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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히티 춤 체험이 내게 남긴 것

몸치가 자발적으로 춤을 추러 가서 생긴 일

by 오호라

춤을 춘다는 건 내게 두려운 일이었다. 나는 평생 스스로를 몸치인 데다가 내향적인 성격으로 여겨왔기 때문이었다. 내 생각에 나는 보통의 몸치를 뛰어넘는 수준이어서 몸치 올림피아드가 있다면 거뜬히 금상을 차지할 수 있을 정도였다. (물론 정말로 그런 게 있어도 수치스럽기 때문에 굳이 참가하고 싶지는 않다.) 이 생각의 근거는 유치원 다닐 때부터 초, 중, 고등학교, 대학교를 거쳐 심지어 대학원을 다니던 시절에 이르기까지 억지로 춤을 배우고 또 원치 않은 장소에서 춰야만 했던 일련의 사건들에서 비롯된 것이다.




유치원에서는 ‘재롱잔치’라는 이름으로 꼬마 신랑 신부 춤을 한복을 입혀놓고 춤을 추게 했었다. 얼마나 충격적이었으면 그 어린 나이에 있었던 일이 기억난다. 아마도 여섯 살에서 일곱 살쯤 됐을 무렵이었던 것 같은데, 무작위로 어떤 남자애와 짝을 맺어 춤을 추게 하고 무대에 세웠다. 평소에 말도 안 섞어보고 친하지도 않은 남자애와 손을 맞잡기도 하고 얼굴을 마주 보기도 해야 한다는 게 너무나 싫었다. 볼에는 연지곤지 스티커를 붙이고, 입술도 빨갛게 칠했었다. 결과적으로 내가 그 무대를 어떻게 치러냈는지는 잘 기억이 안 나지만 사진은 남아있어서 내가 대충 어떤 표정을 하고 있었는지 안다. 나는 그저 졸린 눈인지 귀찮은 눈인지 모르겠는 흐리멍덩한 눈으로 어떻게든 무대에 서 있었다. 귀여우라고 그런 걸 시켰을 텐데 무대에 억지로 서있는 어린 내 사진을 볼 때면 귀엽기는커녕 안쓰러운 마음만 들었다.


초등학교 때에는 수행평가고 수련회고 소풍이고 이런저런 활동에서 춤은 꼭 패키지처럼 딸려왔다. 놀이를 해도 벌칙에 걸리면 춤을 추라고 요구하는 경우가 꽤 있었다. 아무도 그런 상황에서 뛰어난 춤을 바라고 요구한 것은 아니었고, 그저 흥을 돋우기 위해 그런 것이었지만 나는 단 한 번도 그 장면에서 몸을 즐겁게 들썩여본 적이 없다. 손뼉을 치고 몸을 좌우로 흔드는 단순한 동작마저도 뭔가 하려고 하면 온몸이 삐그덕 대고 얼어버리는 것 같았다. 수련회에서 포크댄스를 한다고 몇 가지 동작을 알려주고 로테이션을 시키면 어쩔 줄을 몰랐다. 따라 하려고 노력은 했지만 몸동작의 순서가 아무리 기억하려고 해도 머리에서 튕겨 나와버리는 느낌이었고, 순서를 기억한 것 같아도 몸이 생각에 따라 제대로 움직여지지 않았다. 모두가 한 번에 다 잘 따라 하는 건 아니었지만, 동작을 익히는 게 느린 아이들 중에서도 내가 제일 느려서 종국에는 자꾸 나만 틀렸다고 지적받았다. 그렇게 결국엔 모두가 즐거운 듯이 리듬에 맞춰 움직이는 그 속에서 나만 늘 바보가 되어버렸고, 춤을 춘다고 하면 울고 싶어지곤 했다.


