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단상

두쫀쿠가 알려준 것

줄을 서기 전에

by 오달빛


중학교 시절, 온 교실이 서태지의 '난 알아요'에 열광할 때 나는 홀로 가수 김국환을 좋아했다. 유행에 휩쓸리지 않는 고고함이었을까, 대세를 따라갈 용기가 없던 소심함이었을까. 그랬던 내가 서른 해가 지나, 이름도 낯선 '두바이 쫀득 쿠키' 앞에 줄을 서게 된 일이 있었다.


사건의 시작은 매운 쌀국수였다. 오랜만에 매운 것을 먹어서인지 반도 비우지 못하고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속쓰림을 달랠 무언가가 절실해서, 오가며 눈여겨보았던 빵집에 들어섰다. 문 앞부터 계산대까지 줄이 구불구불 이어졌다.

"무슨 줄이 저렇게 길지?"

나는 그 줄 끝에 몸을 이었다. 속을 달랠 단것이 필요했고, 이 줄 끝에 그게 있을 거 같았다. 줄이 줄어들수록 기대가 커졌다. '두.쫀.쿠, 1인 2개 제한'이라는 안내문이 눈에 들어왔다. 그 문구를 보자 갑자기 불안이 스쳤다. '뭔지 몰라도 내 차례 전에 다 팔리면 아쉬울 것 같은데.'


다행히 내게도 기회는 왔고, 나는 남들처럼 외쳤다.

"두 개요!"

설레면서도 살짝 수줍은 마음으로 봉투를 받았다. 이 긴 줄의 보상이 무엇인지 확인하기도 전에, 나는 봉투에서 한 개를 꺼내 탁자 위에 올려놓고 일단 사진부터 찍었다. 기록이자 증거. '나도 얻었다'는 표식 같은 것. 성취감과 안도감이 동시에 밀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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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리에 앉아 두쫀쿠를 검색했다. '두바이 쫀득 쿠키'. 흘깃 계산대를 보니 두쫀쿠는 증발하는 기체처럼 팔려나갔다. 검색 결과 엄청 유명하고, 비싸고, 구하기 어려운 것임을 알았다. 운이 이렇게나 좋은 나는, 맛을 보기 전 그 순간을 만끽하기 위해 후기들도 뒤적였다. 그런데 기대와 달리 내가 본 후기들은 대부분 이랬다.

"왜 난리인지 모르겠지만 일단 샀다."

"먹어보니 별거 없네요."


압권은 이 댓글이었다.

"많이 팔고 싶으면 설탕을 칠 게 아니라 ‘난리’를 쳐야 하는구나."

그 ‘난리’에 기꺼이 동참했던 나도 이 댓글에 웃음이 터졌다. 그 난리는 '정체 모를 불안을 잠재우는 일종의 의식'이었을지도 모른다. 소외되지 않고 가는 안도감, 지금 이 시대를 함께 통과하고 있다는 연결감을 비는.

사람은 본디 혼자일 수 없기에, 어딘가에 속하고 싶어 하는 마음은 생존을 위한 본능이자 다정한 신호다. 문제는 이 연결의 허기가 내 안을 조급하게 만들 때다.



며칠 뒤, 집 거실에서 내 마음에 다른 줄이 나타났다.

방과 후에 친구랑 놀다 온다던 초등학생 아이가 뜻밖에 일찍 들어오며 말했다. "엄마, 00는 수영장 가고, 00이는 드럼 배우러 가고, 다들 어디 가야 한대. 못 놀아서 왔어."

엄마인 나는 먼저 마음이 바빠졌다. 짠함과 조급함이 한꺼번에 밀려들었다.

'무엇이라도 시켜야 하나.'

친구들이 한다는 수영, 악기, 내가 도울 수 있는 공부 같은 것들이 머릿속에서 줄을 만들어갔다. "친구 하는 수영이나 드럼 너도 할래?"라는 말이 입 밖으로 나올 뻔했다. 아이에게 묻는 말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내 불안을 달래려는 질문이었을 거다.



신학기가 되면 아이들은 고민하게 될 것이다. 누구와 밥을 먹을지, 어느 무리에 속할지, 말 한마디를 어디에 걸어야 할지. 고등학교의 3월은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어느 학원에 갈까, 무엇을 더 해야 할까"

이런 고민이 교실에 들어오고, 교실 안 아이들 마음에도 서야 할 줄이 또 하나 생긴다.

고등학교 교실에서 만나는 아이들은 이미 너무 긴 줄을 서느라 지쳐 있다. 남들이 서 있는 줄에서 이탈하면 낙오자가 된다는 공포를 배운 아이들. 거실에 앉아 두쫀쿠 후기와 학생들의 눈동자를 떠올리며 나는 나 자신에게 물었다. '이 불안한 줄 서기는 언제부터 시작된 걸까.'



놀 친구 없다고 일찍 들어와서 거실에 앉아 있는 아이를 보며 깨달았다. ‘내 아이가 혹은 내가 의미 없는 존재가 되지 않을까, 내가 잘못 선택해 아이를 뒤처지게 하는 건 아닐까.’ 이 마음들이 나를 긴 줄 뒤에 몸을 붙이게 했음을. 아이의 행복을 보며 엄마로서의 효능감을 느끼고 싶고, '잘 키우고 있다'는 안심도 얻고 싶었을 것이다. 불안에 휘둘려 줄을 서려는 마음조차 결국은 아이를 지키고 싶어 하는 나의 사랑임을 알았다. 존재를 지키고, 그 존재가 행복하고 편안하기를 바라는 사랑. 그 본심을 확인하니 비로소 내 안의 ‘난리’가 잦아들었다.



그래서 줄을 서는 나를 탓하기보다는 한 문장을 휴대폰에 메모해 두기로 했다. 이 문장이 내가 불안에 끌려가지 않도록 나를 붙잡아 주는 손이 되기를 바라면서.


"아무도 이 줄에 서 있지 않아도 나는 이 줄에 설 것인가?"


이 문장을 생각하면 줄이 달라 보인다. 어떤 줄은 그대로 서고 싶어지고, 어떤 줄은 한 걸음 물러서도 괜찮아진다. "다들 하니까"라는 말도 조금은 약해진다. 아무도 서 있지 않아도 내가 서고 싶다면 자연스럽게 그 이유가 떠오른다. 왜 서 있는지를 내가 알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면 줄에 선 시간은 내 것이 된다. 설령 내가 원하던 것을 얻지 못한다 해도, 내가 무엇을 원했는지는 남는다.


나는 다시 두쫀쿠 사진을 들여다보았다. ‘1인 2개 제한’이라는 문구 앞에서, 길게 남은 줄을 보며 스쳤던 불안을 안아보았다. 3월의 거실에서도, 3월의 교실에서도 그 불안은 자주 모습을 바꾸어 나타날 것이다.


거실에 앉아 있던 아이가 일어서더니 줄넘기를 들고 나갔다. 2층 창문을 열고 얼굴을 내밀어 보니 나를 발견한 아이가 소리쳤다. “엄마, 나 쌩쌩이 연달아 세 번 했어!” 시무룩하던 표정은 온데간데없고 생동감 넘치는 얼굴로 환하게 웃고 있는 아이. 아이의 발밑에서 줄이 바닥을 치며 ‘탁, 탁, 탁’ 경쾌한 소리를 낸다. 줄에 걸려도 계속 다시 뛰는 모습을 보며, 내가 불안으로 꼬아 만든 줄을 아이가 가뿐하게 넘는 상상을 했다.


나는 눈이 마주친 아이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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