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05. 붉은 가디건

[연작 소설] <기억의 계절> - 봄 이야기

by 오묘미

어젯밤에 골라둔 옷을 입고 전신 거울 앞에 선 지수의 눈앞이 깜깜해졌다. 꽃샘추위로 쌀쌀했던 기온에 맞췄던 탓일까. 이런 변수를 고려해 일부러 다음날 입을 옷을 미리 골라놨던 건데. 혹시나 알람이 울리지 않을까 싶은 불안에 출근 시간보다 조금 더 일찍 일어났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으면 맞지 않은 옷을 입은 아이처럼 하루 종일 불편해했을 것이다. 출발 마지노선을 알리는 알람이 울리자 일시 정지됐던 회로가 다시 돌기 시작했다.


날씨는 여느 봄날처럼 포근했고 비가 와서 그런지 공기가 깨끗했다. 이런 날씨에 어울릴 옷이 없을까. 지수는 황급히 옷장을 뒤져 입을 만한 옷을 찾았지만, 오늘따라 무엇 하나 마음에 들지 않았다. 계절별 옷들이 아무렇지 않게 뒤섞여 있었다. 코트, 바람막이, 반팔티, 패딩, 셔츠, 양말, 속옷... 분류도 없이 제멋대로 엉킨 꼴이 흡사 한동안 과거에 얽매여 있던 자기 모습과 닮았다고 느꼈다.


그날 밤 택시 안에서 은혜가 했던 말이 아니었다면, 아직도 지하철 안에서 콧구멍을 벌렁대며 그 남자의 향수만 찾아다녔을 수도 있다.


아무튼 이 엉망진창인 옷장은 엄마의 말마따나 게으름의 대가다. 다른 사람이 대신해 줄 수 없는 숙제다. 처리하지 않고 묵혀둘수록 쌓여서 삭아만 가겠지. '오늘 회사 미팅을 끝내고 돌아오면 진짜 다 뒤집어엎을 거야. 코트는 드라이클리닝 맡기고, 패딩은 공기를 빼서 안쪽 깊숙이 넣어놔야겠다. 먼 계절은 뒤로, 가까운 계절은 앞으로.'


지수는 눈을 감고 옷무더기 속에 양손을 담갔다. 마치 예능 프로에서 박스 안에 손만 집어넣어 안에 있는 물체를 맞추는 게임을 하는 것만 같았다. 출연자가 장어를 쥐는 모습을 상상하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으... 하고 작게 신음을 내뱉으니 눈치 없게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때 손에 잡힌 익숙한 질감에 그것을 움켜쥐고 끄집어냈다. 끌려 나온 옷은 곱게 접힌 붉은색 가디건이었다. 가슴 쪽에 유명한 브랜드 로고가 박혀있었다. 오랫동안 깊은 곳에 잠들어 있었을 텐데 옷에서 좋은 향기가 났다. 지수는 언제부터 있었는지 모를 옷을 보고 미궁에 빠졌지만, 이 옷이야말로 오늘 날씨에 딱 맞겠다는 생각에 곧바로 상앗빛 정장형 바지와 함께 가디건을 걸치고 집을 나섰다.


회사에 도착하니 매번 지각하던 송과장이 20분이나 일찍 출근해 본인 자리에 서서 미팅에 챙겨 갈 서류를 정리하고 있었다.


"한대리, 왜 이렇게 늦었어. 혹시 우리 저번 회의 때 공유했던 서류 못 봤어?"


지수는 조금 어이가 없었지만, 그만큼 중요한 미팅임을 짐작했다. 서류 찾는 걸 돕고 송과장의 차를 타고 미팅 장소로 향했다.



미팅은 클라이언트의 회사에서 진행될 예정이었다. 높은 빌딩 건물 로비에서 대기하고 있으니 정장을 갖춰 입은 여직원이 나와 지수와 송과장을 사내로 안내했다. 지수는 취업 준비생 때 이런 대기업으로 면접을 보러 온 적이 있었다. 대기업에 입사하면 어떤 기분일까. 사원증을 찍고 들어가는 사람들을 보며 그런 생각을 했었다.


대기업을 목표로 함께 취업 준비하던 친구가 떠올랐다. 그 친구의 추천으로 끌어당김 법칙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잠들기 전 특정 주파수의 음악을 틀어놓고, 원하는 미래를 상상하면 그것이 자석처럼 끌어당겨져 끝내 이루어진다는 믿음이었다. 친구는 당장은 아니어도 언젠가는 원하는 꿈이 자석처럼 달라붙을 것이라 입버릇처럼 말했다. 간절했던 지수도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었다. 하지만 예상대로 둘은 원하던 기업에 입사하지 못했다. ‘예상대로’라는 말마따나 끌어당김을 100% 믿지 못했기에 궁극적으로 아무것도 끌어당기지 못했던 것이라고 정리하니 자연스럽게 연락이 끊겼다.


