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고민 - 3

이상의 부재

by Chilly Sky

아마도 앞서 얘기했던 불안감의 원인들 중 가장 큰 지분을 차지하는 고민이지 않을까 싶다.


무엇보다, 회사에서 맡고 있는 직무의 이상향, 목표가 내가 원하던 것과 달랐던 것 같다. 처음 커리어로 설계업무를 시작할 때에 내가 가지고 있던 직무의 이상향은 거대한 시스템을 설계해 나가고, 다양한 산업분야에서 경험을 쌓아 어떤 프로젝트에 들어가도 설계를 할 수 있는 만능 설계자를 생각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상당히 허무맹랑하긴 하다..ㅎㅎ).


다만 설계업무를 진행하고 1년 정도 지난 시점에서 나의 이상향은 절대 개인이 이룰 수 없는 꿈이라는 부분, 나의 생각을 펼쳐내기에 기계공학이라는 학문은 제한적이라는 부분이 나를 불안에 휩싸이게 했던 가장 큰 원인이었던 것 같다 (물론 다른 이유들도 많긴 하다).




먼저 내가 느꼈던 기계공학, 기구설계는 상당히 많은 레퍼런스를 요구하는 산업분야라고 생각했다. 설계에 대한 근거를 상당 부분 개인의 감각에 의존하는 경우가 있다고 느껴졌기 때문이다.


혹자는 '아니 무슨 이상한 회사에 다녔길래 개인의 감각을 운운하는 거지..'라고 얘기할 수도 있다. 다만, 상황적으로 봤을 때에 스타트업이어서 그 어떤 회사보다 짧은 프로젝트 완료 기간을 요구받았으며, 무엇보다 검증을 위한 시간 또한 충분하지 않았기에 기구설계자로서 가능한 한 요구사항을 맞춘 설계를 기간 내에 완수하기 위해서는 감각에 의존하는 수 밖에는 없었다 (물론 나의 설계자로서 식견이 얕은 것도 한몫한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감각에 의존하다 보니, 나의 감각이 자연스럽게 나의 설계범위가 되었으며 다른 제조업 회사들의 경우에 수많은 감각과 경험들이 축적되어 최적화된 설계물을 뽑아내기에, 나의 이상향을 개인이 이루기에는 어려운 것이라고 느꼈던 것 같다.




두 번째로, 대부분의 공학들이 그러하겠지만, 기계공학의 경우 기존에 연구되었던 학문적인 틀에서 벗어나기 어렵다는 부분이 너무 답답하게 느껴졌다. 30년 전의 생산방식이 현재의 생산방식과 동일했으며 뉴턴이 정리한 역학이 요즘의 학문과 동일한 내용이었다 (물론 앞서 말했듯, 나의 식견이 얕아서 이렇게 생각하는 것일 수도 있다).


반면, 나의 첫 취업시점은 개발자에 대한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던 시기였고 AI 신기술을 이용한 스타트업이 넘쳐나던 시기였으며, 연일 스타트업간의 신기술 쟁탈전을 벌이던 시기였다. 주위 회사에서는 Exit을 통해 부를 축적했다는 소식이 심심치 않게 들려왔으며, 기사에서만 보던 디지털 노마드를 주변에서 만나볼 수 있었고, 개발자들의 경우 디지털 환경에서 자신의 상상력을 자유롭게 펼쳐나가는 모습들을 볼 수 있었다.

그렇다 보니, 나는 기계공학의 한계점을 뼈저리게 느꼈다. 현실세계에 존재하는 한계로부터 벗어날 수 없었으며, 나의 상상력을 펼치기에도 다양한 제약사항에 의해 제한될 수밖에 없었고, 무엇보다 나 혼자서 스타트업을 일구고 발전시켜 운용하기에는 부적절한 학문이라는 한계점을 말이다.


뿐만 아니라 스스로가 미친 듯이 앞으로 전력질주하던 경주마속에서 옆으로 걷는 게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사람들은 화면에 코드를 띄워놓고 멋있는 일을 하고 있는데, 나는 현장에 나가서 제품을 설치하고, 수리하고, 매번 똑같은 방식에 비슷한 제품들을 내고 있었으니 말이다..


상당히 외로웠고 불안했으며, 무엇보다 뒤처진다는 느낌이 들었다. 때로는 질투하기도 했고 무력감도 많이 느꼈던 것 같다. 방향이 달랐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물론 이제는 알고 있다. 아무리 앞으로 달리는 경주마이고 옆으로 걷는 게더라도, 각자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방식이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여하튼 그 당시 직무 간의 간극 때문에 기계공학이라는 학문을 전공했다는 사실을 조금은 후회했던 것 같다.




물론, 이와 같은 경험과 감정들이 나에게 안 좋은 영향만을 미쳤던 것은 아니다. 결과적으로 나의 식견은 기계공학, 제조업, 기구설계만 알고 있을 당시와는 확연히 달라졌으며 간접적으로 다양한 산업분야를 접할 수 있다 보니 전체적인 구조를 파악할 수 있는 눈을 가질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나의 이상향도 서서히 달라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그저 업무적인 범위에서 그쳤다면, 이후부터 업무적인 목표와 자아실현은 다르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고, 꼭 하나의 이상향만 쫓지 않고 끝이 갈라진 시소에서 무게를 배분하며 균형을 잡아나가는 것 또한 무언가의 이상향일 수 있겠다는 생각도 할 수 있었다.


그러다 보니 스타트업에서 더욱 다양한 업무를 진행할 수 있는 올라운더가 되어있었으며 무엇보다 새로운 것을 도전하는데 겁이 많이 없어졌던 것 같다. 그래서, 그때쯤부터 더욱 적극적으로 다양한 경험들을 찾아 나섰으며, 무엇보다 글쓰기도 그때쯤부터 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업무적인 불안감은 해소되지는 않았다. 아무래도 다양한 업무를 진행하고 식견이 넓어진다고 하더라도, 결국 스스로 옆으로 걷는 게라고 인식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때의 나는 결심했다.


'옆으로 걷는 말이 되어보는 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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