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동, 카페 귀천, 암야행로
국립현대미술관을 나오니 피곤이 몰려왔지만 오랜만에 느끼는 평일의 서울 정취를 두고서 일찍 집으로 돌아가기엔 너무 아쉬웠다. 절정에 이른 더위로 올라간 열을 내리고 싶어 우선 어디든 들어갈 수 있는 카페를 찾다가 인사동의 깊은 골목으로 들어가게 됐다. 언젠가 한 번 왔었던 곳 같으면서도 낯선 기분이었다. 고즈넉한 전통찻집이 보였지만 두바퀴를 돌고 나서야 서울미래유산 팻말이 붙은 ‘귀천'이라는 찻집에 무작정 들어갔다.
밖에서 볼때는 거의 보이지 않아 몰랐던 내부의 모습은 긴장했던 입장과 다르게 일반적으로 상상했던 오래된 다방의 모습이었고, 오래된 아늑함과 함께 충분할 정도로 시원한 에어컨 바람이 꽉 차 있어 마음이 놓였다. 마스크를 잠깐 내리니 달달하고 쌉싸름한 향이 은은하게 돌고 있는 것을 알았다.
옛날 서책처럼 꾸며진 메뉴판을 받았다. 애초에 카페인 주입이 절실했기에 더 만족스러웠을 차 종류보다 커피를 시켰다. 주문했는데도 메뉴판에서 눈을 떼지 못하자 주인은 메뉴판을 맡기고 커피를 준비하러 이동했다. 궁서체로 적힌 메뉴의 글자들은 책자의 크기와 비례해 투박하지도 않고 동글동글한 것이 예사 솜씨가 아니다. 단 한 장 넘길 수 있는 한지의 느낌은 마치 사람의 살결을 얇게 떼어낸 듯한 감촉이다.
계속 읽고 있던 <암야행로>를 꺼내 상에 올려놓으니 오래지 않아 얼음이 동동 떠 있는 아이스 커피와 한과 두 개가 접시에 담겨 나온다. 달달한 믹스 커피 정도를 예상했었는데 쓰디쓴 커피가 나왔다. 이거 토탈 고급이구나.
시원한 아메리카노를 마시고 책을 들춰보려니 창밖에 보이는 맞은편 집의 이름이 자꾸 거슬린다. ‘여자만’. 어째 이름이 여자만일까. 이렇게 아름다운 인사동 골목에 저런 차별성이라니. 그러나 옆에 붙은 글귀를 보니 생각이 달라진다. ‘여자만’은 전남 고흥과 여수 사이에 위치한 만 이름이라고 한다. 그리고 남자도 들어와도 된다고 친절히 쓰여 있다. 나의 문제는 참 크다.
다시 책장을 열어보려니, 저쪽에 앉은 오직 두 명뿐인 어르신 손님이 영화와 공연, 서체 등을 논한다. 조금 더 젊어 보이는 어르신이 역사가 깊어 보이시는 어르신을 인터뷰하는 것인가. 책을 읽기에는 귀가 너무 열려 내용이 눈에 들어오지 않아 책을 펴고 덮기를 반복한다. 귀는 열고 눈은 한두 문단을 왔다 갔다 왕복한다. 귀가 더욱 열리니 대화에서 카페에 흐르는 클래식 음악으로 이동한다.
클래식을 이해하고 당연히 쓴 커피를 내오고 예술을 논하는 이곳. 옛날 그 시절에는 이런 조합을 사람들이 두루두루 즐겼을까. 빌딩 안에서 분투하며 일할 시간에 젊은 나는 이곳에 앉아 잡념에 잠겨있으니, 마치 소설속 탱자 탱자 하는 부유층 청년 같다. 참 소설은 필요가 없구나. 내일이면 불안이 잠식할 것이다.
-22년 7월 1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