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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호라 Oct 22. 2021

아무튼, 가을이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가을 아침 내겐 정말 커다란 기쁨이야

아침에 출근할 때 기온이 20도 초반에서 10도 후반 즈음으로 떨어질 무렵, 아침에 숨을 들이마시면 코끝이 시원하게 느껴진다. 그리 빠르지 않은 걸음으로 걷는데도 선선한 바람이 몸을 감싼다. 해가 점점 일찍 저무는 게 느껴지기 시작할 즈음이며, 긴팔을 입기 시작할 즈음이기도 하며, 실내에서 에어컨을 끄기 시작할 즈음이기도, 저녁에 산책하며 모기에 물릴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될 즈음이기도 하다. 그렇게 드디어 정말 가을이 왔구나, 생각하면 그때마다 듣는 노래가 있다.

바로 ‘가을 아침’이라는 노래다. 원곡은 양희은이 불렀지만, 나는 아이유가 리메이크한 곡으로 즐겨 듣게 되었다. 찾아보니 가을 아침 원곡은 1991년 10월 1일에 발매한 ‘양희은 1991’이라는 앨범에 수록된 노래다. 굳이 찾아 듣기엔 나에겐 조금 거리감이 느껴지는 노래였는데, 아이유가 2017년에 이곡을 리메이크 한 이후에 이 노래의 매력을 한껏 즐기게 되었다.


가사를 자세히 곱씹어보면 사실 내 가을 아침과는 비슷한 구석이 거의 없다. 나는 ‘이른 아침 작은 새들 노랫소리 들려오면 언제나 그렇듯 아쉽게 잠을 깨’ 지는 않고, 핸드폰에서 울리는 알람을 듣고 힘겹게 깨어난다. ‘창문 하나 햇살 가득 눈부시게 비쳐오는’ 채광 좋은 집에 살지는 않아서, 햇빛인 듯 아닌듯한 미세한 여명에 의지하여 방문을 열고 나와 화장실 불을 켠다. 다음 가사에는 아버지와, 어머니, 그들의 아들(아마도 남매로 추정)이 등장하는데, 나는 부모님 집에서 나와 산 지 오래되어 부모님과 함께하는 평범한 아침을 그려볼라치면 아득하다. 산책 다녀오시는 아버지가 들고 오신 효과를 알 수 없는 약수, 토닥토닥 빨래하는 어머니, 심심하면 쳐대는 괘종시계 종소리 모두 90년대 초에는 있었겠지만 서서히 점점 사라진 소리와 풍경이다. 유일하게 공감 가는 가사는 그저 가을 아침은 내겐 정말 커다란 기쁨이자, 커다란 행복이라는 것. ‘가을 아침이 커다란 행복’이라는 아주 옅은 연결고리에 기대어, 나는 본적 없지만 왠지 그리운 듯한 풍경을 상상하며 출근길에 이 노래를 듣는다.


그래도 90년대 초 이래로 ‘아마도’ 한결같았을 가을의 풍경을 나도 안다. 나는 하늘과 나무, 꽃들을 떠올린다. 미세먼지 농도가 가장 낮은 것 같은 이 계절은 적어도 새파랗고 투명한 하늘만큼은 30년 전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아침 공기가 차갑게 느껴지면 옷장을 정리하며, 트렌치코트와 체크남방, 바람막이, 니트 카디건처럼 짧은 가을에 몰아쳐서 실컷 입어야 하는 옷들을 행거에 내어놓는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취향의 옷들이 가을에 몰려있어서 그런지 가을에 더 많이 약속을 잡고, 더 놀러 다니고 싶어지는 것만 같다.  


그렇지만 집에서 보내는 가을도 꽤나 운치 있다. 독서의 계절, 천고마비의 계절이라는 말이 가을에 수식어로 쓰인 건 괜한 말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창문을 열고 선선하게 들어오는 공기를 맞으며 책상에 앉아 책을 읽노라면 기분이 그리도 좋을 수 없다. 차가운 아메리카노를 마시다가 오랜만에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마시면 좀 더 차분히 글을 읽고 쓰게 된다. 책을 읽다가 정 심심하면 AI 스피커에게 이렇게 말한다.

