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탄여행 ②] 그곳에 서자 행복해졌다
부탄의 수도 팀부에서 푸나카로 향했다. 푸나카는 부탄의 옛 수도로 부탄에서 가장 아름다운 종(Dzong)이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종은 종교와 행정 기능이 하나로 합해진 종합청사를 말한다.
팀부를 빠져 나온 차량은 꼬불꼬불 오르막을 올랐다. 고도가 높아지자 짙은 안개가 시야를 가렸다. 덜커덩 거리는 오르막이 끝날 때 쯤, 멀리 안개 속에서 희미하게 물체가 형체를 드러낸다.
말로만 듣던 스투파(불탑)였다. 해발 3140m에 위치한 '도출라 패스'엔 108개 스투파(불탑)가 세워져 있다. 이 불탑은 2005년 인도 반군들을 소탕한 부탄 왕이 승리를 기념하고 전쟁에서 목숨을 잃은 자들을 애도하기 위해 세웠다. 당시 4대 국왕은 몸소 7000명의 자원군을 이끌고 협상을 통해 평화적으로 전쟁을 종식시켰다. 특히 이 스투파는 당시 아군과 적군 모두를 위한 것이라고 하니 부탄사람들의 마음씀씀이가 얼마나 넓은지 가늠이 된다.
도출라 패스는 먼저 생을 마감한 이들의 넋이 펄럭이는 듯 짙은 안개가 어지러웠다. 그 사이로 힐끔힐끔 내비치는 히말라야 풍경은 가희 압권이다. 이처럼 도출라 패스는 히말라야의 절경을 감상할 수 있는 뷰포인트로도 유명하다. 커피를 한 잔 마시자는 유딘(가이드)의 제안에 도출라 패스에 있는 카페로 들어갔다. 향긋한 커피 냄새, 통유리 너머로 보이는 안개와 고목들, 그 뒤로 펼쳐지는 히말라야 산맥의 웅장함은 내겐 분명 행복이었다.
도출라 패스를 지나자 다시 꼬불꼬불 길이 이어졌다. 산을 거의 다 내려오자 하얀 안개는 황금보리 물결로 바뀌어있었다. 솝소카 마을이었다. 이곳에서 받은 점심상은 유기농 야채로 가득했다. 부탄에서 나는 야채는 대부분 무농약으로 길러진다. 최근에는 인체에 무해한 선에서 비료와 농약을 수입하기도 하는데, 농약 수입은 정부 기준을 통과한 최소한의 것만 가능하다고. 비옥한 대지와 비, 바람이 기른 야채는 입안에서 본연의 맛을 아낌없이 풀어놓는다.
점심을 먹은 뒤엔 노란 보리밭 사이를 걸어 치미라캉(Chimi Lgakhang) 사원으로 향했다. 이 절을 세운 드룩파 쿤리(디바인 매드맨)는 살아생전 술과 여자를 좋아해 현지에서 "Crazy Monk"라고 불린다. 하지만 기이한 행적에도 불구하고 많은 포교 업적으로 존경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특히 드룩바 스님이 세운 치미라캉에는 유난히 아이를 갖지 못하는 여인들이 많이 찾아온다고 한다. 자신의 성기에 스카프 걸어 다산과 행운을 빌어 줬다는 드룩바 스님의 일화는 부탄에서 무척 유명하다. 다소 외설스럽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농경사회에서 다산은 무척이나 중요한 일이었다. 이 때문에 부탄에선 아직도 전통가옥 곳곳에 남근상을 그려 놓는 풍습이 남아 있다.
다음 행선지는 푸나카 종. '종'이란 말은 부탄을 이해하는 키워드 중 하나다. 우리식으로 말하면 행정청사다. 그러나 단순히 행정기능만 하는 곳이 아니라 고승이 거주하는 불교사원과 사법부가 함께 있는 독특한 장소다. 종 내부는 크게 두 구역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행정과 사법공간은 일반인 출입이 자유롭고, 수행자들의 수행공간은 관광객 출입을 제한한다. 종이 가진 또 하나의 특징은 요새기능이다. 과거 티베트인들의 침략이 빈번했기 때문에 이에 대한 대비도 필요했다.
푸나카종은 부탄에 세워진 두 번째 종이자, 1950년대 중반까지 정부 청사 기능을 했던 곳이다. 1대 왕인 우겐 왕축이 영국의 훈장과 작위를 받은 장소다. 특히 이곳에서는 2008년도 28살의 어린 나이로 부탄 5대 국왕이 된 지그메 케사르 부탄 국왕의 결혼식이 열리기도 했다.