지수와 송과장은 여직원의 안내에 따라 유리 벽으로 된 소회의실로 들어가 의자에 앉아 기다렸다. 지수는 왠지 면접을 보는 것만 같아 트라우마가 밀려왔다. 옆에 앉은 송과장은 역시 대기업은 다르다는 둥, 전면에 붙은 65인치 TV를 보고는 대표에게 건의해서 우리 회사 회의실에도 저런 TV를 설치하면 회의의 질이 높아지지 않겠냐는 둥 수다를 늘어놨지만, 손가락으로 주물럭거려 해진 서류 끄트머리가 송과장의 초조함을 여실히 드러냈다.


약속했던 시간이 지나고 있었다. 건너편 회의실 문이 열리며 10명 남짓의 사원들이 쏟아져 나왔다. 이사진으로 보이는 직원들 속에서 분주히 대화하는 준혁이 보였다. 준혁은 어두운 회색 정장에다 구두를 신었다. 직접 손 본 듯한 헤어스타일을 보니 어지간히 꾸며본 솜씨가 아니었다. 이사진은 준혁의 어깨를 토닥이며 수고했다는 말을 건넸다. 높은 직급은 아님에도 회사 내에서 얼마나 신뢰를 받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지수는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봤다. 옆에 앉은 송과장도 그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었지만,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송과장도 대기업에는 발을 들여보지 못했던 지라 이 회사의 격식과 분주함에 압도됐다.


지수와 송과장을 회의실로 안내했던 여직원도 회의실에서 나와 준혁이 이사진과 대화가 끝난 틈을 타 재빠르게 다가가 귓속말했다. 준혁은 곁눈질로 지수와 송과장이 있는 회의실을 바라봤다. 눈이 마주친 송과장이 벌떡 일어나서 꾸벅 인사했다. 준혁은 여직원에게 뭐라고 말하고는 곧바로 회의실로 오지 않고 반대 방향으로 가버렸다. 지수는 옆에서 허수아비처럼 선 송과장의 입에서 작게 욕이 흘러나오는 걸 들었다. 지수도 기분이 좋지 않았는데, 아무리 하청기업과의 회의라고 해도 그렇지 이렇게 사람 불러놓고 한참 기다리게 하는 것은 무례였다. 여직원이 회의실로 들어오더니 여긴 답답하다며 아래층에 있는 카페에서 이야기를 나누자며 두 사람을 안내했다. 송과장은 얼굴빛이 돌변하더니 발랄하게 서류를 챙겨 너스레를 떨며 따라나섰다. 지수도 입술을 꽉 물고 회의실을 나갔다.


빌딩 1층에 있는 카페의 내부는 오전 시간대라 그런지 한산했다. 여직원은 두 사람을 외부로 안내했다. 외부에는 테라스의 연장으로 인공 정원이 꾸며져 있었다. 바위 사이로 시냇물이 흐르고 꽃과 나무가 치밀하게 조성돼 있었다. 그 사이사이에 테이블과 의자가 놓여있었다. 지수와 송과장은 여직원의 안내에 따라 테이블에 앉아 메뉴판을 봤다. 여직원은 아무래도 이 근처에서 괜찮은 음식점을 가려면 멀리까지 나가야 한다며 시간이 부족하니 브런치를 함께 하자고 했다. 지수는 의사부터 묻지 않는 태도에 또 화가 났지만, 옆에서 송과장이 다양한 브런치 메뉴를 보며 감탄사를 내뱉고는 먼저 주문을 했다. 지수도 어쩔 수 없이 샌드위치와 커피를 주문했다.


여직원이 주문하러 간 사이, 지수는 주변을 둘러봤다. 도심의 빌딩 숲 속에 자연이 들어와 있다. 지수의 발치에서 흐르는 시냇물 소리가 너무 좋다. 빌딩 숲을 나가면 차들과 사람들로 북적인다. 서울 한복판에서 자연의 평화로움을 느낄 수 있다니. 지수도 이런 회사에 합격했다면 이런 직장 생활을 누리고 있었겠지. 부러움이 밀려왔다. 아직도 클라이언트는 내려오지 않았다. 카페 안에서 빵 굽는 냄새가 흘러나왔다. 어젯밤의 봄비로 수분을 머금은 흙에 햇볕이 드리우니 자연이 만든 잼의 향이라도 있는 듯 달콤한 냄새가 풍겼다.



중학생이었던 지수는 주말이면 부모님을 따라 시골 할머니 집에 농사일을 도우러 갔었다. 주말까지 학원에 나가기 싫었던 것도 있었지만, 부모님은 아이들이 시골에서 흙냄새를 맡으며 정서적으로 안정된 아이로 자라길 바랐다.


