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 또 보고, 다시 보고 또 보고
우리 회사의 정규 출근 시간은 8시, 그리고 내가 사무실 자리에 앉는 시간도 8시.
매일 새벽에 퇴근하고, 그 날 아침에 다시 출근해야 하는 내게 출근시간에 있어 에누리나 흥정 따위는 없다.
출근하자마자 밤 사이 주문주들로부터 들어온 메일들을 일일이 출력하고, 내용을 파악해서 정리한다. 이걸 하는 데만 30분 가량의 시간이 소요된다. 그렇게 정리된 내용들을 사수에게 보고하고, 사수와 함께 다시 한 번 더 내용을 꼼꼼하게 살펴보며 다시 정리한다. 차장님께 내용을 들고 가려면 구체적인 내용에 대한 이해와 프로젝트 별, 이슈 별, 중요도 별로 보고 순서의 재정리도 필요하다. 어리바리, 어영부영 하다가는 욕 먹기 딱 좋다. 신속히 준비했다면 여기까지 대략 1시간 정도의 시간이 소요된다.
그렇게 사수와 함께 준비를 마치고, 서류 더미를 품에 안은 채 결연한 표정으로 차장에게 보고를 떠난다. (이 타이밍에 구름과자 타임 30분은 보너스) 9시가 훌쩍 넘은 시각에 보고가 시작되고, 연륜과 경험이 풍부한 차장은 날카로운 시선으로 꼼꼼하게 자료들을 검토하며, 폭풍코멘트를 날리기 시작한다. 1시간 동안 보고받는 자(차장)과 보고하는 자(사수와 나) 간의 숨막히는 공방전이 계속되고, 차장은 누락된 부분, 놓치고 있는 부분, 틀린 부분들을 조목조목 짚어낸다.
여기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지금 나는 일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늘 새벽 퇴근 시간과 출근 시간 사이에 있었던 일들'을 '보고'하는 중이라는 사실이다. 그렇다! 나는 아침부터 보고를 했고, 사수는 그 보고를 받고, 차장에게 다시 보고를 했다. 그리고, 이제 차장은 오전 내내 보고 받은 내용을 들고 임원 보고를 가게 될 것이다. 이건 마치 운동회의 대미를 장식하는 계주를 연상케하는 장면이 아닌가? 보고와 계주 사이에 차이가 있다면, 계주는 끝이 있지만, 보고는 '끝이 없다는 것'이다.
차장은 보고 받은 내용을 토대로 폭풍 코멘트와 함께 추가 보고서 작성을 주문한다. 임원보고를 위해 자료나 내용이 보다 명료하게 눈에 들어올 수 있도록 다듬고, 높으신 분들의 의사결정이 필요한 경우에는 각 대안 별 비교, 분석이 가능한 보고 자료를 추가로 준비해야 한다. 그렇게 차장이 임원보고에 들고 갈 내용들을 정리하고, 다듬고, 보완하다보면 오전 업무가 끝이 난다. 오전이 훅갔네? 오전 내내 뭐했지? 응, 보고보고 ^^...
차장은 그렇게 준비된 보고 내용들을 들고, 임원보고를 떠난다. 이건 마치 한 단계, 한 단계 퀘스트를 깨며 보스에게 다가가는 느낌이다. 임원보고도 Stage 별로 이사보고, 상무보고, 전무보고, 사장보고까지 다양하게 존재한다. 보고 사안의 중요도에 따라 임원보고의 레벨이 결정된다. 그래도 일반적으로는 이사, 상무보고 Stage 까지는 수시로 가게 된다. 그리고, 각 Stage 별로 버티고 있는 이들은 자신들이 먹은 짬밥의 양에 비례하는 정도로 까탈스러움을 과시한다. 차장이 이사께 보고를 마치면, 이사와 함께 상무보고를 가게 되고, 상무보고가 끝나면, 이사와 상무가 손을 잡고, 전무, 사장 보고에 들어가게 된다.