중학교, 고등학교 시절을 거치면서 춤에 대한 공포와 거부감은 더욱 심해졌다. 내가 다녔던 여중, 여고에서 ‘무용’이라는 과목이 있어서 일주일에 한 번씩은 무조건 춤을 춰야 했고, 심지어 춤으로 평가를 받고 성적에 반영되기까지 했다. 파트너와 함께 평가를 받아야 할 때도 있어서 나름대로 열심히 해보았지만 짝꿍은 B+를 받을 때, 나는 C0를 받았다. (이게 가장 낮은 점수였던 걸로 기억한다.) 무용 선생님은 늘 자기 수업을 못 따라오는 나를 진심으로 멍청한 애라고 여겨서 성적이 좋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실제로 나는 반 등수 5등 이내를 유지하는 나름 모범생이었다. 무용 선생님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든 말든, 내게 늘 중요했던 건 춤을 춰야만 하는 상황에서 탈출하는 것뿐이었다.


대학생이 된 후에 춤을 강요당하는 상황은 많이 없어졌는데, 대학교를 졸업하고 나니 대학원에서 말도 안 되는 ‘장기자랑 문화’가 기다리고 있었다. 신입생 환영회에서 대학원 신입생들에게 춤을 추게 시키는 것이었는데, 그걸 위해서 심지어 입학도 전에 소집한 다음 무작위로 팀을 짜주고는 알아서 연습해오라고 했다. 그때 등록금을 내지 말았어야 했는데……. 어쨌거나 완벽한 을의 세계의 입구에 있던 나는 속으로만 불만을 가진 상태로 그 제도 자체를 뒤엎지는 못했고, 그나마 다행히도 다들 나처럼 춤 추기를 싫어하는 사람들을 만나서 대충 준비해서 해치워버렸다.


그 이후로 나는 지금까지는 다행히 ‘신입사원 춤 자랑’ 따위를 시키는 회사에 입사한 건 아니어서 춤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것이 내 춤의 역사다. 그래서 즐겁기 위해 춤을 춘다는 건 내게 도저히 이해하려야 이해할 수 없는 느낌이었다. 춤이라는 건 내게 늘 강요에 의해 억지로 추는 것이었고, 누군가의 흥을 위해 봉사하는 마음으로 추는 것이었고,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해, 그걸 옆의 친구와 비교당하며 평가받아야 했던 것이었다.



그러던 내가 생뚱맞게도, 이름도 생소한 ‘타히티 춤’을 추게 된 건 웬 바람이 불어서였는지 설명하려다 보니 길어졌는데, 거창한 이유는 없었다. 어느 날 갑자기 타히티 춤 영상을 보고 그 아름다움에 반해…라고 하기엔 너무도 뻔한 거짓말이고, 카카오톡방을 통해 운동모임을 함께 하고 있는 친구 중 한 명이 이미 타히티 춤을 배우고 있었는데, 그 친구가 체험할 기회를 마련해줬다. 이 모임 자체가 딱히 운동 종목이나 정기 모임을 정해진 것이 아니라, 어떤 운동이든 하고 싶은 사람들끼리 언제 모일 수 있는 콘셉트로 운영하고 있었기 때문에 언제 어떤 형태로든 모임이 열릴 수 있었다. 아마 타히티 춤이 아니었어도 ‘이 친구들과 함께’라면 괜찮다고 생각했을 것 같다. 나는 타히티 춤이 어떤 춤인지 보지도 않고 일단 해보겠다고 했다. 이때가 아니면 언제 해보나 싶어 ‘에라 모르겠다’하는 마음도 있었다. 클라이밍을 평생 하지 않던 친구들도 얼결에 나와 함께 클라이밍을 하고 좋아하게 되는 모습을 여러 번 봐온 덕분에 낼 수 있었던 용기였는지도 모른다. 내가 좋아하는 친구가 권하는 것이고, 내가 함께하려는 자발적인 의지로 도전해보는 것이라면, 진심으로 괜찮지 않을까 싶었다. 설령 그게 내가 정말 못하고, 싫어하는 춤일지라도. 어쩌면 즐겁지 않을까.


