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06. 자수 손수건

[연작 소설] <기억의 계절> - 봄 이야기

by 오묘미

역방향 좌석에 앉은 지수의 눈앞으로 초록빛 번진 도시 풍경이 빠르게 멀어졌다. 지수는 평일 하루 연차를 내고 할머니 집으로 가는 길이었다. 가까운 지역에 사는 엄마가 먼저 도착해 있을 예정이었다. 남동생도 시간 맞춰 온다고 했으니 아마 밥시간에 맞추겠단 소리겠구나 생각했다.


큰 짐을 품에 안은 지수는 머리를 좌석에 기대고 빈 옆자리를 바라봤다. 창쪽 좌석의 주인은 나타나지 않았다. 며칠 전 예매 사이트에 들어간 지수는 깜짝 놀랐는데, 평일인데도 남은 좌석이 많지 않아서였다. '나만 빼고 다들 놀러만 다니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남은 자리라고는 지수가 좋아하지 않는 역방향에다가 복도쪽 자리뿐이었다.


잠에서 깨고 보니 도착 10분 전이었다. 옆자리는 아직도 비어 있었다. 지수는 혹시나 누군가 앉지 않을까 싶어 꼭 안고 있던 묵직한 짐가방을 옆에 내려놓고 기지개를 켰다.


KTX에서 내리니 산뜻하고 시원한 기운이 감돌았다. 주변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기 때문인 듯했다. 지수는 정류장에 서 있는 택시를 타고 더 깊은 산속 동네로 향했다. 아스팔트가 깔려 있었지만, 군데군데 부서지고 거름이 떨어져 있어 택시는 가다 서기를 반복했다. 번거로운 길에도 기사는 말없이 정면과 백미러를 번갈아 보며 성실하게 운전했다.


택시는 낮은 담벼락의 집 앞에 멈춰 섰다. 내비게이션이 목적지에 도착했다고 안내했다. 도로의 끝이기도 했다. 지수는 신용 카드로 요금을 지불하고 내렸다. 택시는 파란 대문 앞에 서 있는 연식이 오래된 흰색 승용차를 피해서 유턴해 빠져나갔다.


할아버지,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까지 사셨던 집이었다. 짐은 대부분 뺐지만 팔리지 않아(아니면 일부러 팔지 않았는지) 방치된 상태였다. 엄마는 가끔씩 이 집에 찾아와 갈라진 시멘트 사이로 돋아난 잡초를 뽑고, 처마 밑 거미줄을 걷어냈다. 쓰지 않는 가마솥에 기름칠했고, 작은 텃밭을 일궜다. 엄마는 일종의 관리 차원이라고 말하면서도, 빈집을 그냥 두면 귀신 반상회 하기 딱 좋다며 가끔 사람이 들락날락해 줘야 한다고 했다.


안에서 정체 모를 요란한 엔진 소리가 들렸다. 뒷산 대나무 숲으로 뻗어나간 소음이 메아리쳤고 새들이 시끄럽다고 항의하듯 지저귀었다.


지수가 대문으로 들어가니 엄마가 마스크를 쓰고 송풍기로 낙엽을 몰아내고 있었다. 엄마는 지수가 도착한 것도 모른 채 마치 게임 캐릭터처럼 어깨에 멘 무기로 귀신을 쫓아내고 있었다. 지수는 소리가 잠시 멎은 틈을 타 엄마의 등 뒤로 다가가 깜짝 놀라게 해주려 했지만, 엄마가 뒤돌아보며 허무하게 끝났다.


"그거 뭐야? 어디서 났어?" 지수가 큰 짐을 한쪽에 내려놓고 말했다.


엄마는 친구한테 빌려왔다고 말하며, 지수의 어깨를 감싸 등을 두들기며 밥은 먹었냐고 물었다. 지수는 먹었다고 거짓말하고는 남동생의 도착 여부를 물었다. 엄마는 다시 송풍기를 작동시키며 모르겠다고 했다. 지수가 엄마 옆에 바짝 달라붙어서 남동생의 행방에 대해 꼬치꼬치 캐묻자 그제야 여자친구와 일본 여행 갔다고 실토했다.