종 앞에서 유딘이 어깨에 띠를 걸친다. 종에 들어설 때 여자는 왼쪽 어깨에 띠를 걸치고, 남자는 가사를 둘러야 한다. 남자들의 가사 색깔은 신분을 나타내기도 하는데, 국왕은 노란색, 법왕은 초록색, 승려는 주황색, 국회의원은 파란색, 보통 사람은 흰색이다. 푸나카종은 세 개의 작은 광장타입의 안뜰을 가지고 있었다.
커다란 보리수나무가 있던 첫 번째 광장엔 행정관청사무실이 있고, 두 번째 광장엔 사원이 있다. 부탄에 있는 모든 공간들이 그렇듯 아름다운 전통 건축 양식에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세 번째 안뜰이 있는 사원에는 삽드룽(과거 부탄을 통일한 인물)의 등신불이 모셔져 있어 아무나 들어갈 수 없다고 한다.
푸나카종에선 꿈결 같기도 하고 거짓말 같기도 한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부탄 불교를 이해하기 위해선 부탄 불교의 아버지로 불리는 파드마삼바바를 빼놓을 수 없다. 그는 가장 소중한 스승'이란 뜻의 '구루 린포체'(Guru Rinpoche)로 더 잘 알려져 있는데 8세기경 부탄과 티베트에 불교를 전한 인물로, '두 번째 부처'로 숭배되는 고승이다.
이는 부처가 '파드마삼바바('연꽃에서 태어난 자'라는 의미)'란 이름으로 부활할 것이라고 말한 데서 유래한다. 불교가 부탄의 종교와 문화 전반에 중심이 된 것은 파드마삼바바의 등장 이후로 알려져 있다.
이처럼 부탄에서 가장 존경받는 파드마삼바바는 푸나카종 건설에도 영향을 미쳤다. 살아있을 때 그는 본인이 죽은 뒤 나왕 남걀(삽드룽)이라는 사람이 부탄에 올 거라고 예언했다. 남걀은 티벳에서 온 승려로, 부탄의 모든 지역을 통합해 부탄국가의 정체성을 확립한 인물이다. 훗날 지도자의 위치에 오르면서부터는 삽드룽이라는 칭호를 얻었다.
삽드룽은 1637년 이곳 푸나카로와 아버지강(포추)과 어머니강(모추)이 만나는 지점에 종(dzong)을 세우라고 명령한 뒤 건축가의 꿈속에 들어가 파드마삼바바가 머물던 성의 모습을 보여줬다. 그래서 건축가는 건축설계도면을 그리지도 않은 채 푸나카종을 완성했다고 한다.
푸나카 종을 나와 카슘 율리 남걀 초르텐으로 향했다. 1990년부터 2000년까지 목수, 화가, 조각가 등 부탄장인들이 거룩한 공간을 건설하기 위해 전력을 다한 결과, 웅장한 4층짜리 사원이 탄생했다. 부탄의 고급 건축과 예술, 전통이 한 데 어우러져있는 단 하나의 사원으로 부탄 사람들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는 장소다.
특이하게도 이 사원에선 쇠사슬을 목에 걸고 있는 흰사자 4마리를 볼 수 있다. 쇠사슬은 사원 꼭대기에서 길게 이어져 네 귀퉁이에 있는 사자의 목과 연결된다. 유딘은 부탄 사람들은 치미라캉 사원을 가장 고귀하고 아름답게 꾸몄는데, 흰사자들로 하여금 사원이 날아가지 못하도록 잡고 있게 했다고 한다.
사원 내부는 들어서자마자 10여 미터는 족히 될 것 같은 목각 조형물로 시선을 압도한다. 예술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는 눈으로 봐도 불교 예술의 높은 경지를 느껴지는 장면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사원내부는 사진촬영이 금지돼 있다고.
하루 일정을 마치고 전망 좋은 숙소에 도착했다. 커다란 배낭을 아무렇지도 않게 등에 지고 앞장서는 부탄 여성. 손사래 치는 내게 괜찮다는 말로 웃음 짓게 하는 그녀의 묵묵함은 이날 내가 듣고 본 것들 중 가장 놀라운 모습이었다. 부탄은 전통적으로 모계사회다. 집안을 꾸려 나가는 건 지키는 것은 여성이고 남성은 그 가계를 지속시키기 위해 씨를 옮겨주는 존재에 불과하다는 게 전통적 가치관이다.
하지만 부탄의 모계사회도 개방화 분위기에 점차 변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집안의 땅을 상속받는 자녀가 반드시 딸이 아닌 경우도 생겨나고 있다고 한다.
* 이 글은 <오마이뉴스> 김동우 시민기자가 쓴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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