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작 소설] <기억의 계절> - 봄 이야기
지수는 집에서 점심을 먹고 여유롭게 나왔다. 조금만 걸으면 넓은 도로변 버스정류장이 나온다. 평일 대낮 길거리에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버스정류장에 선 지수는 버스가 도착하기 전까지 햇볕을 째며 멍하니 시간을 보냈다. 올라탄 버스 내부에 승객 두 명이 앉아 있었다. 회사 도착까지는 30분 정도 걸린다. 대표와 약속했던 출근 시간까지는 충분히 남았다.
좌석에 앉으니 에어컨 바람이 지수의 뒷덜미를 타고 내려왔다. 긴팔 셔츠를 입고 나와 약간 덥다고 생각했던 차에 에어컨은 대환영이다. 요즘 풍경의 변화는 하루아침에 뒤바뀔 정도로 예측 불가다. 계절의 선명했던 크로스 패턴이 점점 희미해진다. 그래서 에어컨의 작동 여부는 계절의 변화를 체감할 수 있는 중요한 요소 중 하나가 됐다. 버스나 지하철, 카페나 음식점의 에어컨 작동 여부를 보면 '시간이 벌써 이렇게 흘렀구나' 하고 피부로 느낀다.
지수는 게슴츠레한 눈으로 창밖을 구경하며 꾸벅꾸벅 졸았다. 나른해 늘어진 몸을 푹신한 좌석에 맡기고 이대로 본가로 향하고 싶었다. 오후 3시쯤 집에 도착해 아무도 없는 집안 소파에 누워 TV를 켜 놓고 낮잠을 자면 완전 지상 낙원이지 않을까.
지금 다니는 회사에 만족하고 있었다. 대표는 지수에게 친절했고 배울 점이 많았다. 업무의 강도도 무난했다. 저번 직장에서는 일부 직원이 지수에게 모함을 씌웠다. 지수에게 진실과 성실은 자신이 믿는 유일한 능력이었다. 그들은 지수의 업무태도를 사사건건 지적하며 상사에게 보고하고 가스라이팅했다. 그 후, 지수는 우울함이 지속돼 병원에서 심리 상담을 받고 신경 안정제 처방을 받았다. 약을 먹으면 기분이 나아졌지만, 그들의 얼굴만 봐도 심장은 요동치고 온몸이 뜨겁게 타올랐다. 지수를 믿어주는 동료도 많았지만, 상처받은 마음은 어떻게 할 수 없었다. 얼마 안 가 사직서를 제출했다.
갑작스러운 퇴사에 계획이 틀어졌다. 계약 기간이 아직 많이 남은 단칸방 월세가 아까워 엄마 집으로 들어가려고 했지만, 엄마는 완강히 거부했다. 자기 딸이 캥거루족이 되는 건 싫다는 이유였지만, 그때 당시 엄마의 메신저 프로필 사진을 보고 짐작할 수 있었다. 새로운 남자를 만나고 있었다는 것을. 시골에서 홀로 사는 할머니 집에 짐을 보관하고 친구에게 부탁해 임시로 거주를 해볼까 고민하던 찰나, 엄마는 차라리 할머니와 함께 살아보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그렇게 지수는 할머니와 함께 시골집에서 1년 정도를 지냈다.
할머니는 꽃을 좋아해 앞 밭에 농작물을 재배하고 함께 꽃밭을 가꿨다. 할머니는 꽃 이름을 외며 가장 예쁘게 핀 꽃을 골라 화분에 옮겨 심어 집으로 가져와 시멘트 바닥 위에 전시했다. 가끔 놀러 오는 이웃 할머니와 아주머니가 꽃이 예쁘다고 하면 하나씩 집어가라고 나눠줬다. 꽃을 분양해 간 이웃은 다시 찾아와 포도, 사과, 꿀 같은 귀한 먹을거리로 답례했다.
농번기에 접어들자, 할머니 집을 찾는 손님이 현저히 줄었다. 할머니는 무릎 신경통이 악화 돼 꽃밭을 관리하는 것을 버거워했다. 화분이 전시돼 있던 자리에는 동그랗게 마른 물 자국이 남았다. 건너편 작은 방에 누운 지수는 무릎 통증에 끙끙대는 할머니 신음에 밤잠을 설쳤다. 다음 날 지수는 동네 슈퍼마켓에서 파스를 사 와 할머니 무릎에 붙여드렸다. 할머니가 손가락으로 짚는 곳마다 파스를 붙이니 검버섯 핀 가는 다리가 파스로 도배됐다. 풀벌레 우는 소리 덕분인지 신음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강한 파스 냄새가 지수의 방까지 흘러들어왔다.
여름 문턱에 이르자 공기가 한층 뜨거워졌다. 툇마루에 앉아 부채질하며 아무도 드나들지 않는 대문을 바라보던 할머니는 방에서 취업 공부하는 지수를 불렀다. 할머니는 꽃 이름을 대며 앞 밭에 가 그 꽃을 화분에 담아와 달라고 부탁했다. 지수가 무슨 꽃인지 모르겠다고 하자 할머니는 자신의 방식대로 생김새를 묘사했다.
앞 밭에 간 지수는 생김새가 비슷한 꽃을 모종삽으로 뿌리째 퍼서 화분에 담았다. 가져온 화분에 물을 흠뻑 주고 시멘트 바닥에 전시하니, 그걸 본 할머니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오후가 되자 진흙 묻은 장화를 신은 이웃들이 대문 앞을 지나다 멈춰 화분을 구경하러 들어왔다. 꽃 이야기, 농작물 이야기, 시장 단가 이야기를 늘어놓으면 할머니는 옆에 앉아 듣기만 했다. 손님이 돌아가면 빈자리를 옆에 놓인 화분으로 채웠다.
