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04. 잡초

[연작 소설] <기억의 계절> - 봄 이야기

by 오묘미

지수와 은혜가 탄 택시는 새벽의 뻥 뚫린 도로를 거침없이 달렸다. 라디오에서 클래식 음악이 흘러나왔다. 열린 창문으로 숲과 도시의 냄새가 뒤섞인 바람이 쏟아져 들어와 실내에 휘몰아쳤다. 내부 후사경에 걸린 부적이 일정한 바람에 의해 가로로 섰다. 뒷좌석에 나란히 앉은 지수와 은혜의 머리카락이 정신없이 흩날렸다.


"강민구, 오영한... 둘 다 우리 아파트에 살았어. 너도 알지? 강민구는 슈퍼에서 가끔 마주친 적이 있어. 학교 갈 때 같은 엘리베이터를 탄 적도 있었어. 향수 냄새라... 맞아, 향수 냄새 같았지. 근데 내 기억에는 향수보다도 섬유유연제 냄새 같았어. 아마 남들이 잘 쓰지 않는 섬유유연제를 써서 그렇게 생각했던 걸 수도 있겠지."


지수는 은혜가 하는 말을 가만히 들으며 강민구와 오영한의 생김새를 떠올렸다. 기억 속 희미한 형체가 분열과 융합을 반복했다. 얇게 째진 눈이 쌍꺼풀 짙은 눈으로 변하고, 높고 날렵한 코가 뭉툭하게 변했다. 상고머리가 짧은 스포츠머리로 바뀌는가 하면, 굵은 중저음의 목소리가 장난기 어린 톤으로 변했다.


"오영한은 모르겠어. 학원 끝나고 버스에서 내릴 때 몇 번 봤었던 거 같아. 같은 아파트에 사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어. 너도 그때 우리 학원으로 옮기지 않았어? 내가 그만둘 때쯤이었나? 내 기억도 정확하진 않아. 그런데 왜 갑자기 걔들에 대해 궁금해진 거야?"


"모르겠어... 아니... 출근하는 길에 향수를 맡았는데 어디선가 맡았던 거 같은 기분이 들었어. 향수든 섬유유연제든 누구나 같은 걸 쓸 수 있겠지. 근데 그보다도 옛날 기억이 떠오르더라고. 그 기억 때문에 며칠 동안 조금 힘들었어. 자꾸만 기억들이 팽창해서 마음이 뒤숭숭해지고. 그래서 알고 싶었던 거야. 알면 달라지겠지. 현재에 다시 집중할 수 있겠지 하고."


은혜가 고개를 돌려 창밖에 스쳐 지나가는 가로등을 봤다. 망설이는 것인지 흘러가게 두려는 것인지 은혜의 생각은 알 수 없었다. 다만, 은혜는 지수가 모르는 뭔가를 알고 있는 것은 확실하다.


지수는 택시의 가속에 땅 밑으로 빨려 들어갈 것만 같아 정신이 혼미해졌다. 좌석 끄트머리를 꽉 움켜쥐었다. 기억의 되새김은 죄의 되새김과 같다. 기억이 선명해지는 것은 어떤 접근에 의해서건 죗값을 치르는 것이나 다름없다. 지수는 죄를 짓고 있었고, 그러한 죄의 무게를 은혜에게 반쯤 떠넘기려는 이기적인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은혜 또한 이 가속의 택시 안에서 기억의 무중력 속에 빠졌다. 그러나 비관의 잡식성 앞에 어떠한 원리도 이겨낼 수 없이 패배하고 만다. 은혜는 조심스럽지만 조금 흥분된 어조로 말했다.


"아까 내가 가축이니 죽음이니 했던 말은 헛소리가 아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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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수는 벗겨지고 남은 회색 매니큐어를 손톱으로 긁어댔다. 은혜의 한마디 한마디에 가슴이 출렁였다. 마치 예측 불허한 돌부리 산길을 질주해야만 하는 사람처럼. 눈을 꼭 감고 이 모든 상황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난 내 병이 더 악화되어 가는 걸 느껴. 약을 먹어도 그때뿐이지 근본적인 해결책은 아니야. 내가 의식해야 하겠지. 부정적인 생각과 감정에 얽매여 있으면 안 돼. 그러면 죽음이라는 우리에 갇혀 길들여지게 될 뿐이야. 평생 우울증 약을 먹는 사람도 있대. 약을 복용하다가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도 있대. 난 어떤 결론에 도달할까."


