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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호라 Dec 10. 2021

주체적으로 생일 보내기 -02

무계획적이지만 계획적으로 경복궁을 산책했다.

가장 마지막에 갔던 경복궁은 20대 초였는데, 그때는 야간 개장을 한다는 소식에 갔다가 사람만 너무 많고, 근정전과 경회루까지만 개방을 해서 생각보다 볼거리도 없어서 실망하고 왔던 기억이 있다. 그 전에도 몇 번 경복궁에 간 적이 있었는데, 이상하게도 가을에 간 적은 없었다. 그때마다 '가을에 오면 훨씬 더 예쁠 텐데'하는 생각이 들었었다. 더구나 한산할 거라 예상되는 평일 오전에 가본 적도 없었다. 서울 살이 햇수로 11년 만에야 나는 드디어 가을, 평일 오전, 날씨 맑은 날의 경복궁을 보게 된 것이다. 그 모든 조건이 맞아떨어지기에는 꽤 까다로웠으니, 쉽게 볼 수 없을 만도 했다.


이 까다로운 조건에 맞아떨어진 이 날, 나는 비로소 그전까지는 몰랐던 경복궁의 모습을 만날 수 있었다. 어쨌거나 경복궁을 몇 번 와보았던 나는 나름대로 계획을 세웠다. 근정전과 경회루는 상대적으로 익숙한 건물이었고 많이 봤었으니 여기서 시간을 보내기보다 향원정을 중심으로 한 뒤쪽을 중점적으로 보자는 계획이었다. 본래 그리 계획적인 성격은 아니었기 때문에 그 근처에서 뭘 할지, 동선을 어떻게 짤지는 생각하지 못했는데 사실 향원정만 보고 오기에는 또 너무 짧았을 것이다.


계획이라고는 향원정 밖에 없었던 나는 궁에 입장하기 전, 화장실을 가기 위해 우연히 들어갔던 경복궁 앞 국립 고궁박물관에서 재미난 기획전이 열리고 있는 걸 발견했다. 바로 <인사동 출토 유물전>이었다. 나중에 찾아보고 나서야 알게 되었는데 이 전시에 소개된 활자본들은 1450년대 독일의 구텐베르크 성서보다 최소 16년은 앞서 제작된 것으로 최초로 공개된 것이라고 한다. '직지의 고장' 청주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나는 '금속활자'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으며 자랐기에 금속활자들이 참 반갑게 느껴졌다. 청주에 있는 가로등과 인도에 상징물로 조각된 것들만 봤었는데, 실물을 처음 보니 금속활자는 생각보다 참 작고 정교하고 멋진 것이었다.


무계획으로 우연히 발견한 무료 전시를 즐겁게 보고 나와 경복궁으로 향했다. 요즘 궁에 들어갈 때는 입장권을 따로 구매하지 않고 교통카드를 찍고 들어가면 된다는 얘기를 블로그에서 읽었던 터라 나는 마치 익숙한 듯 자연스럽게 교통카드를 찍고 들어갔다. 속으로는 궁 입장 시스템의 발전에 놀라면서. 이 정도면 J(MBTI 유형 중 계획형) 아닌가 생각하며(아님), 궁궐 안쪽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어쩐지 이번에는 궁 내부의 한옥들에 집중하기보다는 궁에서 보이는 외부의 풍경들이 색다르게 다가왔다. 그전까지 경복궁에 왔을 때에는 근정전 앞에서 사진을 찍고 경회루 앞에서 사진을 찍고, 기와 사진을 찍곤 했었는데 처음부터 오로지 ‘향원정’만 보자고 생각하고 안쪽으로 걸어 들어가기 시작하니 보지 못했던 풍경이 보이는 것 같았다. 근정전을 등지고 걸어가는 방향에서는 앞쪽 풍경이 서울 같지 않게 탁 트여있으면서도 너무 높지 않은 아름다운 바위산이 보였다. 바로 ‘북악산’이었다. 왼쪽으로도 아담한 산이 보였는데, 이는 ‘인왕산’이었다. 산과 나 사이에 시야를 가리는 건물이 없다는 점은 의외로 궁에서만 할 수 있는 소중하고 신선한 체험이었다.


