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07. 아파트 작전

[연작 소설] <기억의 계절> - 봄 이야기

by 오묘미

좁은 엘리베이터 안은 마치 지구를 떠나는 우주선 같았다. 간헐적으로 깜박이는 조명 커버 위에 하루살이, 모기, 나방 등의 벌레 수십 마리가 죽어있었다. 마주 보고 붙은 거울에 반사된 지수의 모습이 무한히 복제됐다. 지수 안의 지수 안의 지수… 깊어질수록 형광등을 하나씩 꺼나간 듯 공간은 어두워진다. 어느 지점의 내가 진짜일까.


귀밑에서 꿀렁이는 묵직한 혈류가 느껴졌다. 심장 박동이 또렷이 들렸다. 곧 15층에 도착할 예정이었다. 노후한 엘리베이터의 느린 속도와 굉음이 두려움을 증폭시켰다. 지수는 아름의 어머니가 운영하는 노래방 홍보 전단지를 붙여달라는 부탁을 들어준 것이 조금 후회됐지만, 이미 늦어버렸다. 다 끝내고 배불리 얻어먹자. 피자, 치킨, 떡볶이, 탕수육...


엘리베이터 속도가 서서히 줄더니 도착음이 울렸다. 지수는 앞으로 둘러맨 검정 크로스백 지퍼를 열어 손을 넣었다. 문이 열렸다. 앞에는 아무도 없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지수는 두 갈래로 뻗은 복도를 바라봤다. 방범창에 걸린 양파망, 배수관에 묶인 킥보드와 자전거, 꽃 핀 화분과 항아리 등이 놓여있었다. 복도는 여러 세대가 공유하는 앞마당 같았다. 지수는 지체하지 않고 오른쪽 복도로 향했다.


첫 번째 문 앞에 도착한 지수는 크로스백에서 노래방 전단지 한 장을 재빨리 꺼냈다. 그와 동시에 주머니에서 스카치테이프를 꺼내 한마디 정도 끊어낸 후 전단지 끝에 붙였다. 전단지를 잡고 호수판 바로 밑으로 손을 뻗고 뒤돌아서니 등 뒤에서 전단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급정지한 지수가 전단지를 집어 들었다. 테이프 접착면이 맞붙어있었다.


한 팀이 된 아름과 민지는 아래층부터 전단지를 붙이며 올라갔다. 아름은 여러 번 이 일을 해봤는지 솜씨가 장인이나 다름없었다. 순찰 나간 경비아저씨를 감시하는 역할은 은혜가 맡았다. 평발인데다 체육 시간 달리기 측정에서도 꼴등이었기 때문이다. 경비아저씨가 보이면 손뼉을 쳐서 신호를 보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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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수는 하나로 붙어버린 테이프를 손톱으로 떼어내려고 애썼다. 그럴수록 전단지만 구겨졌다. 마치 초식동물처럼 주변을 경계하며 귀를 쫑긋 세웠다. 놀이터에서 연습까지 했건만.


지수는 테이프 떼기를 포기하고 전단지를 구겨 주머니에 쑤셔 넣고 곧장 새 전단지를 꺼냈다. 이번에는 전단지 끝에 붙인 테이프를 잡고 문으로 손을 뻗었다. 딸려 나온 전단지는 자석처럼 문에 찰싹 달라붙어 바람에 살랑살랑 흔들렸다. 첫 성공으로 지수의 자신감이 차올랐다. 용감해진 지수는 다음 호수로 넘어가 전단지를 붙였다.


은혜는 주차된 차 뒤에 숨어 초조하게 주변을 살폈다. 순찰 돌고 온 경비아저씨가 설렁설렁 걸어오는 것을 발견하자 손가락으로 아랫입술을 구겨 휘파람을 불었다. 은혜의 머릿속은 아까부터 무척 복잡했다. 약속했던 수신호인 손뼉을 치면 경비아저씨도 알아챌 거란 생각이 뒤늦게 들었다. 다른 신호를 생각하던 은혜는 어제 뉴스에서 봤던 스포츠 경기장 관중의 특이한 휘파람 방식이 떠올랐다. 단소를 잘 불어 비슷한 원리라고 생각한 게 큰 오산이었다. 소리는 전혀 나지 않고 바람 빠지는 소리만 났다.


다가오던 경비아저씨가 멈춰 서더니 분리수거장을 살펴봤다. 은혜의 시선에 13층에서 내려오는 지수와 8층에서 올라가는 아름과 민지가 보였다.


"야..!"


은혜는 목소리를 조금 더 높여 다시 불렀다. 아름의 곁에서 돕던 민지가 멈춰서 내려다봤다. 민지는 한창 재미 들렸는지 웃음 번진 표정으로 왜 부르냐는 제스처를 취했다. 은혜는 손가락으로 경비아저씨를 가리켰다. 의미를 알아챈 민지의 표정이 급변했다. 전단지를 붙이는 아름을 불러 세워 상의하더니 끝까지 붙이고 내려가겠다는 수신호를 보냈다. 은혜는 고개를 끄덕이고 지수 쪽을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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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하우를 터득한 지수도 속도를 높였다. 이동하며 테이프를 끊고 크로스백에 차곡차곡 쌓인 전단지 끝에 붙이는 동시에 그대로 뽑아내 문에 붙인다. 이렇게 하면 전단지에 손을 대지도 않고 최소한의 동작으로 끝낼 수 있다. 지수의 집중력을 흩트려 놓는 건 문 열린 집 안에서 흘러나오는 다양한 소리와 냄새들이었다.


학습지 교사를 따라 영어 단어를 외우는 아이의 목소리, 통돌이 세탁기 돌아가는 소리, 외국 야구 경기를 중계하는 해설진의 목소리와 라디오 음악소리.


