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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는이야기 May 10. 2016

설리의 노브라에 대한
반응에 대한 단상

[주장] 그녀가 브래지어를 입든 벗든 개인의 자유고 선택이지만

설리는 지난 7일 찍은 한 장의 사진만으로 다시 화제에 올랐다.ⓒ 설리 인스타그램

설리가 지난 7일 개인 인스타그램 계정(@jin_ri_sul)에 한 장의 사진을 올렸다. 보라색 티셔츠를 입고 정면을 응시하는 듯한 설리의 얼굴 사진에 사람들은 갑론을박했다. 이유는 단 하나. 사진 속 설리가 브래지어를 착용하고 있지 않다는 것.


이에 따른 반응은 모두 제각각이었다. 설리가 무엇을 입든 타인이 상관할 일이 아니라는 주장, 혹은 연예인으로서 행실을 조심하자는 건의. 설리의 어떤 팬은 그의 인스타그램에 댓글로 "완벽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모두 실수를 하고 그녀도 인간일 뿐이다"라며 '실수를 한' 설리를 감쌌다.


사실 설리의 사진이 실수처럼 보이진 않는다. 설리는 단 한 장의 사진만으로 많은 댓글을 달리게 하였고, 기사화 후에도 댓글로 해명하거나 사진을 삭제하는 등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고 있다. 옹호하는 이들이나 비난하는 이들에 답하는 대신 설리는 비슷한 분위기의 다른 사진을 올리는 것으로 답을 한 셈이다. 실수가 아니었다고. 혹은 상관하지 않겠다고.


설리가 어떤 생각으로 이 사진들을 올렸는지 당사자가 아닌 이상 알 수 없다. 다만 그녀의 사진을 오로지 "입고 싶은 대로 입게 내버려 둬"라는 설리의 '개인적인 자유'로만 해석하면 뭔가 놓치는 부분이 있어 보인다.


노브라가 불러온 갈등


"아내는 약간 달라붙는 검은 블라우스를 입고 있었는데, 두 개의 젖꼭지가 분명하게 윤곽을 드러내고 있었다. 의심할 바 없이, 그녀는 브래지어를 하지 않았다. 사람들의 눈을 살피려고 고개를 돌렸을 때 나는 전무 부인과 시선이 마주쳤다. 태연을 가장한 그녀의 눈이 호기심과 아연함, 약간의 주저가 어린 경멸을 드러내고 있는 것을 나는 알아보았다. 나는 뺨이 상기되는 것을 느꼈다." - 소설 <채식주의자> 중에서


한강의 소설 <채식주의자> 속 영혜는 그의 남편 말에 따르면 아주 평범한 여자다. 남편은 그녀의 과분하지 않은 평범함이 결혼하기로 한 결정적인 동기였다는 것을 고백한다. 하지만 그런 영혜에게 '유난스러운' 것이 딱 하나 있었는데, 집 안에 있을 때만이 아니라 밖에 나갈 때도 브래지어를 착용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왜 속옷을 착용하지 않느냐는 남편의 말에 그녀는 간단하게 "갑갑해서"라고 대답한다. 단순히 갑갑해서 착용하지 않은 것일 뿐인데, 브래지어를 입지 않은 그녀의 행동은 큰 갈등을 낳는다.


부부 동반으로 참석한 중요한 자리에서도 영혜는 브래지어를 착용하지 않았고, 그 자리에 참석한 사람들의 시선은 온통 영혜의 가슴으로 쏠렸다. 옷 위로 젖꼭지가 도드라진 영혜의 차림은 남자였다면 대수롭지 않게 여겨졌겠지만, 여자라는 이유로 당장 '호기심과 아연함, 약간의 주저가 어린 경멸'의 대상이 된다. 영혜는 개인의 자유를 누렸지만, 결과적으로 영혜를 바라보는 타인의 시선과 수군거림은 노브라가 그저 개인의 자유로만 해석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역사 속에서 볼 때 여성 해방의 역사는 탈의(脫衣)의 역사라고도 볼 수 있다. 한때 코르셋을 '훌륭하게 대체한다'고 여겨진 브래지어부터 허리를 조이는 치마를 벗고 입은 '블루머 바지(아멜리아 블루머라는 미국 여성이 만든 무릎길이의 헐렁한 바지)', 또한 여성이 응당해야 한다고 여겨진 모든 제도나 관습의 굴레들도 벗어버리는 '탈의'.


1960년대 여성인권 운동가들부터 2008년 타이라 뱅크스까지 수많은 여성은 브래지어를 착용하지 않은 것을 '정숙하지 못한 일'로 규정하는 사회에 공공장소에서 브래지어를 태우는 브라 버닝(Bra Burning)으로 저항했다. 노브라에는 이처럼 개인적 자유를 넘어 분명한 사회적 맥락이 존재한다.


여성이 자신의 육체를 주체로서 통제할 권리를 사회나 주변의 시선으로부터 쟁취해오는 일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남성에겐 당연히 있고 드러내도 무방한 젖꼭지나 겨드랑이털이 여성에게는 성적 대상화의 맥락에서만 소비되는 일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늘어날수록 말이다.


영화 <색, 계> 속 왕치아즈(탕웨이)가 겨드랑이털을 깎지 않은 모습으로 화면에 등장했을 때 "단정치 못하다", "섹시한 분위기에서 갑자기 겨드랑이털이라니 깬다"라며 호들갑을 떨었던 것도, 리한나가 2014년 CFDA 패션 어워드에 브래지어 없이 크리스탈 시스루 드레스를 입고 등장한 걸 두고 유난을 떠는 일 또한 줄어들 것이다.


그러니 다시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설리가 브래지어를 입든 벗든 그것은 개인의 자유이고 선택이지만, 그의 사진에 반응하는 대중들의 시선과 반응, 특히 이를 선정적으로 바라보거나 보도하는 일은 충분히 사회적으로 해석할 수 있다고. 그리고 이런 이슈에 어떻게 반응하는지가 결국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보여주게 될 것이다.




* 이 글은 <오마이스타> 유지영 기자가 쓴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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