"으이씨!" 지수는 입에서 험한 말이 튀어나오려는 것을 참았다. 엄마는 한창 연애할 때이지 않겠냐며 오히려 화살은 지수에게로 향했다. "너도 남친 만들어서 해외여행도 좀 가고 그래." 엄마는 코너에 몰릴 때면 늘 이런 식으로 지수를 꿀 먹은 벙어리로 만든다. 지수는 옷을 갈아입으러 방으로 들어갔다.



방 안의 장판은 누렜고 한쪽에는 고목으로 만든 서랍이 있었다. 박물관에 가야 할 것만 같은 골동품처럼 보였다. 벽 조금 높은 위치에 한복 입은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나란히 앉아서 찍은 흑백 사진이 걸려있었다. 처음 엄마의 제안에 할아버지는 완강히 거부했다. 그런데 몇 주 뒤 할아버지가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사진을 찍겠다고 했다. 할아버지는 사진이 인화되기 전에 돌아가셨다. 지수는 두 분에게 마음속으로 인사드렸다.


짐 가방에서 챙겨 온 트레이닝복을 꺼냈는데 아직 덜 말라 빨랫줄에 널어놓고, 서랍에서 편한 옷을 꺼내 입었다. 어느 날 갑자기 회사를 그만두고, 매달 자취방 월세를 내며 백수 생활을 할 때 엄마의 권유로 혼자 계시는 할머니와 함께 이곳에 잠시 살았던 적이 있다. 1년이 되기 전, 다른 회사에 입사하며 할머니 집에서 나왔는데 그때 놓고 간 짐들이 서랍 곳곳에 들어있었다. 굳어버린 화장품과 머리카락이 남은 헤어롤, 오래전에 쓰던 일기장과 공무원 시험을 보려고 샀던 빳빳한 문제집이 쌓여있었다. 언젠가 챙겨가겠지 했던 시간이 한참 흘렀다. 결혼해서 진짜 집을 갖게 되거나, 엄마가 이 집을 팔게 되었을 때가 되겠지만, 그게 언제가 될지는 미지수다.


지수는 엄마의 진두지휘 아래 곳곳을 청소했다. 사람이 떠난 집에는 자연이 머물다 간 흔적이 남는다. 할아버지, 할머니의 영혼도 돌아와 살진 못하겠지만, 잠시 머물다 가시곤 하겠지.


엄마는 근처에서 따왔다는 냉이로 된장찌개를 끓였다. 구수한 냄새가 풍겼다. 시장에서 사 온 나물로 비빔밥을 준비하고 두릅을 삶아 초장과 함께 밥상에 올렸다. 지수는 오랜만에 원두막에서 먹자고 했지만, 그 땅은 팔려서 원두막도 허물어졌다고 했다. 어쩔 수 없이 툇마루에 밥상을 차려 마주 앉았다. 그때 남동생에게 영상통화가 걸려 왔다. 지수의 콧구멍이 분노로 벌렁댔다. 지수가 퉁명스럽게 전화를 받자, 남동생은 지수를 보고 크게 웃었다. 남동생은 일본 오사카에 와 있다고 했다. 음식점 웨이팅 하는 사이 잠시 전화를 걸었다며 돌아갈 때 기념품을 잔뜩 사가겠다고 싹싹 빌었다. 지수는 일본에서만 파는 젤리를, 엄마는 동전파스를 사 오라고 시켰다.


밥을 다 먹은 후, 지수는 모든 방문을 열어두고 툇마루에 누워 꼰 발을 까딱거렸다. 파란 하늘에 흰 구름이 흘러갔다. 도시에서는 사방이 건물로 둘러싸여 하늘을 볼 수 있는 날이 적었다. 하루하루 벅찬 나날의 연속이었다. 이렇게 시골에 와서야 여유를 갖고 하늘을 보게 된다. 구름이 바로 눈앞에 있는 것만 같다. 혼자 노는 구름이 외로워 보인다. 하늘이 아래로 쏟아져 내릴 것만 같다. 산들바람에 눈이 가물가물하다.



엄마는 시장에서 사 온 모종을 작은 텃밭에 심었다. 지수가 뭘 심느냐고 묻자, 엄마는 방울토마토를 심었으니 나중에 남친 만들면 같이 와서 따먹으라고 했다. 엄마는 나이 서른을 넘긴 딸만 보면 기승전 남친타령이다. 지수는 다시 고개를 돌려 하늘을 봤다.


