궂은일 마다하지 않는 자세가 필요하다.
나는 회피형 인간이다. 소극적이고 내성적인 성격이다. 어떤 문제 앞에 당당히 앞으로 나서기보다 뒤로 반걸음 물러서는 타입이었다. 수업시간에 발표할 사람 손을 들라는 선생님의 말에 고개를 푹 숙이고 딴청을 피우기 마련인 학생이었다. 딴청은 나의 특기이자 기술이 됐다.
아무도 손 들지 않는 고요함 속에서 타깃을 찾는 선생님의 눈동자 굴러가는 소리가 귀에까지 들렸다. 손가락으로 지목받는 순간 그 자리에서 총 맞은 것처럼 절망했다. 귀가 새빨갛게 변하고 목소리와 온몸이 덜덜 떨렸다. 성공한 자들은 발표와 질문을 하는 학생이 성공한다고 강조했다. 나는 정말로 그래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수업시간마다 손을 번쩍 뻔쩍 들고 발표하는 학생이 부러웠다. 그런 용기는 어디서 나오는 걸까. 혼자 끙끙대며 패배자가 됐다. 자존감은 지옥까지 떨어지고, 어디 내세울 것 하나 없는 아이가 되어 버렸다.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무난하게 살아가려면, 순간순간 마주하는 다양한 돌발상황을 지혜롭게 헤쳐나가야 했다. 식당에서 배식 도움이 필요한 손길을 못 본 척한다. 단체로 줄을 서러 갈 때 설렁설렁 눈치 보며 천천히 나가야 남들 앞에서 시범조 희생양이 되지 않는다. 다들 똑같이 어기적 나가는 모양새다. 그러면 앞으로 나가다 말고 소지품을 떨어뜨린 사람처럼 앉았던 자리로 돌아가 자기 자리를 살펴보는 기술을 쓰면 된다. 짐을 옮기다가 가장 무거운 물건이 하나 남았을 땐 수레를 가져오겠다며 급하게 1층까지 뛰어내려 갔다 오면 짐은 벌써 옮겨져 있을 때가 있다. 앞사람 가방 문이 열려있을 때는 한시가 급하더라도 핸드폰을 꺼내 오지도 않은 문자를 확인하는 척하면, 앞사람은 계단을 내려가 눈앞에서 사라진 후일 것이다. 이렇게 회피 기술은 수도 없이 많고 실행으로 옮겨 성공했던 연구결과가 있기에 믿어도 좋다. 그러나 이렇게 살다 보면 네가 그러고도 사람이냐? 하는 마음의 꾸짖음이 들린다. 어쩔 수 없다.
‘마음의 꾸짖음’은 그까짓 기술을 사용함으로써 발생하는 불필요한 단점을 설명한다. 배식을 도와달라는 손길을 피하다 보니 다음 칸에 담긴 좋아하는 음료수를 들고 오지 못한다. 사람들 앞에서 시범을 보여주다가 실수해 쪽팔리는 상황을 피하려다 보니 선생님이 잘못된 자세를 고쳐주는 지도를 받지 못하고, 평생 뜀틀 하나 넘지 못하고 졸업하는 신세가 된다. 팔과 허리 덜 아프려다 여럿이 수다를 떨며 친해질 기회를 놓치게 되고, 가방 문 열린 앞사람의 어깨 한 번 두드릴 용기를 내지 못하니 항상 내 가방이 열렸는지 바지에 뭐가 묻지나 않았는지 시시때때로 뒤꽁무니가 신경 쓰여 죽겠다.
회피 기술이 일상화된 내가 변화하게 된 시점은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화’라는 것이 나를 조금 움직여준 듯하다. 충분히 손을 뻗을 수 있는데 쭈뼛대는 내가 짜증 났다. ‘내가 할게, 나랑 하자’ 말 한마디 꺼내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가며 돌이켜 후회하는 나 자신에게 화가 났다. 나만 알고 있던 기술들은 누구에게도 들킬 염려가 없다고 자부하니 아무도 나에게 잘못을 알려주고 지적해주지 않았다. 오직 나만 아는 비밀이었고 나만의 부질없는 세상을 지켜나가고 있었다.
때로는 힘들어 쉬쉬하는 순간이 있지만, 조금만 기운을 내고 긍정적인 생각을 하다 보면 사람은 조금씩 바뀌어나가지 않을까. 어떠한 짓궂은 순간에도 내가 먼저 앞서 나아갔을 때 뒤에서 나를 믿고 따라와 줄 사람들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콩알만한 용기라도 마음속에서는 폭포수 같은 청량함으로 물들지 않을까. 그렇게 하루하루 작은 용기들을 내보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