그 풍경을 보며 유튜브 뮤직에서 ‘날씨 좋은 날 고궁산책’이라는 플레이리스트를 들으며 걸었다. 아쟁과 가야금, 피아노 소리가 어우러진 한국형 퓨전 재즈였다. 가요를 국악 느낌으로 바꾼 곡들도 있었다. 전반적으로 장르를 알 수 없는 김치 파스타 같은 느낌의 노래였는데, 어쩐지 고궁에서 보고 있는 이 풍경이 그런 노래와 굉장히 잘 어울렸다. 서울의 복잡한 현대식 건물 한가운데에 이질적이지만 나름대로 자연 풍경과는 잘 어우러져 이곳에 오래 보존된 경복궁의 모습이.

경복궁에서 볼수 있는 확 트인 풍경

내 유일한 계획, ‘향원정’에 드디어 도착했다. 연못 한 가운데 동그란 원형의 섬 안에 자리잡은 아담한 정자가 마치 비밀의 화원에 온듯한 분위기를 자아내었다. 이곳에서 뜬금없는 배경처럼 보이는 현대식 건물의 풍경도 이색적이었다. 이 역시 서울의 궁 안에서만 즐길 수 있는 풍경이다.


경복궁 뒤편에는 사람이 많이 없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있었다. 한복을 빌려 입고 데이트를 하는 커플도 보였고, 외국인들도 적지 않게 보였고, 문화해설사를 따라 관람하는 사람들도 있고, 나처럼 혼자 관람하는 사람들도 꽤 많았다. 아니 다들 나 모르게 이런 풍경들을 즐기고 있었던 건가 싶었다. 나만 이제야 알아서 억울한 마음 반, 이제라도 알아서 다행이라는 마음이 반 정도 든다. 또, 이렇게 글로 향원정을 영업할 수 있어서 뿌듯하기도 하고. 망원경 같이 생긴 길고 커다란 렌즈가 붙어있는 굉장히 전문적으로 보이는 사진사들이 여럿 보였고, 그들이 삼각대에 세팅해 둔 스폿 뒤에서 사진을 찍어보았다. 역시나 멋진 구도가 나왔다. 이 꿀팁을 발견하고 스스로 얼마나 뿌듯했는지 모른다. 몇 번 이런 식으로 사진을 찍다가 또 신나게 내 마음대로 찍기도 하다 보니 휴대폰이 배터리가 간당간당했다.


더 많은 사진을 찍지 못해서 아쉬웠지만, 덕분에 그때부터는 오히려 더 많은 풍경을 눈에 담으며 되돌아갈 수 있었다. 내년에도 이맘때 경복궁 향원정에 꼭 와야겠다 싶다. 한 번이 아니라 여러 번 오고 싶은 풍경이다. 서울에 산지 십년이 넘어서야 이 도시에게 제대로 된 생일 선물을 받은 것 같다고 하면 좀 오버인가. 어쨌든 가을이 아니라 봄에는 어떨까 궁금해지기도 한다. 아니 4계절을 모두 봐도 좋을 것 같다. 가까이에 있지만 마치 멀리 온 것 같은 느낌을 느끼고 싶을 때, 그렇지만 멀리 가기는 힘들 때, 궁보다 더 좋은 곳이 있을까. 궁이 가장 아름답다는 가을은 지나버렸지만 겨울에는 겨울만의 풍경이 있으니, 조만간 누군가와 함께 손잡고 다시 궁을 걸으러 가고 싶다.

프로 사진사의 구도를 훔친 사진
내 맘대로 찍은 사진! 그래도 멋있지 않나
이것도 내 맘대로 찍은 사진! 이 사진이 가장 마음에 든다. 사진 오른편 가운데에 우연히 찍힌 떨어지는 황금빛 낙엽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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