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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달빛 Jul 19. 2023

잔소리보다 공감

느낌

​​​​​​​


늦은 저녁


준이 필통을 챙겨주다가 갑자기 울화통이 터졌다. 며칠 전 나는 새 연필 두 자루를 정성껏 깎고 이름까지 써서 준이 필통에 예쁘게 넣어두었다, 그 며칠 전에도 같은 일을 했고. 그런데 고작 하루 지났는데 두 자루를 모두 잃어버리고는 예전에 거의 다 써서 몽당연필이 된 걸 어디서 찾아와서는 그걸로 일기를 쓰고 있었다.

다짜고짜 내 입에서 차갑게 튀어나간 말.


“너는 왜 네 물건을 소중하게 안 다뤄?“

“.... 뭐가아?“


억울함이 잔뜩 묻어있다.

뭐가긴 갑갑함에 하소연을 쏟아내는 나.


“대체 왜 그러는 거야? 가방도 놓고 올 때 많고, 지우개는 하루가 멀다 하고 잃어버리잖아.”


“언제에? 안 잃어버릴 때도 있어!”


준이도 말끝이 높아진다.


“너는 네 물건 소중한 줄을 몰라!”


키커볼이 생각났다.


소공원에서 만난 형아들이 축구를 하고 싶어 해서 자기가 갖고 놀던 공을 빌려주면서 다 쓰고 집 앞에 놓아달라 했단다. 그때는 나도 잘했다고 말했었다. 그렇게 나눌 수 있고 양보할 수 있어서 더불어 사는 걸 배운 거 같다고.


그런데 형들이 며칠 뒤 와서는 공이 고장 났다(?)고 했단다. 다음날은 공을 사준다고 했단다. 다음날은 또 공에 바람 넣어보고 고쳐지면 준다고 했다고... 내가 의아했던 것은 그 이야기를 내게 전달하는 준이에게서 아쉬움이나 속상함은 찾아볼 수가 없다는 점이었다.


그게 왜 내게 자극이 되는지 생각해 보았다. 나는 준이가 자기 물건을 잘 챙길 수 있도록 키우는 게 중요한가? 내가 어릴 때(뭐 지금도 가끔...) 그걸 너무 못했는데 그때를 떠올리면 아쉬울 때가 있는데, 준이가 그런 아쉬움을 덜 겪었으면 하는 마음이 큰가?

‘또 사면 돼! 00원밖에 안 해’

이런 말도 정말 싫고...


작은 물건이라도 감사할 줄 알고 아껴 쓰고, 끝까지 쓰고, 잘 챙겼으면 하는 마음 때문인가? 그렇게 하면 뭐가 좋을까? 주어진 것에 감사할 줄 알고, 작은 것을 아끼고 소중히 대하는 삶. 그런 삶을 준이가 살 수 있다면? 음... 더 쉽고 빠르게, 그리고 자주, 많이 가지지 않아도... 행복을 경험할 수 있을 거 같다.

결국 준이의 행복...

준이가 편안하고 자유로운 삶을 살기 원하고, 거기에 엄마로서 기여하고 싶은 마음이 크기 때문인가...


하지만 말은 이렇게 우아하게 나가지 않았다.


“그 키커볼, 공도 봐~ 형아들 이야기만 전달하고 너는 그 공에 대해 아무 생각이 없잖아. 아직도 그 공을 어떡할지 모르고. 엄마는 답답하다. 준이 네가 그 공이 소중하다고 생각한다면 형아들과 이야기해서 어떻게 처리하면 좋을지 챙길 수 있어야지!”


“가서 이야기했어!”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공을 찾아와야지!”


​오노! 말하다가 멈춰야 한다고 생각했다, 다행이다. 씨러닝에서 배운 ‘지금 도와주세요’ 전략이 떠올랐다. 호흡하면서 열 세기.

하나 둘 셋 넷.... 열


​“준아, 엄마가 준이보다 키도 크고 힘도 센데 크게 무섭게 말해서 미안해. 강한 사람일수록 더 부드럽고 작게 말해야 하는데, 엄마가 잘 안 될 때가 있어. 정말 미안해. 더 노력할게. 우리 손잡고 말해도 돼?”


“싫어!”


​단칼에 거절.


“알았어. 그럼 손은 잡지 않을게. 지금은 어떤지 말해줄 수 있어?”


“뭐를 말하면 돼?”


“아무 말이나 준이한테 지금 있는 거. 느낌도 좋고 어떤 생각이 떠오르면 그것도 좋고.”


