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09. 밤 도시 풍경

[연작 소설] <기억의 계절> - 봄 이야기

by 오묘미

야간 자율 학습(일명 야자)은 필수였지만, 여러 이유를 대고 빠지는 학생들이 많았다. 이유를 공개하지 않고 도망치거나 중간에 어디론가 사라지는 미스터리한 학생도 있었다. 끝까지 자리를 지키는 몇 안 되는 학생 중 하나가 지수였다.


석식을 먹고, 아름과 민지는 담임 선생님에게 찾아가 사실인 것만 같은 이야기를 지어내 야자를 빼려고 시도했다. 이미 두 사람의 특성을 파악해버린 담임 선생님은 사연을 여유롭게 즐기고는 결국 그 의도를 단칼에 잘랐다. 그럼 민지는 일찍이 포기하고 자리로 돌아갔지만, 아름은 개의치 않고 가방을 들고 교실을 빠져나갔다. 그 모습을 본 민지도 결국 아름을 따라 교실을 나갔다. 지수는 단짝 친구인 아름과 민지의 유혹에도 뒤따라가는 경우는 드물었다. 체벌의 공포가 이성을 통제해 버린 것도 있지만, 애초에 부모의 속 한 번 썩인 일 없는 천성적인 부분도 있었다.


시작종이 울리고 남은 학생들은 몰래 딴짓하려고 삼삼오오 모이거나, 공부에 집중하려고 각자 떨어져 앉았다. 창가에 앉은 지수는 반대편 구석에 앉아 노트를 펴고 공부하는 은혜를 바라봤다. 은혜는 다른 친구들과 달리 학원에 다니지 않는데도 성적이 좋았다. 반면, 지수는 남들 할 거 다 하는데도 성적은 중상위권에 머물렀다. 일찍이 공부를 포기하고 싶었지만, 부모님의 요구에는 따라야 했다.


지수는 순찰 도는 선생님의 시야에 들어오지 않는 쪽 귀에 이어폰을 끼고 MP3로 음악을 들으며 창밖을 바라봤다. 학교가 높은 야산에 있어 도시가 내려다보였다. 각양각색의 불빛이 별처럼 반짝였다. 도시의 불빛은 밤의 어둠을 허락하지 않았다. 하늘은 회색빛을 띠었고, 이제 별빛은 찾아보기 어려워졌다. 지수는 공상에 잠겼다. 인간이 만들어낸 별빛이 온 우주를 잡아먹게 된다면 밤의 풍경이 사라지지 않을까.


도시의 경계선에 우뚝 솟은 아파트가 보였다. 지수가 사는 곳이었다. 휙 하늘을 날면 순식간에 도착할 것만 같이 가까워 보였다.



오후 8시 50분이 되자 종료 벨이 울렸다. 교과서에 실린 마르크 샤갈의 그림 위에 침이 흘렀다.


꾸벅꾸벅 졸던 지수는 잠에서 깨 책상을 정리했다. 지수를 포함해 학원 가는 학생들이 짐을 쌌다. 11시까지 자진해 자율학습 하는 부류인 은혜는 인강을 들으며 문제풀이에 여념이 없었다. 가방을 멘 지수가 은혜 곁으로 다가가 말을 걸었다. 은혜는 듣지 못했다. 지수가 은혜 눈앞에 손을 흔들었다. 그제야 은혜가 고개를 들었다. “끝났어. 먼저 갈게.” 은혜는 고개를 끄덕이고 손을 흔들었다. 지수는 은혜를 두고 교실을 나와 학원 차를 타러 뛰었다.


정문 앞에는 버스와 봉고차 형태의 수많은 학원 차가 정차해 있었다. 지수가 타는 학원 차는 야자가 끝나는 시간에 맞춰 서 있다가 10분을 기다리고 출발해 버린다. 학원 차를 놓치면 버스나 택시를 타고 이동해야 하는데 그러기에는 용돈이 부족했고, 또 엄마한테 한 소리를 듣게 된다. 지수는 주차된 학원 봉고차에 올라타 맨 뒷자리에 앉았다. 창문이 활짝 열려있었다. 학생 네다섯 명이 타자 곧 출발했다. 오늘은 기사가 담배 피우느라 1분 늦게 출발했다.


차가 달리는 대로 바람이 세차게 들어왔다. 공기 중에는 근처 공단에서 넘어온 특유의 화학 물질 냄새가 났다. 지수는 고개를 돌리지 않고 얼굴 그대로 바람을 맞았다. 머리카락이 마음대로 흩날렸다. 강한 바람의 마찰 때문인지 얼굴이 뜨끈해지고 마비되는 느낌이 들었다. 시내 유흥가에 진입하자 차가 막혔다. 매연과 각종 냄새가 코를 찔렀다. 창틀에 팔을 올리고 턱을 괸 지수는 개성대로 꾸민 성인 남녀를 바라보며 언제 저런 자유를 누릴 수 있을까 부러워했다. 그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것도 모른 채로.


