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회사는 체계가 너무 없다'
그래, 이직해야겠어!

이직 준비 4년 차 프로이직러의 트루 스토리

by Ohms

입사 1년 차가 되었다. 이직이라는 녀석이 불현듯 다가와 내 품에 안겼다. 회사, 환경, 사람 바뀐 것은 아무것도 없는데 입사 전까지 아방궁처럼 느껴졌던 회사가 답답한 감옥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유독 우리회사는 시스템이 없는 것 같다. 제대로 된 업무분장도 없고, 일도 주먹구구식이다. 쓸데 없는 보고로 하루 반나절을 보내고, 장평, 자간, 폰트 크기, 문장의 오와열을 집착스럽게 고집한다. 사람스러운 사람과 일을 하고 싶지만 24시간 안테나를 돌려봐도 여기가 정녕 대기업인가 싶은 사람들만 한 트럭이다. 직무적으로는 본투비 해외영업맨으로 거듭나기 위한 전문교육을 기대했지만 현실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출력, 복사, 바인딩, 그리고 팩스만을 반복했다. 그래 결심했어. 이직만이 내가 살 길이다!


글로벌 Top라는 타이틀, 청계천이 지나는 도심 한복판에 우뚝 선 삐까뻔쩍한 회사 건물, 웅장한 규모를 자랑하는 공장, 입사하기 전까지만 해도 나를 한껏 흥분시켰던 모든 것들이 내가 회사를 떠나야만 하는 이유로 둔갑한다. 혹자는 개구리가 올챙이적 생각 못한다고 질책한다. 온갖 잣대와 기준을 대어가며 엄선한 회사에 입사했고, 입사 후에는 일도 열심히 배워 전문성도 쌓아서 인정받고 싶다고 의지에 찬 눈빛을 부라리던 녀석이 바로 나란다. 맞긴 맞는데 나는 아니라고 항변한다. 내가 생각하던 회사, 환경과 너무도 다르다고.


이건 흡사, 하루에 세 번 사랑을 말하고, 여섯 번 웃고, 여덟 번의 키스를 나누며 영원의 사랑을 맹세했던 커플이 '너 변했어!', '상황이 바꼈잖아!'를 외치며 돌아서는 모습과 다를 바 없어 보인다.




오랜만에 만난 학교 동기들 앞에서 '내가 지금 회사를 떠나야만 하는 101가지 이유'를 설명한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그들은 내 한 맺힌 울분을 이해하기는 커녕 기다렸다는 듯이 각자 다니고 있는 회사의 디스를 풀기 시작한다. 술자리는 곧바로 욕배틀의 場이 되었다. '체계가 없는건 우리 회사가 명불허전이다.', '쓸데 없는 야근은 우리 회사가 제일 많다.', '나는 매일 잡일만 하고, 전문성도, 미래도 보이지 않는다.' 이게 뭐라고 자기네 회사가 제일 구리고, 자기가 제일 misery라며 목에 핏대를 세워가며 서로 우겨댄다. 금방이라도 싸울 분위기.


이직을 마음 먹은 뒤부터는 하루에도 수백 번 회사 면면의 안 좋은 부분들만 눈에 띈다. 사무실에 앉아 있는 몇 시간이 영겁의 시간처럼 느껴지고, 먹은 것도 없는데 고구마 100개가 얹혀 있는 듯한 답답함을 호소한다. '켁켁켁. 이건 다 회사 공기 때문이야.' 보통 때는 군말없이 하던 일들도 괜히 더 하기 싫고, 내성이 생긴 줄로만 알았던 상사 나부랭이들이 내 이름만 불러도 미간이 찌푸려진다. 회사, 환경, 사람 바뀐 것은 아무것도 없는데 입사 전까지 아방궁처럼 느껴졌던 회사가 답답한 감옥처럼 느껴지기 시작한 것은 오롯이 이직, 그 놈 때문이다.


이 노오오오옴!!!!




아무튼, 난 그렇게 입사 1년 차에 이직을 속에 품기 시작했다. 만나는 사람들마다 이직에 대한 강한 의지를 피력했고, 늦은 밤 회식을 마치고 귀가해도 공인 영어성적 갱신과 부수적인 자격증 취득을 위한 열정으로 새벽을 하얗게 불태웠다. 죽을 둥 살 둥 자소서를 썼고, 인적성을 보고, 온갖 창의적인 핑계를 들어 몇몇 면접을 보러 다녔다. 그렇게 이직을 준비한지 만 4년이 다 되었다. 그리고, 4년 전 이직을 결심했던 그 회사에 다니고 있다. 소오름.. 그래서, 나를 잘 아는 ㅂㄹ친구나 ㅂㄹ동기들이 나를 볼 때마다 하는 말이 있다. '옴스! 아직도 여깄어?!'


