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 벨리
앞선 글에서 적었던 것과 같이 회사는 점점 확장해 나가긴 하는 것 같았다. 본래 강남소재의 빌딩 한 층을 빌려 쓰다가 같은 빌딩에서 별도의 사무실 한 층을 추가적으로 대여했고 연일 해외전시회 참가소식과 MOU 체결소식, 그리고 크고 작은 투자유치 소식이 들려왔다. 인터넷 신문 기사에 회사가 홍보되고 국내 공기업과의 협업소식, 국책과제 입찰 등의 소식들도 있었던 것 같다. 겉만 봤을 때에는 정말 잘 운용되어 가는 것처럼 보였다. 다만 설계와 생산, 그리고 CS를 맡고 있던 나의 눈에는 구멍을 막지 못하고, 그저 차오르는 물을 퍼 나를 뿐인 난파선이었다.
1. 제품 생산건수의 하락
그 당시 회사는 단일제품만을 판매하는 회사가 아닌, 메인 역할을 하는 제품과 제품의 운용을 위한 기반시설, 그리고 제품을 활용하기 위한 웹서비스 및 앱서비스를 제공하는 토탈솔루션 판매 회사였다. 따라서 발주가 들어오더라도 곧바로 설치하지도 못할뿐더러 판매처에 따른 커스터마이징 또한 필수적으로 필요했으며 AI기반 제품이어서 성능이 올라올 때까지 어느 정도 기간 또한 필요한 솔루션이었다.
이렇다 보니 자연스럽게 제품의 책정금액이 높아졌으며 이로 인해 제품을 구매할 수 있는 잠재고객들이 매우 한정적이게 되었다. 한정적인 고객들에게 판매를 하다 보니 점진적으로 판매처가 줄어들었고, 판매건수가 증가할 수 없는 구조가 되었다. 따라서 자연스레 생산파트에 생산건수가 없는 상황이 대다수였다으며 회사에는 곳간이 마르고 있었다 (그 뒤로 퇴사 직전까지 생산전문인력 및 생산인프라 구축은 없었으며 설계와 생산, 그리고 CS를 맡다가 퇴사했다).
2. 회사 구성원을 위한 투자의 축소
제품의 판매유치가 어려워지고 회사의 비즈니스 모델은 제 역할을 하지 못하며 투자금은 몸집불리기에 사용되다 보니, 회사 구성원을 위한 투자들이 축소되기 시작했다. 사소하게는 간식이 채워지는 텀이 늘어나고 회식의 빈도가 줄어들었으며 식대의 지급조건들이 더욱 가혹해졌다. 먹는 거로 체감되어서 그런지 유독 나의 기억 속에 두드러졌다.
그 외에도 워크샵의 퀄리티가 점점 안 좋아지고 각종 직원복지를 위했던 비용들이 축소되었으며, 무엇보다 주니어들이 시도할 수 있는 기회들이 점점 줄어들어 주니어들이 성장하기 어려운 환경이 만들어져 갔다. 그리고 무엇보다, 직원들의 급여 인상률이 줄어들었다. 연봉협상 이후에 대다수의 인원들이 불만족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좋은 성과를 내더라도 성과에 대한 인정을 받았다는 감정보단 아쉬움이 따를 뿐이었다.
3. 사내문화의 변화
스타트업만의 자유롭고 독특한 사내문화는 다른 기업들과의 인재유치 경쟁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스타트업의 사내문화는 다른 기업의 급여나 복지처럼 인재유치에 필요한 하나의 축을 담당한다고 본다.
그 당시 회사의 입구에는 직원들을 위한 휴식공간이 마련되어 있었으며, 그 한가운데에 탁구대가 버젓이 놓여있었다. 회사 구성원들은 업무시간 중에도 언제든 휴식공간에서 쉬고 탁구를 치며 환기하고 서로 간 교류하며 스타트업의 높은 업무강도를 스스로 관리할 수 있었다. 따라서 소위 '탁구문화'는 그 당시 회사문화의 아이콘이었으며 상당히 중요한 역할로 자리 잡았었다. 오죽하면 면접시간에 탁구소리가 들려와서 입사했다는 분도 있을 정도였다.
그렇게 중요한 역할로 자리 잡았던 탁구문화를 하루아침에 금지시켰다. 아마도 매출하락으로 인한 임원진들의 구성원 경각심 일깨워주기 겸 매출하락으로 인한 인적자원의 효율적인 운용을 위했던 것으로 예상한다 (지금도 생각해 보면 합리적이지 않은 결정이긴 하다). 따라서 회사의 환기구 겸 냉각수 역할을 하던 탁구문화의 빈자리는 구성원들의 업무적 스트레스와 체계의 부재를 머릿속에 각인시켜 줬으며 그 사건을 기점으로 구성원들의 퇴사 릴레이가 이어졌던 것으로 기억한다.
위와 같은 현상들이 그저 매출의 하락, 적자, 혹은 금전의 부재 때문이었을까? 물론 결과적으로 봤을 때에는 그렇다고 생각하는 편이 타당하다고 보지만, 내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설립과정이 적절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고 생각한다.
이전 글들에서 힌트를 얻은 사람이 있겠지만, 그 당시 다녔던 회사는 한 연구에서 개발한 기술으로부터 시작된 사업체였다. 따라서, 사회문제를 인식하고 해결하며 시장에 자리 잡아야 하는 스타트업의 일반적인 전개와는 다르게, 기술이 선행되고 기술에 맞는 문제를 찾아서 해결하는 과정으로 설립되었다.
그러다 보니, 스타트업이라면 피할 수 없는 데스벨리 구간에서 적자라는 구멍을 매울 수 있는 매출의 다양성을 확보하지 못했고, 기술의 저주에 빠져 생존에 필요한 전환시점을 넘겨버린 점이 매출하락의 원인이었으며, 이로 인해 위와 같은 현상들이 벌어졌다고 생각한다.
위의 경험들은 나로 하여금 스타트업의 판매상품을 바라보는 눈을 키워주었다. 먼저 스타트업의 판매상품은 단순히 기술과 제품, 서비스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닌 해결하고자 하는 문제가 포함된 상품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상품의 기술력과 문제해결은 반드시 공존해야 하며 기업의 설립과정에서 해결하고자 하는 문제가 잘 정의되고 논리적으로 타당할수록 스타트업의 상품이 판매될 확률이 높아지고 스타트업의 생존확률을 높여줄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