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존재한다. 고로 야근한다.

며느리도, 시어머니도 모르는 풀리지 않는 한국사회의 미스터리.

by Ohms

1940년 10월, 미국 버지니아 해군기지에서 출발한 브레이크 호가 출항 후 연락이 끊겨 실종된 지 4시간 만에 모습을 드러냈고, 하루도 채 지나지 않았던 해프닝이었지만 발견된 배의 선체는 심하게 낡아 있었고, 선장을 포함한 45명의 선원들 모두 백골의 미라로 발견되었다. 이 사건은 현재까지도 일반적인 상식과 과학적 이론으로는 도무지 설명할 수 없는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고 한다.

회사를 다니다보면 세계 7대 불가사의에 버금가는 미스터리들이 수도 없이 존재한다. 물론, '전형적인 한국형 기업'에 해당하는 미스터리들이다. 그리고, 대한민국의 수많은 청년들은 한국 기업 내에 깊숙이 뿌리 내린 미스터리들을 직접 체험하기 위해 죽기 살기로 취업 전선에 뛰어들고 있다. 회사로 먼저 팔려간 모든 선배들이 입을 모아 'Here is no 답' 이라고 외치지만 내 눈으로 보기 전까진 믿을 수 없는 게 바로 사람의 마음인 것.

여러 미스터리들 중에서도 '야근'은, 수많은 직장인들이 투쟁을 벌이고, 변화를 위한 온갖 시도를 펼쳤음에도 불구하고, 결국에는 모든 직장인들이 받아 들일 수 밖에 없는 불가사이한 미스터리 중 하나이다.




내가 야근이라는 미스터리를 직접 체험하는 데까지는 입사 후 2주의 시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취업 준비는 쉽지만은 않았지만, 그래도, 내겐 자유 의지가 있었다. 내가 가고 싶은 기업을 골라 입사지원서를 작성할 수 있었고, 여러 기업에 중복 합격을 했을 때에도 내게는 선택권이 존재했다. 하지만, 입사와 함께 나의 자유의지는 강탈 당했고, 심지어 퇴장 조차 내 자유의지의 영역을 벗어나는 상황이 되었다.


회사 규정 상 퇴근 시간은 오후 6시, 이미 오후 6시를 훌쩍 넘긴 6시 반이지만 모두가 자리를 지키고 있다. 어찌된 일인지 옆의 사수, 주변의 선배들의 뒤통수를 흘겨 보아도 퇴근에 대한 의지를 찾아 볼 수 없다. 너무들 익숙해 보여서 소름이 돋는다. 더 큰 문제는, 나는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없다는 것이다. 아무리 찾아도 할 게 없다. 집에 가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은 머리 속 한가득이지만 입은 커녕 발걸음도 떨어지지 않는다.


마치, 한창 절정에 치닫고 있는 영화관 한 가운데 앉아 소름돋게 따분한 영화를 관람하고 있는 느낌이다. 당장이라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고 싶지만 괜히 일어났다가 옆 사람들한테 뺨이라도 맞을 분위기라 일어날 용기조차 내지 못한다.


우선은 좀 더 분위기를 지켜보기로 결정한다. 잠시 후 부서의 실질적인 리더인 부장님이 자리에서 일어난다! 드디어, 퇴근이라는 단어를 입 밖에 낼 수 있는 실낱 같은 희망이 보인다. 그런데.. "자, 밥 먹으러 가자" 와우, 한참 동안 자리에서 뭉개다 일어난 부장님의 이 한 마디가 너무 자연스러워서 소름이 돋았다. 부장이 자리를 박차고 나가자 부서원들은 자연스럽게 2열 종대에 맞춰 부장의 뒤를 따르며 사무실을 퇴장한다. 언감생심, 퇴근의 ㅌ이라도 벙긋할 작은 틈 조차 없었다.


식사를 마치고 7시가 살짝 넘어 다시 자리로 돌아온다. 자리로 돌아왔지만 바뀐 것은 없다. 여전히 나는 할 일이 없고, 지금 퇴근해도 팀의 전력에 0%도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상식적으로 생각했을 때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 상황이 펼쳐지고 있었다. 회사에서는 '상식'이 통용되지 않는 다는 사실을 그 때는 미처 몰랐던 것 같다. 회사는 분명 상식적인 사람들이 모인 곳이지만 회사가 점점 더 커지고, 많은 사람들이 모일수록 비상식적인 요소는 제곱의 반비례 속도로 증가한다.

