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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호라 Dec 01. 2021

턴테이블은 시작이었을 뿐

나에게는 3년 전, ‘장기하와 얼굴들’ 밴드에 대한 팬심으로 사두었던 LP가 하나 있다. 장기하와 얼굴들(이하 장얼)이 2018년 말, 해체하기 전에 냈던 마지막 앨범인 5집 <mono>이다. 요즘 LP로 음반을 듣는 이들이 많지는 않으나 장얼의 리더이자 보컬이었던 장기하와 기타인 하세가와 요헤이의 취미가 LP 수집이기 때문에, 이들은 본인들의 음반을 소장하고자 한정판으로 LP를 제작한 것이다. 나는 그 당시엔 LP를 재생할 수 있는 턴테이블이 없었는데도, 내가 십 년 동안 사랑했던 밴드가 해체한다는 사실이 너무나 아쉬워서 그 한정판 굿즈를 구매해야만 했다. 물론 앨범이 나온 직후에 열렸던 30인 소규모 공연과 해체 직전의 연말 공연, 장얼의 활동에 관해 전시회로 꾸려졌던 행사까지 모조리 열심히 쫓아다녔음에도 덕후의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서는 물성으로 남는 무언가가 필요했던 것이다. (CD도 당연히 샀었다.)


어쨌거나 여태까지는 집에 턴테이블을 예쁘게 놓을 마땅한 공간이 없다고 생각해서 그 LP는 개봉하지 않은 채 먼지만 쌓이고 있었는데, 얼마 전 드디어 턴테이블을 구매하여 재생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넓은 집으로 이사한 건 아니었지만, 뜬금없이 턴테이블을 사게 된 까닭은 남편의 말 덕분이었다. ‘올해 우리 각자를 위한 선물을 뭔가 하나씩 해보자, 뭐 갖고 싶은 거 없냐’는 물음에 나는 금방 책장에 꽂혀있던 LP를 떠올렸고 ‘턴테이블을 사고 싶다’고 했다. 장얼 LP를 사던 순간부터 턴테이블은 오랫동안 내 위시리스트에 있었으나 당장 필요하지는 않은, 사치스러운 물건처럼 여겨지곤 했었다.


그때부터는 오래 고민하지 않고 적당한 가격의 턴테이블을 샀다. 처음부터 너무 좋은 것을 살 필요는 없을 것 같았고, LP의 세계에 대해 좀 더 발을 더 깊숙이 들여놓은 다음에야 내가 정말 원하는 것을 알 수 있을 것 같다는 판단이 들어서 10만 원 안쪽의 미개봉 중고 턴테이블을 당근 마켓에서 찾아 데려왔다. 반면에 남편은 새로운 아이폰을 살 계획이어서, 쓰는 돈에 차이가 꽤 나게 되었는데 남편이 나에게 약간 미안한 마음에 ‘더 비싼 거 사지 왜 중고로 사냐’고 했다. 나는 혹시나 처음 사용해보는 종류의 물건을 섣불리 비싸게 샀다가 그 값어치를 못하게 될까 봐 걱정되어 모처럼의 기회에 막 지르지 못했던 것이다.





턴테이블을 들고 집에 돌아오자마자 조심스럽게 포장상자를 개봉했다. 당근 한 물건 답지 않게 정말로 미개봉 새 제품이었다. 음질이나 기능은 별로 따지지 않고 디자인만 보고 고른 물건답게, 여행 가방 같은 귀여운 외양이 만족스러웠다. 설명서를 보니 라디오 기능과 다른 기기와 연결하여 일반 스피커처럼 사용할 수도 있었으며, 앰프나 헤드폰을 연결하여 들을 수도 있었다. 앰프도 헤드폰도 없는 나에게 사실 그 밖의 기능은 딱히 필요 없는 것이었지만 나는 ‘오~’하고 기대 이상의 기능에 감탄하며 메인 기능인 LP 재생을 먼저 해보기로 했다.