“공을 뻥 차는 생각.”


“그러니 어때?”


“발이 막 저절로 움직이는 거 같아.”


“공 찬다고 생각하면 신나지! 발 움직이지!”


이제 나는 내 마음을 설명하고 싶었다. 공이 소중하다고 말할 타이밍인 거 같아서... 그 뒤에 준이 느낌을 들어보기로 했다.


“준아, 엄마가 말이 길어지고 목소리가 커지는 건 엄마가 고통을 겪고 있다는 뜻이야. 그럴 때는 도움이 필요하다는 말로 들어주면 좋을 거 같아. 준이가 잘못해서가 아니라 엄마한테 그게 너무 소중한 건가 보다~ 그렇게 생각해 주면 고마울 거 같아. 엄마는 아쉽지만 아직도 자꾸 화내면서 말하는 게 제일 좋은 방법이라 알고 있는 거 같아. 더 노력할게. 정말 미안해. 부드럽게 다정하게 말하도록 노력할 거야. 진짜 미안해.”


“..... 어.”


“궁금한 게 있어. 준아, 그 공이 터져서 바람 다 빠지고 망가진 걸 봤을 때.... 그때 준이는 어땠어?”


잠시 동안 조용하던 준이가 짬을 뒀다 말했다.


“슬프고... 어... 화가 났어.”


갑자기 준이는 이불에 얼굴을 묻었다.


“엥? 울어?”


​보니까 이불로 연신 눈을 찍었다. 나는 준이를 안았다.


“준이에게 그 공이 소중하지 않은 게 아니었구나. 그 공 가지고 놀 때 엄청 재미있었지? 아빠랑 놀 때랑 엄마랑 놀 때랑. 그 공 이렇게 찼는데 자꾸 휘어져서 곤란할 때도 있었잖아. 그 공을 차서 골인된 적도 있었지? 그 공을 다른 사람이 찬 걸 막아서 기분 좋을 때도 있었고. 그 키커볼이랑 진짜 즐거웠어. 준이 그 공 좋아했어?”


준이는 계속 울었다. 안쓰럽기도 하고, 자기 마음을 만나는 모습이 놀랍기도 하면서 감사한 마음도 들었다.


​“그래~ 나에게 소중했던 것과 이별할 때는 많이 슬프고 눈물이 나. 정말 그래... 그런데 생각해 보면 헤어짐이 슬프다는 건 기쁨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물건이 나에게 소중했다는 거거든. 나에게 기쁨을 주었기 때문에 떠날 때 슬픈 거야. 사람과 이별할 때도 그렇거든. 누가 멀리 떠날 때 슬프면 그 사람과 행복했던 거, 기뻤던 거에 감사할 수 있으면 좋겠지. 슬픔은 그전에 기쁨이 있었다는 거라면 준이도 그 공과 기쁨이 있었던 거를 알겠다. 그때 생각하면서 우리 충분히 슬퍼하자. 그게 좀 어려운 말로 ‘애도’라고 해. 잘 보내준다는 거야.”


​꽤 오랫동안 손바닥으로 눈물을 닦아내는 준이


​“준아, 엄마도 그 공이 소중한데, 엄마에게 그 공이 중요한 건, 준이 마음이 중요하기 때문이야. 형아들에게 가서 준이 마음을 말하면 좋겠어. 나는 그 공을 엄청 좋아했고, 그 공이 있어서 즐겁게 놀 수 있었다고. 그리고 형들도 그 공 갖고 재미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빌려주었다고. 그래서 형들이 그 공을 나에게 되돌려준다 했던 약속을 지키면 좋겠다고. 엄마 말 들으니 어때? 가서 말할 수 있을 거 같아?”


준이가 하는 말에 다시 한번 놀랐다. 망설이면서도 또렷하게 말했다.


​“어... 공을 위해서는 말할 수 있을 거 같아.”


​‘공을 위해서는...’

내 마음에서도 뭔가가 따뜻하게 내려가는 느낌이 들었다.


사실 준이 아버지는 준이에게 키커볼을 다시 사주겠다고 했단다. 그것도 해결방법이다. 하지만 내가 준이에게 알려주고 싶은 해결방식은 다르다. 내일 형아들과 이야기한 뒤 준이와 또 나눠봐야지.


- 내 것은 작은 물건일지라도 나에게는 소중하고 그것에 감사해요. 그리고 나에게 소중한 것은 당신도 소중히 대해주기를 바라요 -


나는 준이가 이 말을 이해하고 할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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