타히티 춤은 댄스 중에서 많은 이들이 흔히 취미로 삼아 배우는 ‘방송댄스’나 ‘스윙댄스’ 같은 장르에 비해서는 어떤 면에서는 장벽이 높아 보였다. 일단 의상이 파격적인데, 상의는 스포츠 브라나 탑만 입고 하의로는 속옷 위에 얇은 천 쪼가리만 두른다. 배나 다리 노출이 부담스러운 사람에게는 쉬이 시작하기에 부담스러울 수 있다. 나 또한 꽤나 유교걸 적인 면모가 있어서 걱정되었는데, 타히티 춤을 제안해 준 친구가 사려 깊게도 먼저 이런 말을 해주었다. 노출이 좀 있기는 하지만, 춤을 추다 보면 아무도 다른 사람 몸에 신경 쓰지 않는다고, 그리고 모두 여성이라서 편안하게 할 수 있다고. 또 하나 장벽이 높은 요인은 아무래도 우리나라에 널리 알려진 춤이 아니다 보니 배울 수 있는 곳이 매우 한정적인 것 같았다. 나는 우리나라에 몇 명 없는 타히티 춤 선생님과 친한 친구가 있었던 덕분에 이 장벽 또한 넘을 수 있었다.


지난 토요일, 드디어 약속된 장소에서 타히티 춤 수업이 시작되었다. 강사님을 포함하여 6명이 연습실에 모였다. 내가 느끼기에 딱 부담스럽지 않은 정도의 인원이었다. 하의는 본래는 속옷 위에 바로 천을 두른다고 했지만 춥거나 부담스러우면 레깅스를 입어도 된다기에 나는 레깅스를 입고 그 위에 천을 둘렀다. 배를 드러내고 춤을 추는 건 골반 움직임을 잘 보기 위해서라고 했다. 전면이 거울인 연습실에서 춤을 추는 내 모습을 마주하는 건 고등학교 무용시간 이후로 처음이었다. 무릎을 구부린 자세에서 상체가 들썩이거나 움직이지 않는 상태에서 골반을 좌우로 흔들거나 골반으로 원을 그리는 동작을 주로 배웠는데, 유연하지도 않고 박치이기도 한 나에게는 역시나 이 춤이 어려웠다.


그러나 학교 다닐 때, 누군가가 시켜서 추던 춤과 억지로 췄던 춤과는 확실히 달랐다. 나와 선생님, 같이 춤을 배우는 동료들 모두 내가 좀 못해도 아무도 내 춤 실력에 대해 타박하지 않았다. 그저 내가 잘 못하고 있으면 약간은 열정적이면서도 아무런 개인적인 감정이 없는 따스한 손길로 자세를 교정해주었다. 그리고 야단이 아니라 힘찬 외침으로 알려주었다. 옆 사람보다 더 더디게 배우고 있는 내가 민망하기도 하고, 내 어설픈 모습이 스스로 웃기기도 했는데, 적어도 옆에서 ‘너 되게 못하더라, 어떻게 그렇게 뻣뻣해? 이것도 못하는 건 너무 한 거 아니야?’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은 없었다. 춤을 배울 때면 항상 그림자처럼 나를 쫓아다니던 조급함과 좌절감, 공포심, 거부감이 이 날은 나를 괴롭히지 않았다. 어렸을 때부터 진작 이렇게만 춤을 배울 수 있었다면 난 조금 더 흥 많은 사람으로 자랄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다행히도 이제야 이런 체험을 한 건 감사한 일이었다.


덕분에 나는 춤 혐오를 완전히 극복했고, 타히티 춤을 사랑하게 되었다고 하면 너무도 완벽한 마무리겠지만, 사실 알다시피 한 번, 한 시간으로 그만큼까지는 오버스럽지 않은가. 다만 내가 이제껏 춤을 배우는 장소에서 겪어보지 못했던 이 날의 따스하고 유쾌하고도 힘찬 분위기가 내게 조금의 희망을 주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전에는 즐겁게 춤을 추는 내 모습을 전혀 상상할 수 없었지만, 이런 분위기에서라면 춤을 추는 게 즐거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상상을 해볼 수 있게 되었다. 다음번에 또 수업을 들을 거냐고 묻는다면 솔직히 약간 고민이 되는 수준이다. 그 전 같았으면 단언컨대 고민할 필요도 없이 ‘아니’라고 했겠지만. 이건 어쩌면, 내게 시작된 엄청난 변화의 서막 같은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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