봉고차는 고등학교 두세 군데를 경유해 학생을 태우고 시내를 빠져나와 넓은 도로를 달렸다.



계획도시의 차도는 시원하게 쭉쭉 뻗었다. 개천을 지날 때면 갯벌에서 맡았던 비린내가 풍겼다. 가로수 길을 지나면 땅과 뿌리, 나뭇잎의 시원하고 상쾌한 냄새가 났다. 그렇게 취해 있다 보면 봉고차는 어김없이 학원 건물 앞에 도착했다. 학원생들은 말없이 차에서 내려 마치 다른 교도소로 이감되는 수감자들처럼 어두운 골목에 있는 건물로 줄지어 들어갔다.


지수는 기사가 차 앞에 서서 담배 한 개비를 다 피울 동안 앉아 있었다. 학원 건물 앞에 도착할 때마다 아름과 민지를 따라갔었어야 했나 하는 생각을 한다. 자유는 속박이 있어야만 실감한다. 자유는 자유롭지 않기에 소중하다. 자유엔 책임도 따른다. 하지만 그게 온전한 나의 선택이 아니라면... 끝없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 물음은 매번 부모님의 말처럼 딱 1년만… 아니 몇 개월만 참아보자는 다짐으로 끝낸다.


지수는 봉고차에서 내려 학원 건물로 향했다. 그때, 건너편에 도착한 다른 학원 버스에서 은혜가 내리는 것을 봤다. 은혜의 옆에는 남학생이 함께였다. 둘은 나란히 걸으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눴다. 상고머리를 한 남학생은 얼굴이 아주 하얗고 뽀얬다. 검정 뿔테 밑으로 보이는 쌍꺼풀이 아주 짙었다. 둘은 학생 무리에 섞여 맞은편 건물로 들어갔다. 6층에 학원 간판이 보였다.


지수의 눈앞이 아득해졌다. 온몸에 소름이 돋고 얼어붙었다. 이건 무슨 감정일까. 지수는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이 궁금증을 해소하지 않으면 더 큰 고통과 오해가 생겨날 것이다. 지수는 둘이 사라진 학원 건물로 들어갔다.



6층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지수는 로비에서 앞 수업이 끝나길 기다리는 학생들과 마주쳤다. 지수는 학생들 사이를 뚫고 안쪽으로 들어갔다. 좁고 긴 복도를 사이에 두고 양옆으로 5개씩 강의실 문이 있었다. 눈높이쯤에 작은 유리창이 있었다. 창을 통해 안을 들여다볼 수 있었는데 15명 남짓 학생이 앉을 수 있었고, 문을 등지고 앉게 되어 있었다. 내부에서 강사가 수업을 하면, 다른 강사가 복도를 돌며 창문 안을 들여다본다. 그러면 앞사람 등 뒤에 숨어 딴짓하는 학생을 볼 수 있다. 경력이 오래된 강사는 그 모습을 발견하면 수업 중이라도 문을 살며시 열고 들어와 그 자리에서 머리를 한 대 타작하던지, 밖으로 나오게 해 돌려세워 엉덩이를 타작했다.


지수는 방금 수업이 시작된 강의실 문 앞에 섰다. 안에서 강사가 출석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손바닥 만한 창문 안을 들여다봤다. 맨 뒷자리에 앉은 은혜와 남자가 보였다. 안에서 은혜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은혜가 대답했다. 곧 남자의 이름이 불렸다. 강민구. 두 사람은 나란히 붙어 앉아, 가운데에 노트를 두고 각자의 펜으로 메시지를 적었다.


복도는 수업 끝난 강의실에서 쏟아져 나오는 학생들과 들어가는 학생들로 뒤엉켰다. 지수는 뒤돌아 그 사이를 뚫고 비상계단으로 나와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아름과 민지를 따라갔더라면 은혜의 비밀을 알지 못했겠지. 차라리 몰랐으면 좋았을 것을… 학원을 다니지 않는다고 했는데 왜 거짓말을 한 걸까? 굳이 왜? 저 강민구라는 애 때문에? 사귀는 걸까? 단순히 친구겠지.


거리로 나온 지수는 곧 수업이 시작될 시간이었지만 학원 갈 생각을 잊었다. 오늘 결석하면 내일 엉덩이를 맞겠지. 다음날이면 선명한 붉은 자국이 남는다. 엄마는 아침부터 잠자는데 들어와 이불을 들추고 깨우거나 꼭 옷 갈아입을 때 벌컥 문을 열고 들어온다. 그렇게 학생 생활에 대해 일절 이야기하지 않는 딸의 상태를 은밀히 확인할 수밖에.


강의가 끝나고 집에 도착하면 새벽 1시다. 지수는 학원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집까지 걸으며 생각과 감정을 정리하고 싶었다. 아파트가 있는 방향으로 정처 없이 밤길을 홀로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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