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대는 어느 코미디언 지망생의 웃기지 않는 농담
원작을 챙겨보지 않아서 조커의 연대기는 정확히 모르지만, 그것을 몰라도 충분히 어떤 내용인지 이해할 수 있고, 더군다나 악의 화신인 조커의 내면까지 이해하게 되는 순간에 다다른다는 것에 소름이 끼칩니다. 영화가 중후반쯤까지 진행되면 조커의 탄생 배경을 동시에 체험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동안 조커라고만 알고 있던 하나의 존재를 조커와 아서 플렉으로 분리하면서 조커의 내면까지 설명하려 드는 이 위험한 영화를 지금 이 사회에서 살아가는 우리는 꼭 봐야 합니다. 조커, 아니 아서 플렉의 이야기를 들어봐야만 합니다.
조커는 아서 플렉(호아킨 피닉스) 내면의 허구적 생명체입니다. 영화 속에서 아서 플렉을 진심으로 동정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지만, 그의 웃음 속에 숨겨진 진실을 알게 된 관객만이 그를 동정하게 됩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조커의 광기 어리고 뜬금없는 웃음에 폭력을 가하고 비웃지만, 관객의 마음에서는 눈물이 흐릅니다. 영화의 오프닝에서 흘리는 조커의 검은 눈물은 물감의 흘러내림이 아니란 것을 관객만 알게 되는 것입니다.
배트맨의 화려함에 현혹돼 배트맨이 주인공이었던 영화를 최고로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조커>를 보고 나니 그동안 웨인의 삶을 전혀 공감하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배트맨은 브루스 웨인의 상처에서 시작한 존재이지만, 결국 그는 상위 0.1%에 가까운 부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서민의 슬픔에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증권가에 세워진 거금들인 무표정한 조각상일 뿐입니다. 반면 조커는 울고 웃고 춤을 춥니다. 그것도 더욱 가난하고 취약계층의 인간들 앞에서 조차도요. 조커는 더 넓은 범위에 있는 서민들의 상징적 인물이기에 0.1% 이상의 사람들을 대변합니다. 이러한 면에서 조커는 배트맨보다 위대하다고 봐야 할 수도 있겠습니다. 가정폭력과 사회의 불공정함, 정신병 등 여러 가지 복잡한 상황으로 벼랑 끝까지 몰리는 아서 플렉은 일반 서민들의 화를 대변하지만, 브루스 웨인은 부자들이 부를 축적하고 그것을 권력으로 행사하고 정의의 대변인인 척하는 이들의 변명의 상징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 영화 <조커>는 조커라는 제목을 붙이기에 너무 아깝다는 생각이 드는 영화입니다. 절대로 범죄를 옹호할 수 없지만 조커라는 존재의 탄생에 대한 이야기는 절대로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그는 어떤 악마의 사생아가 아닌 이 추악한 사회에서 인간이 저지른 모든 상처의 결합체이기 때문입니다. 현시대가 조커를 배제하려 한다면 아마도 그들은 모두 사회의 하수인일 것입니다. 미국에서 퍼진 모방 범죄에 대한 우려가 그냥 헛소리라고 생각했습니다. 사실 영화를 보다 보면서 뭔가 살을 옥죄는, 마치 내 안에 '참을 인' 자로 봉인된 화로 가득 찬 악마가 주문에 의해 서서히 살갗을 뚫고 스멀스멀 기어 나오는 것 같은 긴장이 듭니다. 하지만 모방 범죄가 벌어질 영화는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단지 뒤에서 떠드는 사람들에게 크게 웃어주고 싶은 마음이 드는 정도일까요. 그리고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이 듭니다. 가면을 쓴 사람들을 우선 범죄자로 낙인찍는 사회보다 그들이 왜 가면을 쓰고 사람들 앞에 나서야 했는지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사회가 우리에게 절실하게 필요하다는 것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