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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싱, 열정을 발산하다

열정 있는 자만이 도전할 수 있다. XX복싱!

by 오호라

내가 등록하러 간 복싱장의 입구에는 이런 문구가 적혀있는 현수막이 걸려있었다.

열정 있는 자만이 도전할 수 있다. XX복싱!


가히 도전적인 문구였다. 그러나 나는 왠지 그 문구를 볼 때마다 도전 의지를 불태웠다기보다는 어쩐지 ‘내가 열정이 있나?’ 하고 반성하곤 했다. 왠지 없는 열정을 열심히 이끌어 내야만 할 것만 같은 마음이 들었다. 마치 열정을 복싱 관장님께 빚지기라도 한 것처럼.


‘복싱 배우기’는 내 2021년 목표 리스트 중 하나였다. 내 개인 SNS에 공표하기까지 했었는데, 그걸 본 지인이 본인이 쓰던 (거의 새것인) 글러브를 그냥 줄 수 있다고 댓글을 달아주기도 했다. 그게 무려 2021년 1월이었는데, 나는 복싱처럼 숨이 찬 운동을 마스크를 쓴 채 할 수는 없다고 생각해 복싱 등록을 계속 미루다 보니 11월이 끝나갈 무렵이었다. 코로나19는 변이에 변이가 계속 등장하는 바람에 끝날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그대로 가다간 언제쯤 복싱을 시작할 수 있을지 몰랐다.


더구나 ‘다이어트 복싱’이라고 하면 샌드백은 안치고 온종일 줄넘기만 시키고 뜀박질만 한다거나 어떤 관장은 ‘여자는 글러브 낄 필요 없다’고 말했다거나 하는 얘기를 들은 바가 있어서, 지금 사는 곳에서 도보로 5분 거리도 안 되는 거리에 있는 복싱장에 등록하는 걸 늘 망설였었다. 굳이 돈을 쓰고 그런 불쾌한 경험을 하고 싶지는 않았는데, 내가 결국 등록하게 된 도보 5분 거리의 이 복싱장은 바로 그 ‘다이어트 복싱’이라는 말이 떡하니 입구와 유리창에 적혀있기 때문이었다. 이 복싱장 입구에서 ‘다이어트’라는 문구를 전면에 내세운 건 보다 다수를 위한 마케팅 수단이었겠지만, 나에게는 그게 오히려 등록을 망설이게 하는 요인이 되었던 것이다.


나는 ‘정통 복싱’이 뭔지는 잘 모르면서도 이왕 복싱을 할 거면 다이어트와는 상관없이 터프하게 주먹을 날리는, 실전 싸움에서 쓸모 있는 그런 방식으로 운동을 배우고 싶었다. 그래서 다이어트 복싱을 내세운 복싱장보다는 ‘정통 복싱’을 내세운 복싱장에 가야 하는 거 아닐까?라고 생각하면서도, 그런데 정통 복싱이라고 쓰여있는 곳에 가면 남자들만 많아서 부담스러운 거 아닐까? 또, 남자들이랑 스파링 하라고 강요하면 어쩌지? 하는 복싱을 등록하기 어려운 괜한 걱정거리들을 만들어 걱정해왔다.


늘 그렇듯 시작이 제일 어려운 법인데, 반갑게도, 타이밍 좋게도 2021년이 끝나기 전에 한 동네에 살던 친구가 나에게 복싱을 함께 하자고 먼저 손을 내밀었다. 이미 내 새해 목표에 있었던 것이고, 복싱을 시작하면 글러브를 그냥 준다는 지인이 있는 데다가, 같이 다닐 친구까지 있는데 더 이상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복싱을 시작한다고 남편에게 얘기했더니 남편도 늘 하고 싶었던 운동이라며 같이 다니겠다고 했다. 마침 이맘때 국가에서는 운동시설에 등록하면 3만 원을 환급해주기까지 했다. 이건 코로나 시국이지만, 너는 지금 당장 복싱을 해야만 한다는 하늘의 계시였을까?