“오케이 구글, 가을에 어울리는 음악 틀어줘”

그러면 잔잔한 재즈나 피아노 곡이 나오기도 하고, 김광석, 산울림의 노래를 비롯한 통기타 반주가 은은하게 흘러나오는 노래들이 나온다. 나는 가을에만 맛볼 수 있는 사과대추, 감 같은 간식들을 아삭아삭 씹으며 집에서 가을을 즐긴다.


나는 산 중에서도 가을의 산을 제일 좋아한다. 겨울은 너무 춥고, 봄은 나뭇잎이 드리워지기 전이어서 햇살이 은근히 뜨겁고, 여름에는 모기가 많다. 하지만 가을에는 모기들이 많이 사라지고, 나뭇잎들이 울긋불긋한 단풍으로 물든다. 억새와 코스모스를 볼 수도 있고, 밤나무가 많은 곳에서는 밤을 주울 수도 있다. 소나무가 많은 산에서는 각종 버섯들을 찾을 수도 있다. 원래도 알고는 있었지만, 적어놓고 보니 이 짧은 계절에 이렇게나 즐거운 것들이 많았다니 역시나 가을이 짧다는 사실이 아쉽다 못해 슬퍼질 지경이다. 왜 나는 이토록 애틋한 계절을 사랑하게 된 걸까.

내가 가을을 가장 좋아한다고 하니, 그 말을 들은 한 친구는 여름이 가장 좋다고 했다. 또 다른 친구는 초여름이 좋다고 했다. 친구 중 한 명이 이런 말을 했다. ‘본인이 태어난 계절을 좋아하게 되는 것 같다’고. 듣고 보니 초여름을 좋아하는 친구는 6월에, 여름을 좋아하는 친구는 7월 말에, 그리고 나는 11월에 태어났다는 걸 깨달았다. 그런데 가을이라기엔 약간 애매한 시기이긴하다. 가을의 끝자락인지 겨울의 시작인지 모를 그런 애매한 때에 태어났지만, 원래 예정일보다는 보름이나 늦게 세상에 나왔다고 하니 가을아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너무도 가을을 좋아하다 보니 가을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친구는 가을이 되면 이제 곧 겨울이 오겠구나, 올해도 가는구나 하는 마음에 약간 서글퍼진다고 했다. 듣고 보니 이해가 되었다. 그래서 가을이 되면 유독 쓸쓸함을 노래한 가사가 생각나나 보다. 그렇지만 난 어쩐지 유독 가을에 어울리는 쓸쓸함과 외로움의 정서마저도 좋아한다.


예년보다 빨리 ‘한파’ 기사가 찾아왔다. 아직 10월 중순인데, 최저기온이 영하로 내려가는 지역이 있기도 했다. 누군가가 벌써 ‘가을이 끝났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오늘 점심시간에 산책을 하며 느꼈다. 쌀쌀하고 손이 시렸지만, 아직 단풍도 거의 들지 않았고 저 멀리 보이는 산은 아직 완전히 초록빛이었다. 은행잎이 이제야 노랗게 물들기 시작했다. 적어도, 단풍이 물들고 낙엽이 다 지고 나서야 가을이 갔다고 말할 수 있을까. 롱 패딩을 꺼내 입기 시작하면 겨울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내 생각엔, 첫눈이 오기 전까지는 가을이라고 생각한다. 올해 내게 정말로 가을의 끝은 언제일까, 가을 옷을 여러 겹 껴입으며 패딩은 최대한 늦게 꺼내고 싶다. 올해 입동은 양력 날짜로 11월 7일이라는데, 나는 적어도 내 생일인 11월 17일이 지날 때까지는 가을이라고 말하고 싶다. 가을을 좋아해서 그저 가을에 속한 사람이고 싶다. 겨울이 영영 오지 않았으면 좋겠지만 그래도, 내가 좋아하는 가을의 끝은 누군가가 좋아하는 겨울의 시작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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