세 정류장 미리 내린 지수는 가로수가 빼곡한 골목으로 들어갔다. 언젠가 SNS를 보고 스크랩해 둔 꽃집을 찾았다. 단층 건물에 철공소가 많이 보였다. 향긋한 풀 냄새와 비릿한 철 냄새가 혼합됐다. 이런 곳에 정말 꽃집이 있을까. 핸드폰으로 지도를 보며 골목 깊숙이 들어가 ㄷ자로 방향을 꺾자 3층 높이의 오래된 콘크리트 건물이 나왔다. 벽에 설치된 흰색의 아담한 꽃집 간판이 보였다. 페인트가 벗겨져 노출된 콘크리트 창틀을 그대로 살려 리모델링한 꽃집이 드러났다.
지수는 열려 있는 출입문으로 들어갔다. 주인은 보이지 않았다. 문 앞에 놓인 나무 의자에 앉아 주변을 둘러봤다. 꽃 향기가 은은히 풍겼다. 창문으로 들어온 햇빛이 군데군데 페인트 묻은 시멘트 바닥에 떨어졌다. 빛은 편하게 발 뻗은 캔버스 신발 끝을 가로질렀다. 바스락대는 나일론 치마 밑으로 정강이 흉터가 보였다. 지수는 발을 살짝 뒤로 물러 무릎을 세워 숨겼다. 뒷문이 있었는지 문 여닫는 소리와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앞치마를 두른 30대 초반의 여자 주인은 지수를 보더니 깜짝 놀라며, 손님이 와 계신 줄 몰랐다고 말했다.
주인은 어떤 꽃을 찾느냐고 물었다. 지수는 의자에서 일어나 쇼케이스에 있는 꽃 몇 송이를 골랐다. 주인은 꽃의 이름을 대는 지수가 신기했는지 어떻게 그렇게 잘 아냐고 물었다. 그러고는 습관처럼 앞치마에 손을 앞뒤로 문지른 뒤, 쇼케이스를 열어 꽃을 조심히 꺼내 성심성의껏 포장했다. 지수는 모른 척 꽃을 둘러봤다.
주인은 포장된 꽃다발을 건네며 예쁘게 선물하라고 말했다. 누구에게 선물할 생각이 없었던 지수는 회사에 가져가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머릿속에 회사 직원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저번 클라이언트와의 미팅 때 고생한 과장님한테 드려야 하나. 요즘 대표님이 내는 숙제 때문에 퇴근해서도 밤새 일하는 막내 직원에게 줘야 할까. 아니면, 저녁 퇴근길에 찾으러 오겠다고 말해야 하나.
지수는 꽃집을 나가기 전, 주인에게 종이봉투가 있냐고 물었다. 주인은 의아해하면서 서랍 안에서 길쭉한 종이봉투를 꺼내 꽃다발을 담았다. 지수는 죄송하다고 사과했다. 주인은 죄송할 필요 없다고 말했다. 지수에게 오래도록 관리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줬다. 지수는 꽃집을 나갔다.
회사에 도착하니 막내 직원만 남아 휴게실에서 핸드폰을 보며 샐러드를 먹고 있었다. 막내 직원은 지수를 보더니 왜 이렇게 일찍 왔냐며 다들 점심 먹으러 가서 아직 들어오지 않았다고 말했다. 종이봉투에 담아 온 것이 궁금한지 힐끔거리자, 지수는 어쩔 수 없이 꽃을 꺼내 보여줬다. 막내 직원이 어디서 받았냐고 물었다. 지수는 그냥 샀다며 어디에 둘지 고민이라고 말했다. 종이봉투에 감금된 꽃다발을 꺼내자 막내 직원은 귀여운 강아지라도 본 듯 꺄 하고 소리를 냈다. 지수는 꽃을 회사 곳곳에 나눠 두기로 했다..
신난 막내 직원이 창고로 달려가 연말에 마시고 쌓아둔 빈 와인병을 꺼내왔다. 지수는 막내 직원과 함께 와인병 세 개를 골라 물로 헹구고, 꽃을 적절히 나눠 꽂았다. 하나는 출입구 앞 선반 위, 또 하나는 대표님의 책상 위, 마지막으로 블루투스 스피커 옆에 놓았다. 꽃 향기와 와인의 씁쓸한 잔향이 뒤섞여 사무실에 가득 퍼졌다.
다 먹은 샐러드를 정리한 막내 직원이 자리에 앉은 지수에게 다가왔다. 아까 전 클라이언트가 갑자기 찾아와 대표님과 미팅했다고 말했다. 지수와 같이 점심을 먹을까 하다가, 오래 기다리지 못하고 나갔다고 말했다. 향에 취한 지수는 그 말을 듣는 순간, 자신의 일탈을 주먹으로 쥐어박고 싶어졌다. 꽃을 사지 않고 평소처럼 부지런히 왔다면 그를 만날 수 있었을까. 그도 그런 마음에서 충동적으로 계획에서 이탈했던 건 아닐까.
막내 직원이 자리로 돌아갔다. 지수는 머리를 쓸어 넘기고 다리를 꼬고 앉아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때, 일본 여행에서 돌아온 남동생에게 문자가 왔다. 일본에서 사 온 기념품을 주러 조만간 찾아오겠다고 했다. 지수는 자신이 가지러 가겠다고 말했다. 남동생은 아직도 옛 동네에서 자취하고 있었다. 지수는 오랜만에 그 동네를 돌며 여러 곳을 보고 싶어졌다. 살았던 아파트와 친구들과 놀던 곳, 고민에 빠져 걷던 공원과 기쁨에 소리 외쳤던 곳까지… 그리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