락스에 식기 소독하는 냄새, 주전자에서 보리차 끓는 냄새와 압력밥솥에 밥 짓는 냄새, 장롱 안에서 나는 나프탈렌 냄새와 현관 구두 왁스 냄새.


그때 문이 활짝 열린 집에서 풍기는 향기를 맡은 지수의 발걸음이 멈췄다. 크로스백을 뒤로 돌려 매고 손가락에 붙여놓은 테이프를 꽉 쥐어 뭉뚱그렸다. 달콤하고 포근한 향기가 뱃속 어딘가를 간지럽혔다. 지수는 한 손을 뒤로 돌려 무의식의 선택지로 크로스백 끈에 쓸린 등을 긁었다. 발길을 돌려 다시 작업을 이어가려던 지수는 집 안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또다시 멈춰 섰다.


"어머니! 어제 빤 윗도리 어디다 놨어요?"


지수는 엄마를 어머니로 아빠를 아버지로 부르는 동갑내기 친구들을 보면 신기했다. 꼭 양반집 서생을 보는 것만 같달까. 지수도 초등학생 때까지는 부모님을 그렇게 불렀지만, 어느 순간부터 엄마, 아빠로 호칭이 굳어졌다.


문 뒤에 선 지수가 문틈 사이로 집안을 훔쳐봤다. 주방에서 설거지하는 아주머니가 빨랫줄에 널어놨으니 베란다 가서 찾아보라고 말했다. 맨발이 장판을 쓸며 이동하는 소리가 들리고 한 남자의 실루엣이 스쳐 지나갔다. 화들짝 놀란 지수는 뒤로 한 발짝 물러나 몸을 감췄다. 유리 달린 미닫이문 여는 소리가 들렸다. 현관문 좁은 틈으로 바람이 비집고 몰려나왔다. 그 흐름에 담긴 섬유유연제 냄새가 지수의 콧속으로 필터 없이 침투했다.


비현실적인 목격. 불시에 동작하는 알 수 없는 감각. 이론이 쌓여도 해석할 수 없는 미지의 세계. 지수의 심장은 여지없이 급하게 뛰고 있었다.


“찾았니?" 하는 아주머니의 물음에 남자는 한참 뒤 "네, 찾았어요."라고 답했다.


미닫이문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지수는 그제야 아파트에 울리는 한 박자씩 느린 박수 소리를 들었다. 반사적으로 몸을 돌려 계단을 향해 뛰려는데 미처 보지 못한 자전거에 부딪히며 복도에 철퍼덕 넘어졌다. 배수관에 자물쇠로 묶인 자전거가 요란한 소리를 내자 집안에서 설거지하는 소리가 멎었다. 지수는 정강이 통증을 꾹 참고 쩔뚝이며 계단을 내려갔다.


차 뒤에 숨은 민지, 아름, 은혜의 눈앞으로 경비아저씨가 담배를 피우며 지나갔다. 초조해진 아름이 전단지를 담아둔 비닐봉지에 바람을 불어넣었다. 옆에서 민지와 은혜가 박수를 멈추고 가만히 지켜봤다. 바람이 들어간 봉투를 풍선처럼 꾹 쥔 아름은 "귀 막아." 하더니 양손으로 봉투를 때렸다. 팡! 총소리가 울렸다. 앞에 걸어가던 경비아저씨가 놀라서는 허리를 바짝 숙이며 손으로 머리를 감쌌다.


지수는 어느새 1층까지 내려와 숨은 세 사람에게 손을 흔들고 뒤쪽 공원으로 도망쳤다. 경비아저씨가 놀라서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2층 복도에서 내다보는 아주머니에게 굉음의 정체를 묻는 사이 민지, 아름, 은혜 세 사람도 지수가 빠져나간 쪽으로 쏜살같이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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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봐! 각자가 고집이 너무 세서 항상 약속해도 자기 맘대로라니까.”


팔짱을 끼고 선 아름이 벤치 하나에 딱 붙어 앉은 세 사람에게 불만을 토했다. 아름은 자신의 보조였던 민지를 칭찬하면서 미리 짜 놓은 계획을 어긴 은혜와 지수를 노려봤다. 겁먹은 작은 동물처럼 좁은 벤치에 어깨를 부대끼고 앉은 세 친구를 보던 아름이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은혜의 얼굴엔 억울한 기색이 역력했다. 벤치 끄트머리에 한쪽 엉덩이만 걸친 지수의 코끝에는 그 집에서 맡은 향기가 남아 있었다. 실루엣으로 비췄던 남자의 모습은 상상이 덧칠돼 선명해져만 갔다. 만지면 기분 좋게 까슬까슬할 것만 같은 스포츠머리에다 훤칠한 장신의 키에 탄탄한 구릿빛 등판...


"야! 한지수!"


지수의 앞으로 다가온 아름이 소리쳤다. 정신이 번쩍 든 지수가 어벙한 표정으로 아름을 올려다봤다. 한참 지수를 바라보던 아름이 그만하자며 엄마가 크게 한턱 쏠 거라며 노래방으로 가자고 말했다. 앞장선 아름이 쩔뚝이며 뒤따라오는 지수를 바라봤다. 지수가 멈춰서 한쪽 바지를 걷어올렸다. 정강이에 주먹 만한 피멍이 들어있었다. 세 친구는 크게 놀랐다. 아름은 갑자기 눈물을 터뜨리더니 약 발라줄 테니 자기 집으로 가자며 지수를 부축했다.


지수는 그 집의 냄새를 맡으러 돌아가고 싶었지만 그렇게 하지 못했다. 이 아파트가 오래도록 그 자리에 남아 있어 주길 마음속으로 간절히 바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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