할머니의 주도로 아빠와 지수가 농사일을 도우면, 엄마는 집안 곳곳에 떼 묵은 곳을 청소했다. 그리곤 계란 입혀 구운 식빵에 유기농 잼을 바르고 설탕을 살짝 뿌려서 유리잔에 담긴 차가운 우유와 함께 내오곤 했다. 아침부터 고되게 일하면 평소보다 금방 출출해져서 간식으로 배를 채우고도 점심으로 차려진 할머니표 열무국수까지 깨끗이 해치웠다. 남동생은 동네에 사는 또래 사촌들과 도랑에서 가재를 잡느라 밥 먹는 시간을 놓쳤다. 남동생은 라면 봉투에 잡아 온 가재를 들어 올려 지수를 놀라게 하고는 푸하하 웃어젖혔다. 그러면 엄마가 남동생의 등짝을 소리 나게 때렸다.


새참에 점심까지 먹어 산처럼 솟은 배를 부여잡고 시원한 원두막에서 참외를 먹으면 학업 스트레스가 싹 날아갔다. 딱딱한 목침을 베고 누우면 불편한데도 스르르 눈이 감겼다. 산 위에서 내려오는 시원한 바람을 만끽하며 막힌 것 없이 펼쳐진 시골 풍경을 내려다보며 이 순간이 영원하길 바랐다.


쾅! 차 문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저쪽 건너편에 서 있는 고급 세단의 문이 닫히는 소리였다. 차 옆에 선 준혁은 출발하는 차에 대고 허리를 숙였다. 차가 주차장을 통과하고 나서야 준혁이 허리를 펴고 섰다. 지수와 송과장은 그런 준혁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봤다. "아무리 그래도 저렇게 일하면 금방 암이라도 걸려버린다고." 지수가 고개를 돌려 중얼대는 송과장을 바라봤다. 여직원이 물티슈, 포크, 나이프를 챙겨 왔다. 준혁이 뒤돌아 카페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왔다. 지수는 못 본 척 고개를 돌렸고 일어나 여직원을 도와 테이블을 세팅했다.


준혁은 자리에 앉자마자 늦어서 죄송하다며 연신 사과했다. 회의가 예정된 종료 시각보다 늦어져 본인도 무척 당황했다고 말했다. 준혁의 정중한 사과에 지수와 송과장은 괜찮다는 말만 반복했다. 브런치로 나온 음식은 지수의 입맛에 딱 맞았다. 준혁은 간단한 샐러드와 따뜻한 커피를 마시며 마지막 버전의 디자인 시안을 받아 들고 두 사람과 이야기를 나눴다. 별다른 이슈는 없었다. 준혁은 단지 오랫동안 온라인으로만 소통한 것이 아쉬워 직접 만나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준혁은 송과장과 앞으로의 일정을 공유했고, 실무를 담당했지만 처음 본 지수와 명함을 교환하며 다시 한번 인사를 나눴다.


식사를 마치고 세 사람은 로비에서 헤어졌다. 준혁은 다시 회사로 올라갔다. 지수와 송과장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 주차장으로 향했다. 복도를 걷는 지수의 뒤로 흙 발자국이 따라붙었다. 송과장은 차 문을 열며 지수의 흙 묻은 신발을 보더니 언제 흙밭에서 농사라도 짓고 왔냐며 장난스럽게 물었다. 지수는 지하 주차장 화장실로 달려가 흙을 털어냈다.


지수는 회사로 돌아가는 길에 송과장의 차 안에서 따끔한 충고를 들었다. 지수의 얼굴에 화가 잔뜩 달라붙어 있었다며, 아무리 그래도 사회생활에서 감정을 내비치는 것은 좋지 않다. 감정을 최대한 컨트롤할 수 있는 기술을 연마하라고 말했다. 지수는 숨기려고 노력했지만, 겉으로 드러났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아직 멀었구나.


지수의 손에 들린 핸드폰 액정이 번쩍였다. 남동생에게 문자가 왔다. '뭐 하고 살아?'


지수는 문자를 확인하지 않고 화면을 잠갔는데 연이어 문자가 도착했다. '주말에 엄마가 할머니네 가재.' 다시 화면을 잠갔는데 또 문자가 왔다. '나도 갈 거니까 와. 오랜만에 얼굴 봐.' 지수는 짜증 났다. '한 번에 좀 보내라. 제발...'


지수의 귀가 빨개졌다. 송과장은 운전대를 잡고 슬쩍 지수의 표정을 살폈다. 지수는 아까 전 준혁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샌드위치를 한입 베어 문 준혁이 지수에게 말했다. '한대리님, 붉은색 가디건 엄청 잘 어울려요.' 지수의 흥분한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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