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작 소설] <기억의 계절> - 봄이야기의 마지막
지하철을 탄 지수는 출입문 옆 구석 자리에 앉아 핸드폰으로 노선을 찾아봤다. 최근 일본 여행을 다녀온 남동생 수호의 집에 가는 길이었다. 한 보따리 샀다는 기념품을 받으러 갈 겸 옛 동네도 구경해보고 싶었다. 수호의 말로는 너무나 많은 것이 허물어지고, 주변과 어울리지 않는 것들이 들어섰다고 했다. 지수는 출발지와 도착지를 선택한 후 노선을 확대했다. 수호가 알려준 새로 개통됐다는 역에서 잊지 않고 내려야 했다. 실내가 시원하고 승객도 적어 한산하니 노곤해 눈이 감겼다.
지수가 대학을 졸업할 때쯤 가족이 흩어졌고, 옛 동네에 남은 건 남동생 수호뿐이었다. 수호는 지역 공단에 취직했다. 그곳에서 만난 여자 친구와 자취방을 얻어 동거 중이었다. 아무래도 결혼할 계획까지 가지고 있는 거 같았다.
지수의 눈꺼풀 위로 빛이 통과했다. 눈을 떠보니 열차는 지상으로 나와 고가로를 달리고 있었다. 아래로 주택이 내려다보였다. 높은 빌딩과 건물이 빼곡한 서울과 달리 이곳은 하늘이 시야의 반을 넘게 차지했다. 도시는 인간의 영역과 자연의 영역을 적절히 분배했다. 이곳에 살던 시간 동안 하늘 볼 날이 참 많았다. 그 시절은 구름처럼 평화롭고 여유롭게 흘렀다.
지수는 수호가 알려준 역에서 내렸다. 갓 지어 깔끔하고 따끈따끈한 시설에서 신축 건물 특유의 냄새가 났다.
역사를 나오니 넓은 광장이 펼쳐졌다. 이전에는 동을 잇는 길쭉한 공원이 있었는데, 그 길이 그대로 지하철로 뚫렸다. 주변을 둘러봤다. 푸른 잎사귀가 풍성한 굵은 가로수가 낮은 아파트와 주택을 품고 있었다. 고향에 온 이 기분. 그것만으로도 추억이 새록새록 떠오르고, 마음이 안정된다. 어제 받았던 업무 스트레스와 그동안 서울살이에 찌들었던 고민들은 아무것도 아니게 된다.
빵! 갓길에 서 있던 승용차에서 경적이 울렸다. 지수가 깜짝 놀라 돌아보니 수호가 창문을 열고 손을 흔들었다. 조수석에는 사귀고 있다는 여자 친구가 타고 있었다. 지수가 알아보자 그녀가 꾸벅 고개 숙여 인사했다. 수호는 갓길에 차를 세운 터라 지수에게 빨리 타라고 손짓했다. 지수는 빠르게 뒷좌석에 올라탔다.
차 안은 이미 밝은 기운이 가득했다. 잠이 덜 깨 몽롱한 지수와 달리 둘은 오는 길에 끊임없이 대화를 나눴는지 목도 트여있었고 발음도 또박또박하니 텐션도 높았다. 수호는 자신의 여자 친구를 소개했다. 그녀의 이름은 송혜인이었다. 수호가 혜인에게 챙겨 온 쇼핑백을 전달해 달라고 했다. 혜인은 다리 사이에 둔 쇼핑백을 지수에게 건넸다. 지수가 열어보니 안에는 일본 전통 액세서리, 지역 특산물 과자, 과일 젤리, 동전 파스 등이 들어있었다. 지수가 왜 이렇게 많이 샀냐고 묻자, 본인은 엄마와 누나가 말한 것만 사려고 했는데 혜인이 정 없다며 캐리어를 꽉 채웠다고 말했다.