이렇게 전 임직원이 하나된 마음으로 보고를 하다보면 하루가 금세 지나간다. 차장과 이사가 보고자료들을 들고 임원실로 떠난 이후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아마 스테이지 별로 힘겨운 보고게임이 이뤄지고 있음이 분명하다. 사무실에 남겨진 나같은 짬찌들이 할 수 있는 것은 단 하나다. '보고원정대가 속히 돌아오길 바라는 것' 뿐이다. 보고원정대가 최종 보고를 받은 임원님이 하사하신 대응 전략과 지침을 갖고 돌아와야만 그 때부터 업무를 진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후후, 오늘도 제대로 된 업무는 퇴근 시간이 다 되었을 즈음에나 시작할 수 있겠지. 그리고, 하달된 업무 지침은 분명 새로운 보고를 낳을 것이다... 보고와 관련된 재밋는(?) 이야기를 하나 더 소개하자면, '줄을 잘 서야 한다'는 점이다. 무슨 소린고 하니. 아시다시피 조직은 피라미드 구조로 되어 있기 때문에, 한 명의 전무에게 보고를 하는 이사상무도 여러명, 각 이사상무에게 보고를 하는 차부장도 여러명이다. 즉, 줄을 잘못서면, 다른 차부장, 이사상무가 한 시간 내내 보고하는 동안 번호표 뽑고 대기해야 한다는 의미다. 아마, 회사에서는 줄을 잘 서야 한다는 의미가 이 말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줄을 잘못 서면 밤 11시에 퇴근할 게 2시 퇴근으로 늦춰질 수도 있다는 점 명심하자.
그렇게, 보고는 보고를 낳고, 그 보고는 또 다른 보고를 낳는다. 나는 일이 아니라 보고하러 출근한다. 아침에 집을 나설 때 하는 인사도 바꿔야 할 것 같다. '일 갔다 올게'가 아니라 "나, 보고 갔다올게!!" 로 말이다. 앞으로 기업에서는 채용공고를 낼 때에도 주요업무및 우대사항 란에 '각종 보고서 작성 능력 및 다수의 보고 경험 우대'를 추가했으면 한다.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도록.
보고는 필요하다. 중요한 업무 사안은 부서, 조직 내에서 공유되어야 마땅하고, 임원진의 의사결정이 필요한 문제의 경우 사안에 대한 면밀한 검토와 고민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불필요한 보고가 너무 많은 것이 문제이다. 불필요한 보고 자료들도 허다하다. '우선 만들어 봐'라는 식의 업무 지시 하나로 인해 보고 자료 준비 시간이 더욱 지체되고, 실제 Action이 필요한 업무에 투자되는 시간만 잡아먹는 꼴이다.
국내기업들로부터 신속한 의사결정을 찾아 볼 수 없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문제가 생기면 신속하게 대응하는 것이 아니라 신속하게 보고를 준비한다. 사건을 수습하려고 하지 않고, 보고를 준비한다. 늑장대응이라는 말이 나오는 이유는 '윗분들에게 아직 보고가 되지 않았다'는 의미이고, '윗분들로부터 업무 지시 또는 지침을 받지 못했다'라는 의미이다. 나중에 다루겠지만 누구도 책임지도 싶어하지 않는 특이한 기업문화로 인해 서로가 결정을 미루고, 사안을 설명하고 결정을 종용할 보고서 작성에만 바쁠 뿐이다.
보고에는 분명한 목적이 있다. '사안을 정리해서 공유하고, 의사결정을 내려, 일을 진행시키기 위함'이 아닌가? 하지만, 조직에서 일을 하다보면 주객이 전도되었음을 심각하게 느낀다. 항상, 일을 하는 느낌보다는 보고를 하기 위해 일을 하는 느낌이 더 크다. 악순환이 계속해서 반복된다. 야근을 하는 가장 큰 이유 중에서 바로 이 '맹목적이고 비효율적인 보고'도 큰 지분을 차지한다. 보고를 위한 보고, 보고 과정에서 생기는 수없는 time loss를 해결하는 것이 조직의 발전, 직원들의 건강한 워라벨을 위한 길이다.
아쉽게도 아직까지 대부분의 조직에서 이런 변화의 시도와 노력을 찾아보기는 어렵다. 누구도 변화를 좋아하지 않고, 기존의 체제와 방식을 유지하기 위해 온갖 힘을 쏟는다. 결국, 문제는 분명하지만 상황은 바뀌거나 해결되지 않고 반복된다. 나는, 그리고 우리는, 내일도 보고를 위해 출근한다. 내일은 부디 번호표를 잘 뽑아서 퇴근시간이 조금이나마 앞당겨지기를 바랄 뿐이다.
도르마무!!! 보고를 하러 왓다!!
Ohm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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