은혜의 말은 생각보다 경쾌했다. 오히려 지수의 마음이 뻥 뚫리는 것만 같았다. 자신의 나약한 상태를 드러내는 상대를 대하는 방식은 아주 단순 명료하다. 오랜 격언에 '기쁨은 나누면 배가 되고, 슬픔은 나누면 반이 된다'는 말이 있다. 지수는 이 고리타분한 격언에 따라 깊은 침울함에 잠겼고, 적당한 위로의 말을 건넸다.


'이겨낼 수 있다.', '힘내라.', '약에만 의지하지 말고, 운동도 하고 밖에 나가서 햇볕도 쬐라.’


절박한 의지 앞에 안주하는 인간의 죄악은 뿌리가 너무 깊어 어쩔 도리가 없다. 이 인간의 죗값은 죽어서도 청산되지 않을 것이다. 지수는 어쩌면 인간으로서 최악의 거짓을 감행한 셈이다. 정류장만 도착하면 모든 상황이 해결될 것이라 안심하면서 친구와 함께 있는 이 순간이 행복하다고 최면을 건다. 지수의 뺨과 귓불이 어느새 창피함에 붉게 달아올랐다. 어둠의 배려가 아니었으면 당장이라도 차 문을 열고 뛰어내리고 싶었으리라.


은혜는 대학가 역 출구 앞에서 지수와 처음 마주쳐 인사를 나누던 순간부터 알아차렸을 것이다. 어쩌면 오늘 이 친구와 만나는 마지막일 수도 있겠구나. 그래서 은혜는 어떻게든 솔직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한 자신의 모습을 숨기는 자의 비굴함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건 큰 오해고 은혜의 입장에서는 어쩔 수 없는 순리이겠거니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택시가 터널 속으로 들어가자 은혜의 목소리가 서늘하게 울렸다.


"난 기억을 믿지 않아. 과거에 대한 추억도, 사람을 떠올리는 향수도, 잊어버려 놓고 또 찾아내려는 물건들도. 기억은 삶을 날조하는 암초야. 기억에 걸려버리면 인간은 침몰하게 돼 있어. 그게 어느 지점인지 어느 때인지 아무도 알 수 없어. 본인조차도 말이야."


그리고 은혜는 잡초에 관한 이야기를 했다. '기억 속의 잡초'라는 말을 썼는데, 기억 속의 잡초는 뽑아도 뽑아도 계속 생겨나는데 가만히 두면 온 마당과 들판에 퍼진다는 것이었다. 잡초는 누군가의 기억 속에서는 자유롭고 누군가의 기억 속에서는 통제된다고 말했다.


은혜는 도로 밖 어둠 속에 빛을 내는 도시를 바라봤다. 무언가를 끝없이 떠나보내는 자의 눈으로.


택시는 터널을 통과해 시외버스 정류장 앞에 멈춰 섰다. 기사가 다 왔다고 말했고 시간은 짧은 듯 길게 느껴졌다. 그 거리의 체감은 두 사람이 선택할 몫이었다. 은혜는 택시에서 내리며 지수에게 말했다. 다음에 또 보자고. 지수도 그러자고 답했다.