옆에 있는 혜인의 영향인지 지수는 오랜만에 만난 남동생이 조금은 낯설었다. 철부지 같았던 수호를 혜인이 꽉 잡아주고 있는 듯했다. 아직도 수호는 털털하고 나사가 하나쯤 풀린 듯 말을 했지만, 혜인의 필터를 여러 번 거쳤던지 나름대로 정제되어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수호는 누나 앞에서 어리광부리던 철없는 남동생으로 돌아왔다. 그 모습을 본 혜인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수호를 빤히 바라봤다. 의외의 모습에 꽤나 놀란 눈치였다.
지수가 차창 밖을 바라보자, 수호는 동네가 많이 바뀌지 않았냐고 물었다. 지수는 여전히 그대로라고 말했다. 오래된 상가 건물들, 복도식 아파트와 쭉쭉 뻗은 차도까지. 지수가 태어나고부터,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모두 보낸 이 동네 곳곳에 기억이 심어져 있었다. 무엇을 보던 어두운 창고에 저장된 먼지 쌓인 추억이 영사됐다.
한낮 기온이 30도를 넘어서 정말 여름에 들어선 듯 후덥지근해 땀이 흘렀다. 수호는 가까운 곳에 막국수 맛집이 있다며 그곳으로 지수를 데려갔다.
주말 낮 점심시간이라 그런지 넓은 주차장은 이미 만차였다. 주차요원의 안내에 따라 갓길에 주차하고 음식점 안으로 들어갔다. 지수는 혜인의 추천으로 열무 막국수를 시켰다. 주문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음식이 나왔다. 항아리에 담긴 살얼음 뜬 열무 육수를 메밀면이 담긴 그릇에 부었다. 붉은 양념과 살얼음 육수가 고루 섞였다. 수호와 혜인은 벌써 배합을 끝내고 면을 흡입하고 있었다. 지수는 우선 그릇을 들고 육수를 한 모금 마셨다. 시원함과 새콤함에 서늘한 기운이 온몸에 퍼졌다.
점심을 먹고 혜인이 찾아놨다는 카페로 향했다. 이동하는 차 안에서 수호와 혜인은 사소한 내용으로 투닥거리며 대화를 나눴다. 싸우는 건지, 대화하는 건지 아리송했다. 혜인은 수호의 평소 자잘한 행동과 말투를 그의 친누나에게 일러바쳤다. 그럴 때면 지수는 혜인의 편에 서서 남동생을 나무랐다. 수호가 주눅이 들면 혜인은 까르르 웃었다.
동네 외곽으로 접어들자 익숙한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지수가 다녔던 고등학교였다. 두 사람이 이야기하는 틈에 지수는 고등학교의 달라진 점을 찾았다. 모래 운동장이 인조 잔디로 바뀌어 있었다. 이맘때쯤이면 어디선가 불어온 거센 돌풍이 운동장을 사막처럼 뒤덮곤 했다. 그 와중에도 체육 수업은 진행됐다. 남학생들은 선생님이 시키지도 않았는데 땀을 뻘뻘 흘리며 얼굴이 빨개지도록 모래 속에서 축구를 했다. 지수와 친구들은 벤치에 앉아 손바닥 만한 영단어장을 들고 시험공부를 했다.
고등학교를 지나 예전 논밭이었던 곳을 지났다. 여기까지 지하철이 뚫려 논밭이 반은 사라져 있었다. 그리고 지수가 오랫동안 가족들과 함께 살았던 아파트가 나왔다. 지수는 헛것을 봤는지 두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아파트는 사람이 살지 않는 폐건물이 되어 있었다. 온몸의 살갗이 벗겨져 시멘트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창틀은 제거되었고, 문에서부터 가스 배관과 수도관도 깨끗이 제거되어 있었다. 아파트라는 주거지에 인간이 살았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꼭 주인 없는 빈 벌집 같았다.
밝은 대낮과 달리 시멘트에 송송 뚫린 구멍 안쪽은 귀신이라도 살고 있을 것처럼 어두웠다. 주변을 둘러싼 흰색 철제 패널 울타리에 붉은 페인트 낙서가 있었다. 쇠사슬 걸린 철문 앞에 출입 금지 현수막이 걸려있었다. 크게 충격받은 지수를 내부 후사경으로 바라보던 수호가 말했다.
