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인디스페이스에서 본 <당신얼굴 앞에서>
완연한 가을이다. 길거리 사람들의 두꺼운 코트만 보면 초겨울이라고 불러야 하겠지만 지금이 오히려 가을의 시작이다. 오후 4시면 주황빛으로 떨어지는 노을을 볼 수 있고 한 차례 지나간 비 때문에 나뭇가지에 붙어있던 화려한 나뭇잎이 낙엽이 되어 발에 밟히기 때문이다. 추운 날씨 때문에 더 가까이 붙어 손을 꼭 잡은 연인의 모습 때문이기도 하고,두 손을 주머니에 집어넣고 혼자 음악을 들으며 골목길을 걸을 수 있는 고독함을 얻기 때문이다.
그간 회사와 집을 오가다 보니 내게 슬럼프가 찾아왔다는 것을 뒤늦게 알았다. 처음에는 단지 반복되는 회사 업무와 일상에서 찾아온 회의감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겉으로는 밟은 표정이지만 안에서는 폭풍이 몰아치고 있었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우선 헬스를 끊었다.땀을 흘리고 난 뒤 약간의 후련함이 찾아왔지만, 다시 집으로 돌아오면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들로 극심한 우울감에 빠졌다. 회사에서 업무에 대한 집중보다 이곳에서 도망치려는 고민을 더 많이 했다. 회사는 다행히 나를 한 번 붙잡아 주었다. 이러면 안 되겠다 싶어 이틀 연차를 썼다. 생각을 정리하고 싶었다.
내게 주어진 이틀이라는 시간 동안 다시 예전의 건강하고 단순했던 나로 돌아가지 못한다면 난 끝이다.
청소년 때도, 성인이 되고 난 후에도 평일 오후에 조용한 극장에서 영화 한 편을 보고 서울 거리를 구석구석 돌아다니는 것을 좋아했다. 그리고 어스름한 저녁, 집으로 돌아와 해가 질 때가지 그날에 보았던 것과 느꼈던 감정을 밤새도록 글로 옮겨 적었다. 복잡한 생각들이 단어로 정리되고 잡히지 않았던 감정들이 문장으로 정의되니 내면에 갇혔던 내가 잠시나마 석방된 기분을 느꼈다.
우선 책상 앞에 앉아서 극장에서 상영 중인 영화를 찾았다. 위드 코로나로 전환되는 시점이어서 그런지 좋은 영화들이 속속들이 극장에 걸려있었다. 레오 까락스 감독의 <아네트>에서부터 리들리 스콧 감독의 <라스트 듀얼: 최후의 결투>,오랫동안 개봉만을 기다려왔던 드니 빌뇌브 감독의 <듄>까지. 수많은 선택지 앞에서 결정에 큰 고민은 없었다. 가을이면 꼭 극장으로 찾아오는 고맙고도 반가운 홍상수 감독의 영화 <당신얼굴 앞에서>를 골랐다. 다음으로 극장을 선택해야 했다. <당신얼굴 앞에서>는 개봉한 지 꽤 되어 소수의 영화관에서만 상영 중이었다. 종로에 있는 ‘인디스페이스’가 눈에 띄었고 그곳으로 가기로 했다. 지금은 폐관한 ‘서울극장’ 안에서 ‘서울아트시네마’와 함께 조용히 존재하는 공간이다. (곧 다른 곳으로 이사할 예정이라고 한다) 영화와 극장을 선택하고 이부자리에 누우니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한 듯 너무나 개운했다. 홍상수 감독의 영화를 보고 가을의 종로 거리를 걷는 상상만 해도 유쾌하다.
다음 날 아침, ‘인디스페이스’로 향했다. 이사한 집에서 버스 한 번 타면 도착할 수 있는 곳이 되었는데 이제야 찾아가 보다니, 그리고 ‘서울극장’이 폐관되었다는 소식을 뉴스로 접한 후 이제야 작별인사를 하러 오다니. 미안하고 또 미안했다. 이렇게 극장이 서서히 사라져가는 것일까. ‘서울극장’ 건물의 내부는 듬성듬성 불이 켜져 있어서 전반적으로 어두컴컴했다. 암흑 속에서 들었던 심장 뛰는 소리는 환청이었던 것일까?
