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생활은 목표가 아니다. 꿈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자 과정일 뿐이다.
전 세계를 누비는 멋진 비즈니스맨의 모습을 꿈꿨다. 구김 없는 수트, 잘 다려진 셔츠를 갖춰 입고, 불철주야 사무실을 지키며 회사의 미래를 고민하고, 위기를 돌파할 수 있는 사업전략을 수립하는 전도유망한 샐러리맨의 모습을 말이다.
실제로 불철주야 사무실을 지키고, 정갈한 수트를 차려입고 출근하는 모습은 현실이 되었다. 하지만, 지금은 이 현실이 꿈이길 바라며 현실을 부정하고 있다. 12년의 치열한 입시 전쟁, 7년의 대학생활 내내 준비하며 꿈꿨던 나의 목표가 허상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순간의 허망함은 회사생활을 경험한 대부분이 공감할 것이다.
서울 한복판 최고 노른자 땅에 위치한 본사 건물, 축구장 몇 배 크기의 초대형 플랫폼을 생산하는 공장, 그리고 매달 일정한 날짜에 꽂히는 큰 액수의 월급은 내 인생 제 2막이 열리고 있다는 설레임을 갖고 착각에 빠져 들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잔뜩 힘이 들어 있던 내 눈빛, 내 어깨, 내 지갑은 해를 거듭할수록 힘을 잃었고, 그제서야 조금씩 현실이 보이기 시작했다.
문제는, 해를 거듭할수록 회사의 시스템은 내 이성을 빠른 속도로 장악했고 통제하고 있다는 것이다. 맹목적인 야근 강요, 일방적인 업무 지시, 반복적인 회식과 술을 강권하는 분위기까지 꿈꾸던 이상은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가오는 월급날만 고대하며 하루 하루 인내하며 생존하는 모습은 파블로프의 개와 다를 바가 없었다.
어릴 적부터 쇠사슬에 묶여 자란 코끼리는 쇠사슬이 없어도 우리를 벗어나지 않는다. 이 시대 한국에서 직장생활을 하고 있는 샐러리맨들의 모습이다. 이젠 회사에서 놓아줘도 마음껏 떠날 수 없는 초라한 신세가 되어 버렸다. 회사에서 지금 나가면 돈 더 챙겨줄게!라며 선심을 써도 꿈쩍도 않는다. 새로운 시작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던 회사는, 입사와 동시에 내 인생에 마침표를 찍었고, 그 잉크는 지금도 빠른 속도로 굳어가고 있다.
어려서부터 내 장래희망은 경영인, CEO였다. 대학교 학부 때도 나의 목표는 변함이 없었고, 막연하게 명망 높은 대기업에 입사해 요직에서 남다른 능력을 인정 받으며 승승장구하겠다고 생각했다. 무슨 일을 맡든 잘할 자신이 있었고,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승부욕도 있었다. (재밋는 사실은, 나뿐만 아니라 자신의 재능과 능력에 대한 확신을 갖고, 취업 후 성공적인 회사생활을 꿈꾸는 이들이 상당하다는 점이다.)
취업을 하게 된다면 전략, 기획과 같은 핵심부서에서 일을 시작하고 싶었다. 그래야만 사내 핵심 부서에서 빠르게 인정받고, Fast Track을 통해 고속 승진할 수 있는 기회도 얻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좀 더 솔직해지자면, 모두가 선망하는 끝발 있고, 잘 나가는 부서에서 승승장구하고 싶었다. 스스로를 특별하다고 생각했고, 사회적 시선에 맘껏 취해 있었다. 그렇게 나는 처음 취업시장에 뛰어 들었을 때부터 공격적으로 전략, 기획, 해외영업 직군에 지원했다.
비록 최고로 가고 싶었고, 모두가 최고로 치는 회사, 직군으로의 최종입사는 좌절당했지만 모두가 부러워 할만한 named 글로벌 제조기업의 해외영업에서 첫 발을 뗄 수 있었다. 대기업 하나를 사고 팔 수 있을만한 액수의 견적을 직접 담당했고, 수없이 국내외로 출장을 다니며 글로벌 기업의 고위임원, 실무진들과 마주했고, 조 단위가 넘는 금액의 프로젝트를 수주하는 영광도 안을 수 있었다. 비루한 영어 실력이었지만 동년배 친구들이 누릴 수 없었던 값진 경험과 내공을 쌓을 수 있었다.
However, 실력과 경력이 쌓일수록 next에 대한 확신은 줄어들었다. 이제서야 제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들어보지만, 내가 선택할 수 있는 next 선택지는 '남느냐, 나가느냐' 두 가지 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어떤 산업, 어떤 회사, 어떤 직무를 고를까 고민했던 불과 몇 년 전의 상황이 오히려 꿈같은 일이 되어 버렸다. 난 이미 회사에서 주는 월급의 맛에 취해 오매불망 다음 달 월급 날만 기다리는 선택지 없는 샐러리맨이 되어 있었다.
청년들의 문제는 아니었다. 맹목적으로 대기업으로의 취업, 안정적인 직장에서의 삶을 좇을 수 밖에 없도록 강제하는 사회구조의 문제이다. 회사에서 자아실현을 이루고, 커리어를 쌓아 자신의 분야에서 최고가 되기를 꿈꾸는 청년들의 생각이 잘못된 것이 아니다. 독창적이고, 진취적인 사고를 가진 인재들마저 조직의 hierarchy에 굴복하고 순응할 수 밖에 없도록 만드는 대한민국 기업의 구조적인 문제이다. 뒤늦게 현실을 직시하고, 자신만의 길을 걷고자 하지만 섣불리 용기를 내지 못하는 청년들의 잘못만은 아니다. 청년들이 가슴에 품었던 부푼 꿈과 넘치는 패기를 앗아가고, 짜여진 체제에 순응하고 벗어날 수 없도록 설계된 잔인한 사회와 기업들의 문제다.
짧다면 짧은 시간이지만 한 달을 1년처럼 보냈던 밀도 있는 회사생활을 통해 한 회사의 흥망성쇠를 직접 목격할 수 있었다. 대한민국 대기업들의 조직문화는 미래 대한민국 경제, 기업 성장의 원동력인 청년들의 꿈과 잠재력을 빼앗아 혁신없는 양적 성장만을 추구하고 있다. 거대 조직이 불가피하게 수반하는 비효율, 부조리가 있음에는 통감하지만 이는 소위 꼰대들이 기존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변명거리에 불과할 뿐이다.
유독 대한민국에서만 이런 상황이 흔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대한민국 경제는 현재 극심한 성장 정체를 겪고 있다. 알맹이는 없는 껍데기 창조경제만을 외치고 있다. 대기업들만 생존하는 비정상적인 생태계가 조성되고, 그렇게 기업 생태계는 균형을 잃어가며 대기업들의 밥그릇 마저 위협하고 있다. 분명 문제가 있다. 우리 사회, 그리고 회사가 바뀌지 않는다면, 대한민국에 미래는 없다.
청년들에게 입사와 회사생활이 목표가 되어서는 안된다. 꿈을 펼칠 수 있는 기회이자 수단, 과정으로 바라볼 수 있는 이성과 냉철함을 지녀야만 한다. 정신 없는 회사생활 도중 문득 정신이 번쩍 들었을 때는 이미 너무 늦다.
Ohm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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