 안 준다고 해서 못(?) 받는 것도 아닌 듯하고.
개인의 기질이랄까 성품 같은 것이 작용을 하는 것 같다.
나는 내가 아는 것보다,
우리 부모님께서 아는 것보다
좀 더 예민한 아이였고
많은 감정을 스스로에게 가져가서
죄책감, 수치심으로 소화시킨 것 같다.
그래서인지
정작 내 아이는 괜찮을지 몰라도
내 아이가 겪게 될지 모를 수치심도
나에게 두려움으로 다가왔다.
그런데 오늘 아이 학교 어머니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다시 한번 탁 무릎을 치는 부분이 있었다.
결국 나는 아이들을 수치심이나 죄책감으로부터 완벽하게 보호할 수가 없다.
그것이 아이의 기질 때문이든
혹은 알아차리지 못해서 내가 주게 되든
아이 주변 사람의 영향이든
어느 순간에는 아이가 수치심이나 죄책감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내가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없는 것.
그리고 통제하려 할수록 더 매몰된다는 것.
그게 삶이라는 걸 어렴풋이 알기 때문에~
그러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이들의 수치심이나 죄책감에 충분히 공감하는 것뿐일 것이다.
그리고 그 감정을 다루는 방법을 자꾸 보여주고 들려주는 것.
나는 내가 다른 이의 말하는 방식에 대해 '수치심을 갖게 한다, 죄책감을 갖게 한다'라고 판단하는 데에 초점을 두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면서 최근 한 동안을
아이를 공감하고 사랑할 힘으로
그 사람을 비난하는 데에 쓴 것 같다.
깨닫고 알아차리게 되어 감사하다.
나에게 여유의 틈이 조금 생긴다.
+
두려움은 배움과 함께 할 수 없다는 것
아이들은 안전함 안에서만 배운다는 것
그리고 그 안전은 소속감과 유대감에서 온다는 것
둘째 아이가 어린이집을 옮긴 뒤
나는 나와 아이의 소속감과 유대감을 너무나 원했고
그것이 안전을 위해서였음을 알았다.
성장과 배움이 중요한 나는
안전 역시 매우 중요한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