홍상수 감독은 여전했지만, 영화는 조금 달랐다. <인트로덕션>에 이어 직접 촬영까지 맡았는데 이제는 전문 촬영 감독이 된 것 같았다. 카메라 움직임과 구도가 한층 안정적이었다.이혜영 배우와 조윤희 배우의 수다를 가만히 듣고 있자니 자크 리베트 감독의 영화 <셀린느와 줄리 배타러 가다>가 떠올랐다. 홍상수 감독의 영화에서 항상 유머러스한 모습을 보여줬던 권해효 배우는 아주 진지해졌다. <인트로덕션>에 출연했던 배우들이 다시 등장했고 관계 또한 엇비슷해 속편과 같은 느낌이 강렬했다. 영화를 보기 전부터 항상 궁금했던<당신얼굴 앞에서>라는 제목의 의미는 영화의 후반부쯤 술 취한 상옥의 입에서 흘러나온다.
“그냥 이 얼굴 앞에 있는 것만 제대로 볼 수 있다면
그 어떤 것도 두렵지 않아요.”
극장을 나와 근처에 있는 ‘동경우동’에서 우동을 먹고 종묘를 걸었다. 이 길을 같이 걸었던 사람이 떠올랐다. 가을은 매년 찾아와 똑같은 모습과 감정을 선물하고 가는데, 왜 사람은 항상 변하고 거품처럼 쉽게 사라지는 것일까. 매년 매 순간 자꾸만 흔들린다. 가을의 낙엽처럼 흔들거리다가 이내 낙엽이 되어 툭 땅에 떨어지면 좋으련만. 발로 밟아 바삭하는 소리를 내면 그 쾌감이 정말 클 텐데.
인간에게는 수많은 우연이 발생한다. 아니 우연으로만 이루어졌다고 해도 과장이 아닐 것이다. 그런데 이 우연이 딱딱 들어맞던 순간도 언젠가 끝을 내더니 하나, 둘씩, 셋씩 1도 2도 3도 어긋나기 시작한다. 하나의 어긋남을 맞추려고 다른 것들이 따라와 주는 노력을 해주면 좋으련만, 삶이란 절대 호락호락하지 않다. 서로 다른 방향으로 어긋나버린 것들은 돌아볼 겨를도 없이 끊임없이 지들이 가고 싶은 쪽으로만 냅다 달아나버리는데 쫓아가도 잡을 도리가 없다. 한도 끝도 없는 어긋남… 겉으로는 그렇지 않아 보이지만 안에서는 벌어진 간극의 진동으로 요동친다.
다시 돌아갈 수 없어… 끝이야 모든 게.
집으로 돌아와 어스름한 저녁의 기운을 만끽하며 책상 앞에 등을 켜고 앉으니 키에슬로프스키 감독의 영화 음악이 흐른다. <베로니카의 이중생활>의 엔딩에서 낙엽이 쌓인 마을에 도착한 베로니카가 차 안에서 나무에 손을 대는데 그 순간 즈비그뉴 프라이즈너(Zbigniew Preisner) 음악이 흐른다. 마치 나무의 언어를 듣는 것만 같다. ‘서울극장’의 어둠 속에서 느꼈던 것은 정말로 착각이었을까? 그 박동소리는 나만 느꼈던 것일까?나는 그동안 무엇을 느끼고 있었을까. 아니 느끼기라도 했던가. 느끼려는 노력이라도 했던가. 잊어버리진 않았을까. 이 계절의 냄새와 분위기와 사람들의 생생한 소리들을.
“그냥 이 얼굴 앞에 있는 것만 제대로 볼 수 있다면
그 어떤 것도 두렵지 않아요.”
입에서 맴도는 대사를 읊조리니 머릿속은 이미지로 휩싸인다.
현상도 이상도 어떠한 구성도 나를 홀리기 위해 동원되는 갖가지 장치들이다. 나를 속이기 위한 마술사의 트릭들이다. 몇백 년 몇천 년 나를 속이기 위해 머리를 싸매고 실패에 실패를 거듭하며 완성에 가까운 단계에 도달한 트릭. 이제야 상대가 속아 넘어가 버렸던 것인데. 그들은 어찌나 신이 났던지 진수성찬을 차려놓고 밤새도록 술을 들이켜며 축제를 벌인다. 트릭이라고 생각하니 참 시시하다. 그들이 그렇게 즐거워할 줄 알았으면 진작에 좀 속아줄 걸 그랬다. 멀리서 들리는 축제 음악 소리와 강가를 거닐며 들리는 잔잔한 물결 소리와 이름 없는 새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뒷짐 지고 잔잔히 거닌다. 한 바퀴 돌고 돌아가면 그들은 모두 취해 잠이 들 것이다. 차갑게 식은 음식들과 빈 잔들을 가만히 바라보며 떠오르는 새벽의 빛을 기다리자. 이제 저 산 너머에서 태양이 떠오르기 시작한다. 아주 푸르고 관대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