"완전 귀신의 집이 다 됐지. 기억나? 이 아파트."
수호는 이렇게 말했다. 그도 아쉬울 것이었다. 오랫동안 살았던 곳이니까. 수호도 이곳에서 친구들과 많은 추억을 쌓았다. 그리고 가족들과 그 좁은 방 안에서 투닥거리며 살았던 기억들도 공유하고 있었다.
"최근에 한 번 지진이 크게 났었잖아. 그때 이 아파트도 내진 성능 평가를 했는데 주거 부적합 판정을 받았대. 왜, 우리 살 때도 벽에 금 가 있고 그랬었잖아."
지수는 갈라진 틈에서 피어나던 노란 민들레 꽃을 기억했다. 혜인은 본인도 이 동네 토박이라면서 말을 보탰다.
"연말에 아파트를 허물고 내년 초에 새 아파트가 들어설 건가 봐요. 뭐 푸르지오나 자이 같은 거겠죠."
앞 차와의 거리가 벌어졌다. 신호가 바뀌기 직전 수호가 액셀을 밟아 로터리를 빠르게 통과했다. 아파트는 뒤로 점점 멀어져 갔다. 흰 구름이 떠가는 파란 하늘 아래 선 굵은 회색의 콘크리트 매터리얼. 건축가의 선과 면이 적나라하게 노출된 모습.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닌 땅속 깊은 곳에 숨어있던 암반이 지질의 뒤틀린 틈새로 누출되어 솟은 바윗덩어리. 꼭 그렇게 보였다.
지수는 멍했다.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역에서 나와 주변을 둘러볼 때의 기분과 달리. 기억 속 창고에 쌓였던 것 중 그 무엇도 앞장서지 않았다. 오히려 더 깊숙이, 더 어둡고 구석진 의식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으로 숨어들고만 있었다. 어두운 방 안 이불속에 머리를 파묻은 겁 많은 소녀처럼. 침대는 무엇에 걸렸는지 달빛에 물든 수면 위에 둥둥 떠 있었다.
'이 아파트는 기억의 암초다!‘
어떤 곳에 있든 따라다니는 암초. 아무리 세상이 팽창해도 그곳에 뿌리박고 멈춰 선 새까맣고 희끄무레한 암초다.
이것은 수면 아래에 존재하기도, 매일 같이 지나가는 문 앞에 존재하기도 한다. 보이지 않으려고 하면서도 꼭 봐달라고 애원하듯 눈앞에 어른거리기도 한다. 이것은 사적인 매개체로 치부되면서도, 어딘가 아픈 데도 아무 문제가 없다는 의사의 말을 듣는 것처럼, 모두가 겪는 정신 병리적 증상이기도 하겠다.
우리는 기억의 암초와 마주할 필요가 있다. 지수의 경험처럼 지금도 어딘가에 뿌리내려 죽순처럼 계속해서 자라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암초는 물이 빠진 뒤에 드러나게 되어 있지만, 어쩌면 죽기 전까지도 모를 수 있다. 그러나 눈을 감기 직전, 그것은 불현듯 무의식 위로 떠오를 것이다. 프로이트와 같은 심리학자의 책 한 권 읽어보지 않았음에도, 누구나 무궁한 꿈의 세계를 동경하고, 꿈속에서 살고 싶어 하는 몽상가인 것처럼. 아는 자에게는 좌표가 되고 모르는 자에게는 암초가 되는, 무해하고 미스터리한 어떤 습성의 시초일 수 있기 때문이다.
지수는 앞에 앉은 두 사람 수호와 혜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속으로 물음을 건네고 있다. 에어컨의 냉기에 몸이 으슬으슬 떨리고, 팔뚝에 닭살이 돋았다. 이 지점은 지수가 겪은 봄의 끝이라고 말하긴 어렵다. 다만, 기억의 시작과 끝을 본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지수는 이 사계절 이야기의 마침표를 보았을지도 모른다
*<기억의 계절> 여름 이야기로 계속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