뒷산에서 뻐꾸기 우는 소리가 들렸다. 지수는 불현듯 뭔가 떠올랐는지 벌떡 일어나 방으로 들어가 맨 밑 서랍을 열었다. 몇 벌 남겨 놓은 할머니 옷이 고이 접혀 있었다. 옷을 들치자 누렇게 바랜 신문지를 깐 바닥에 고등학교 졸업앨범이 놓여 있었다. 보물을 발견하면 이런 기분이겠거니 싶었다. 벨벳 커버의 묵직한 앨범을 한 손으로 잡아 꺼내자 돌아가신 할머니 옷들도 끌려 나왔다. 지수는 서랍을 원상태로 정리하고 앨범을 들고 구석에 쭈그리고 앉았다.


방바닥이 찼다. 앨범을 무릎에 올려두고 앞장부터 한 장씩 넘겼다. 당구채로 타작하던 국사 선생님, 전자기기와 상극인 컴퓨터 선생님, 욕을 입에 달고 다녔던 법과 사회 선생님, 거물 정치인처럼 생겼던 음악 선생님까지. 그때의 복장과 표정은 꼭 그 시대에 박제된 인물들로 보였다.


페이지를 넘기니 지수가 속했던 반이 나왔다. 교복 입은 지수의 사진이 보였다. 화났냐며 자꾸 웃으라는 사진 기사의 말조차 불만이었던지 시기였다. 썩 보기 좋은 표정은 아니었다. 그나마 옆에서 장난치는 친구들 덕분에 없는 미소를 억지로 끄집어낸 거 같았다. 아름, 민지, 은혜의 사진도 찾아냈다. 몇 페이지를 더 넘기며 추억 속에 잠겼던 지수는 낯익은 두 이름을 발견했다.


강민구... 오영한. 둘은 같은 반이었다.


'실존했던 거야.'


졸업 앨범은 그런 기분을 느끼게 만든다. 단체 사진은 마치 어떤 공포 영화의 한 장면과 같고, 개인 사진은 그때를 동시에 마치고 흩어진 존재들의 마지막 순간을 인쇄해 둔 것만 같이 느껴진다.


까불며 찍은 학생들 사이에서 강민구와 오영한이 어깨동무를 하고 있었다. 오영한에 비해 키가 작은 강민구는 까치발을 들고 있었다. 개인 사진에서 강민구는 해맑게 웃고 있었고, 오영한은 얼굴이 타서 새까만 피부에 표정은 뾰로통했다. '다들 뭐가 그리 불만이라고...' 지수의 한쪽 입꼬리가 올라갔다.


맨 뒷장을 펼쳤다. 졸업생들의 명단에 집 주소, 이메일이 적혀있었다. 지금이었음 개인정보 유출이라며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저 때는 연락할 수 있는 수단이 적었고, 졸업해서도 서로 인연을 끊지 말라는 학교의 속 깊은 아이디어겠거니 생각했다.


지수는 손가락으로 이름을 훑어 내려갔다.


혹시 지하철에서 맡았던 그 향수 냄새의 범인을 찾아낼 수 있지 않을까. 환승역에서 발견한 그의 뒷모습, 어렴풋이 떠오르던 그 이미지들. 앨범을 잡고 있던 손에 힘이 풀리며 페이지가 한 장 한 장 빠르게 넘어갔다. 그때 앨범 사이에 껴 있던 하얀색 손수건이 장판 위에 떨어졌다. 지수는 얼마나 오랫동안 앨범 사이에 껴 있었는지 모를 그 손수건을 펼쳐 들었다. 오후의 빛이 손수건의 투명한 살깥을 통과해 상을 맺었다.


지수는 고추냉이를 티스푼으로 삼킨 것마냥 코끝을 찡긋했다. 향을 감지하는 감각이 강한 충격을 받았는지 눈가의 신경이 파르르 떨렸다. 분명 그때 지하철에서 맡았던 냄새였다. 손수건을 양 손바닥 안에 구겨 쥐어 코로 가져다댔다. 열매를 맺기 전 한 계절이 품어 둔 모든 달콤함이 해방된다. 어느새 맺힌 눈물이 굶주린 손수건에 스며들었다.


지수는 고쳐 앉아 손수건을 눈앞 가까이 가져왔다. 가장자리에 한 사람의 이름이 남색 자수로 새겨져 있었다.

이전 05화EP05. 붉은 가디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