3년 동안 미개봉 상태였던 장얼의 5집 LP를 뜯고 조심스레 꺼내어 바늘을 올렸다. 처음엔 턴테이블을 놓을 자리를 못 찾아서 우선은 바닥에 두고 재생해보았다. 몇 초간 ‘위-잉’하며 돌아가는 소리가 나고 첫 번째로 재생된 노래는 ‘그건 니 생각이고’라는 노래. 이어폰으로, 스피커로 수도 없이 스트리밍 하여 들었던 노래였지만 턴테이블로 처음 듣는 노래는 뭔가 색다르게 느껴졌다. LP특유의 아날로그적 잡음이 미세하게 섞여있는 듯한 느낌이 났다. 처음엔 기계의 문제인가, LP 보관을 잘못해서 그런가 헷갈렸지만 계속해서 들어보니 원래 LP 음악의 특성인 것 같았다.


뒤이어 노래 몇 곡이 순식간에 끝나버렸다. LP 한 면에 4곡씩 수록되어있어 4곡이 끝나면 뒤집어 재생을 해야 했다. 음악 시작과 함께 따라두었던 맥주를 내 느린 음주 속도로 반 컵 정도 마시면 끝나는 시간이었다. LP 한 장을 모두 듣는 시간과 맥주를 한잔 마시는 속도가 비슷했다.


대략 최근 15년 가까이 경험하지 못했던 ‘번거로움’이었다. 그러나 음악을 듣기 위해 거쳐야 하는 전에 없던 절차적 번거로움이 오히려 전에 없던 기대감을 불러일으키는 효과가 있는 듯했다. 번거로운 다른 방식으로 음악을 재생했던 지난날의 기억도 문득 떠올랐다. 라디오에서 나오는 노래를 카세트테이프에 녹음하여 나만의 플레이 리스트를 만들던 십 대 초반. 마이마이나 CD플레이어를 가방에 넣어 다니며 노래를 듣던 때.  512MB짜리 MP3에 좋아하는 노래를 다운로드하여 듣다가, 신곡이 나오면 PC에 연결하여 새로운 노래를 다시 다운로드하곤 했던 십 대 중후반. 이십 대가 된 후, 지금까지 스마트폰을 사용한 뒤부터는 스트리밍을 하면 간편하게도 무한히 노래가 재생되는 시대에 살고 있는데, 나는 굳이 카세트테이프나 CD, MP3 플레이어 보다도 더 무겁고 까다로운 시대로 되돌아간 셈이다. 내 생애 턴테이블과 LP라는 건 고전 영화에서나 있었던 물건이었는데, 어쩐지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건 왜였을까.  

두어 시간 동안 LP를 몇 번이나 뒤집으며 원 없이 노래를 재생하고 나자, 곧바로 다른 앨범을 사고 싶어졌다. LP를 보통 어디에서 구매하는 줄도 모르고 있던 나는 ‘LP 구입처’부터 검색했고, 가장 쉽게 구매할 수 있는 방법이 인터넷 서점이었다. 구입하고 싶은 앨범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저 턴테이블로 다른 것도 재생해보고 싶어서 들어가 본 것이었기에 베스트 판매량 순으로 보았는데, 스테디셀러 중에서도 1등은 ‘역시나?’ 비틀스의 1집 앨범이었다. 알고 있었던 건 아니지만 왠지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 답변 같았다. 그러나 비틀스의 앨범을 사지는 않았고, 보헤미안 랩소디 영화음악 앨범과 너바나의 <Nevermind>를 담았다. 장얼 덕에 LP의 세계에 입문하게 된 나는 어쩐지 락밴드 음악만이 LP에 잘 어울리는 소리일 것 같다는 편견에 사로잡혀있기 때문이었다. 이 앨범 두장만으로 10만 원이 넘는 가격이어서, 내가 산 저렴이 턴테이블 보다 더 비쌌다. 노래 한 곡의 듣는 가격이 0원에 수렴하는 이 현대사회에 10곡을 듣자고 5만 원을 지불하는 나, 이 얼마나 사치스러운가. 이러려고 턴테이블을 싼 거 산거라 생각하며, 이왕 산거 하나만 계속 재생할 수는 없지 않겠냐고 합리화하며 결제했다.


주말을 넘기고 주문한 지 사흘 만에 LP 두장이 왔다. 보헤미안 랩소디의 첫 부분이 시작되는 순간, ‘Is this the real life?’ 재밌게 봤던 영화의 장면들이 떠오르며 두근거렸다. 나는 직감했다. 나에게 새로운, 역대급으로 사치스러운 취미가 생겼음을. 아이폰 가격 따위, LP 구매로 앞지를 날이 머지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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