짧지 않은 기간 동안 이직을 준비는 동안 회사도 바뀌고, 사람도 바뀌고, 개인생활도 변화했다. 불지옥처럼 느껴졌던 답답한 회사가 편안하게 느껴지기도 했고, 죽도록 얄밉게만 느껴졌던 사수와의 관계도 원만해졌다. 주 3회 회식을 강요하던 임원이 퇴사할 때 우레와 같은 박수를 보내며, 기쁨의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다른 어느 곳에 가도 꼰대들은 존재하고, 비효율적이고 쓸데 없는 일들로 밤을 샌다는 얘기가 팩트임을 알게 되고, 왜 다들 다른 데 가도 크게 다를 게 없다라는 말을 하는지 세월이 지나 그 의미를 느끼게 되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는 '물에서 건져줬더니 보따리 내놓으라'는 놈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지랄같이 가고 싶다고 할 때는 언제고, 조금 다녀보고 아니다 싶으니 바로 돌아서서 응석 부리는 모습이라니.. 아마, 다른 어떤 회사에 갔더라도 아마 똑같은 이유와 핑계로 이직을 하겠다고 설레발을 쳤으리라 장담한다. 각 잡힌 체계와 업무분장, 젠틀함과 명석함까지 겸비한 선배들, 빵빵한 복지혜택과 수평적인 회사문화까지. 현실세계에 존재하지 않는 '유토피아적 회사'를 찾고자 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알고 있다. 어딜가도 어쩔 수 없는 수준의 비효율, 부조리, 비윤리, 비도덕, 무논리, 경직성, 상명하복이 상존한다는 사실을. 결국, 회바회, 팀바팀, 부바부, 사바사인 것을. 그 때의 나는 유토피아라는 천 분의 1의 확률에 사로잡혀 이성을 잃은 상태였다. 이직 이 나쁜시키.




이직에 대해 보다 객관적인 시각을 갖게 되었다. 만약 이직이 확정되서 회사를 박차고 나가 새로운 회사에 들어서는 순간 잘못됐음을 감지해도 그 땐 이미 늦는다. 똥인 줄 알고 버린 패가 쌍똥피였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아차렸어도 이미 낙장불입이다. 지금 있는 회사가 너무 싫어서 도피하듯 하는 이직은 결국 또 다른 이직을 부를 뿐이고, 최악의 수를 두게 만든다. 어떻게든 이 곳을 떠나고 싶어서가 아니라, 구체적으로 이 곳보다 A, B, C는 낫고, D, E, F는 버릴 수 있는 곳에 가겠다는 구체적인 기준과 목표가 필요하다.


그래서 나는 아직도 4년 째 이직을 준비 중이다. 이직을 결심했던 입사 1년 차 시절부터 만으로 3, 4년을 꽉 채운 대리였던 시절까지 숱하게 신입사원 공채에 지원했다. H사 전략팀 최종면접장까지 가서 회사로 발길을 돌리기도 했고, 생각도 없던 금융공기업 서류전형에 덜컥 합격하기도 했다. (물론, 필기시험에서 사정없이 두들겨 맞았다. 금공은 필기 준비를 해야 한다는 사실을 이 때 알았다.) 평소 드라마, 예능 덕질의 힘을 빌어 방송사 경영직 필기를 뚫어 보기도 했고, 신의 직장이라 불리우는 교직원에 지원해서 좋은 결과를 쟁취하기도 했다.


이제 내가 뱉는 '저 이직합니다'라는 멘트는 유머가 되었다. 그래도, 얻은게 있다. 이직을 시도하면서 다양한 상황과 변화를 겪으며 생각의 변화가 일었고, 다양한 산업/직종, 신입/경력을 두루 지원해 보면서, 취준생들, 후배들에게 해줄 수 있는 많은 경험과 이야기거리가 생겼다. (물론, 공짜는 없다. 먹튀로 관계를 훼손하는 이들을 세상에서 제일 싫어한다.) 앞으로도 나는 이직을 위한 준비를 멈추지 않을 것이다. 좀 더 열심히, 부지런히 이직을 위한 준비를 할 계획이다. 그리고, 이직을 꿈꾸는 직장인들, 취준생들의 멘토가 될 것이다. 나는 프로 이직러다.




Ohm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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