처음에는 분노가 치밀었다. 내 머리 속의 상식은 끊임없이 회사의 비상식과 투쟁을 벌였지만 보이지 않는 벽에 부딪히며 차츰 굴복할 수 밖에 없었다. 매일 밤 9시, 10시가 되면, '내가 지금 일도 없는데 왜 여기 앉아서 이러고 있는 거지'라는 생각 때문에 화가 치밀어 올라 얼굴이 울그락 불그락 해지기 일쑤였다. 보통 12시를 넘겨 막차가 끊겨야 퇴근을 했고, 한 달 택시비만 20-30만원 사이를 왔다갔다 했으니 말 다했다. 당연히, 다음 날은 8시까지 정상 출근이다. '이건 미친 짓이야'

어느 날 저녁, 치밀어 오르는 화를 도저히 참을 수 없어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부장님께 향했다. "부장님, 저 혹시 퇴근해도 되겠습니까?" 라고 용기 내어 한 마디를 던졌다. 그 때 부장의 표정은 정확히 '너 뭥미?'였다. "일 없어?", "아.. 그건 아닌데", "다 바쁜 거 안 보여?", 이것으로 상황이 종결되고 나는 다시 뒤로 돌아 자리에 앉아 핸드폰을 꺼냈다. '야 나 못가. 미안하다. 진짜 가고 싶었는데. 진짜 아.. 나도 너무 화가 난다. 미안하다..' 그리고, 이 같은 상황은 그 뒤로도 계속이어졌다. 난 그렇게, 수십 번의 약속을 취소했고, 어느 순간부터는 아예 약속 자체를 잡지 않았다.


상황을 바꿔보자는 생각으로 사수의 잡일, 부서의 잡일을 분담해서 처리해 보고자 했다. 빠른 속도로 엑셀, 문서를 정리하고 보고를 올리면, 정말 신기하게 그 만큼의 새로운 잡일이 주어진다. 음? 조금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지만 다시 힘을 내서 빠른 속도로 처리한다. 음..? 그렇게 나는 자연스럽게, 신속하게 야근 대열에 합류하게 되었고, 분명히 일을 분담하고자 노력했지만 퇴근 시간은 전혀 당겨지지 않고, 퇴근 시간은 바뀌지 않고 이전과 동일했다.

이상하게 한국 회사는 의리를 강조한다. 우리 가족아이가!! 가족들이 앉아서 일하는데 혼자 집에 가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참, 가--족같은 기업이다. 결국 나는 내게 남아 있던 약간의 자유(?)를 굳이 소진해서 야근 지옥에 자진 입장한 꼴만 되었다. 그야 말로, 자살각. 그냥 깝치지 말고 앉아 있어야 했다. 그랬어야만 했다.




밤 11시, 옆 부서에 앉아 있는 동기한테 물었다. "왜 안 가? 일 많아?", "아니 그건 아닌데", "그럼, 언제 가?", "몰라 나도", "그래? 나도!" 그렇게, 우리는 수많은 날들을 이유도 모른 채로 야근을 해야 했다. 신기한건 앉아만 있어도 야근 수당을 준다는 사실이다. 회사 돈을 날로 먹는 건 아닌가라고 생각했지만, 그건 아니다. 난 분명히 집에 가고 싶었지만 회사님께서 원하지 않으셨다. 난 그의 명을 따랐을 뿐이다. Yes, my lord... 누구나 같은 생각일 것이다. '야근비 안 받아도 좋으니까 집에만 보내다오. 제발.'

물론, 일이 정말 많아서 야근을 하는 날도 많았다. 하지만, 굳이 그렇게까지 심하게 야근을 하지 않았어도 된다. 적어도, 더 일찍 퇴근할 수는 있었다고 확신한다. 이건 팩트다. 다만, 조직 내에 존재하는 비효율, 불합리, 부조리한 상황들 때문에 야근은 개선되지 않고 반복될 뿐이었다. For example, 담배타임.., 보고타임.., 담배타임.., 보고타임.., 담배타임.., 보고타임...

결국, 나도, 신입 직원들도 이 상황이 바뀌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야근에 순응한다. 일반적인 상식으로도, 과학적으로도 설명되지 않는 미스터리와 맞서 싸울수록 제 풀에 지쳐 나가 떨어지는 건 직원들 본인이었다. 한 시, 한 날이라도 빨리 현실을 받아 들이는 것이 정신건강에 좋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직원들은 굳이 열일해서 시간 내에 업무를 마치려고 하지 않으며, 휴식 시간도 없이 강도 높은 업무를 하려고 하지 않는다. 정해진 업무를 최대한 효율적으로 처리하고 가는 것이 아니라 정해진 퇴근 시간까지 할 수 있는 만큼만 하다가 퇴근하는 상황이 반복된다. 생산성은 떨어지고, 야근 수당은 지출되고, 직원들은 Performance 향상에 대한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악순환은 이어지고, 고리는 끊을 수 없다. 이것이 바로 무시무시한 사내 미스터리 중 하나인 야근이다.



나는 존재한다. 고로 야근한다.
어퇴정. 차피 근 시간은 해져 있다. 발버둥치지 말고 받아 들일지어다... 직딩들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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