미소 띤 은혜가 차 문을 닫고 몇 걸음 뒤로 물러서자 기사가 다음 목적지를 호명한 후 출발했다. 지수는 차 바깥쪽 문에 붙어 있는 작은 후사경으로 멀어져가는 은혜를 봤다. 지수는 너무나 공허했다. 내부에 휘몰아쳤던 포근했던 바람이 온몸의 열기와 생각과 감정을 깡그리 훔쳐 달아난 것만 같았다. 오늘을 기억할 수나 있을까? 이렇게 헤어진다면 다시 또 만날 수 있을까. 그때는 또 언제일까. 지수는 다시 은혜의 얼굴을 볼 수 있을까. 기억이 몰고 가 함께 사라지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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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평 남짓의 원룸 매트리스에 누운 지수는 온몸이 전기 충격이라도 받은 듯 찌릿찌릿했다. 술기운에 마비되었다가 서서히 풀리는 느낌이었다. 지수의 머릿속에 은혜의 말들과 자신이 했던 말들이 분절되고 마음대로 붙어먹었다. 한 시간도 지나지 않은 과거를 떠올리려 해도 기억은 저주라도 걸린 듯 추리의 동력을 단계마다 제어해 버렸다. 기억을 되새길 방도가 없자, 지수는 은혜에 대한 상념에 빠졌다.


지수는 은혜가 언제부터 저런 비관주의자가 되어버렸는지 큰 충격을 받았다. 전혀 은혜 같지 않은 은혜였다. 어쩌면 은혜는 자신이 그렇게 되기 위해 자신의 철학 안으로 정신을 내맡긴 것이 아닐까. 전혀 다른 자신을 위해 수많은 자신을 지어내고 있는 것이 아닐까. 외부의 간섭까지도 철저히 거부할 심산인 걸까.


그래도 기억을 잡초에 비유한 것은 화가 났다. 지수에게는 확신이 있었다. 기억이 자신을 만들어왔다는 확신. 그래야만 나 자신을 신뢰할 수 있고, 살아가는 이유를 댈 수 있으며, 이 암울한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끝없이 변명거리를 만들어낼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죽음과 소멸 밖에 남지 않겠지.


지수는 그제야 은혜의 상태가 걱정됐다. 지수는 핸드폰을 들어 읽지 않은 메시지가 50개나 쌓인 단체 채팅방에 들어갔다. 민지와 아름이 여운에 못 이겨 수많은 대화를 이어갔다. 은혜만 읽지 않은 듯 1이 남아있었다. 지수는 이모티콘과 함께 메시지를 남겼다.


“다들 잘 들어갔지? 오늘 만나서 얼굴 보고 이야기해서 너무 재밌었당! 좋은 꿈 꾸고 다음에 또 보자!"


새벽 2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지수는 핸드폰을 저만치 던져 놓고 천장을 바라봤다. 답장은 오지 않았다. 민지와 아름은 남편과 아이를 챙기느라 바쁠 테고, 은혜는 채팅방을 확인하지 않고 씻고 잠들었으려나. 지수는 괜한 말을 했나 또 한참 동안 후회의 늪에서 허우적대다 그대로 잠이 들었다.


지수는 꿈속에서 오늘 이 순간을 다시 보게 되었고, 있었던 일들과는 완전히 다른 상황이 펼쳐졌다. 관찰자 지수는 은혜가 말했던 '잡초 철학'을 떠올리며 세 친구가 웃으며 나누는 대화를 들었다. 지수에겐 꿈이 기억의 날조다. 현실에서 무너지면 꿈속에서 소생했다. 은혜의 말마따나 지수는 암초에 걸린 것이 분명하다. 과거와 기억과 현재와 꿈의 연결고리에 단단히 묶여버려 빠져나올 수 없는 궁지에 몰렸다. 기억을 추격하던 지수는 이제 기억에 쫓기는 신세가 됐다.


허공에 떠다니며 대화하는 세 사람을 관찰했다. 은혜는 친구들의 수다에 웃고 기지개를 켰다. 지수는 은혜를 가만히 내려다봤다.


'아픈데도 진실한 걱정 한마디 못 할 망정, 부질없는 기억과 추억만 되새기려는 친구가 얼마나 원망스러웠을까. 그래, 원망할 만하다. 충분히 그럴만해... 원망해. 은혜야. 날 원망해. 미안해. 미안해... 미안해...'


홀로 잠든 지수의 눈가의 얕은 수로로 한 방울의 눈물이 또르르 흘러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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