여기에 복싱을 같이 하러 가자는 친구의 추진력까지 더해져 집앞 복싱장에 등록을 하고 보니 관장님은 첫날부터 글러브를 쓰게 하고 샌드백을 칠 수 있도록 가르쳤다. 한 달 동안 줄넘기만 시킨다는 괴소문은 아마도 옛날의 고리타분한 교육방식이었던 것 같다. 그렇게만 하다가는 ‘보통의 열정’을 가진 회원 대부분이 한 달 이내에 나가떨어져버린다는 걸 경험적으로 깨달았기 때문이 아닐까.




첫날 배운 건 ‘원’에 ‘잽’, ‘투’에 ‘스트레이트’를 날리는 기본자세였다. 스텝을 뛰면서 ‘하나 둘 셋 원투, 하나 둘 셋 원투, 백스텝 원투’ 하는 순서에 맞게 허공에 주먹질을 하기 시작했다. 거울 앞에서 주먹을 뻗는 내 모양새가 정말 볼품없고 어색하기 그지없었다. 다음날 ‘훅’을 치면서 몸을 숙여 피하는 동작인 ‘더킹’과 ‘위빙’을 하면서 훅을 연결시키는 동작을 배웠다. 한 달 가까이 꾸준히 다니니 ‘어퍼’, ‘바디’라는 구호가 추가되면서 점점 복잡한 순서의 펀치를 칠 수 있게 되었는데, 몸에 어느 정도 익고 나니 더 강하고 빠르게 치는 것에 점점 욕심이 났다. 처음에 샌드백을 칠 때는 친다기보다는 오히려 ‘닿는다’는 느낌이 컸는데, 이제 샌드백을 칠 때 제법 ‘뻥, 뻥’ 하는 큰 소리가 난다. 내가 봐도 점점 때린다는 표현에 걸맞은 자세로 나아가고 있는 것 같았다.


클라이밍은 계속해서 새로운 루트에 도전하면서 대부분의 기본 동작을 실전을 통해 익히는데, 복싱은 계속해서 같은 동작을 트레이닝하면서 몸을 갈고닦으면서 예측할 수 없는 실전 상황에 대비하는 느낌이다. 복싱을 배운 지 한 달밖에 되지 않았는데도 새로운 것을 배우기보다는 그동안 익힌 동작을 계속해서 더 예리하게 다듬는 데에 쓰는 시간이 많다. 클라이밍만 할 때는 운동이란 게 계속해서 새로운 것을 해야만, 더 어려운 난이도의 문제를 깨야만 재밌는 것인 줄 알았는데, 새롭지 않더라도 재밌다는 걸 알아가고 있다. 같은 것을 반복하기 때문에 더 선명하게 보이는 변화가 있다. 똑같이 ‘잽’을 날리더라도 한 달 전 내가 날렸던 잽과 지금의 내가 날리는 잽이 다르다. 물론 복싱도 어느 정도 익숙해지고, 발전이 더뎌지는 게 느껴지는 날이 오면 ‘복태기’(복싱 권태기)를 맞이하게 될지 모른다.


그렇게 익숙해질 정도가 되면 나는 그래도 초보티를 꽤 벗은 아마추어 숙련 복서 정도가 되겠지. 그쯤 되면 밤길을 다닐 때, (위험한 건 똑같겠지만) 적어도 지금보다는 덜 무서워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한다. 그런 생각에 갑자기 전에 없던 열정이 불타올라 샌드백을 치기도 한다. 대체로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치는데, 때로는 나를 무섭게 했던 것, 나를 위협했던 것, 나를 움츠러들게 했던 것. 그런 것들이 샌드백 안에 있다고 생각하면서 주먹에 더 힘을 실어 쳐본다. 펑펑 소리를 들으며, 숨이 벅차게 차오르며, 몸에 열이 오르며 더 이상 힘들어서 주먹을 날리지 못할 정도로 에너지를 다 써버리면 속이 시원하게 풀리는 느낌이다. 내 주먹에 힘이 실린다는 감각은 직접 느껴 보고 나니 정말로 중요한 것이었다.


복싱을 마치고 땀에 절은 티셔츠를 벗어던진 뒤에 거울 앞에 서서 잠깐 삼두와 어깨를 감상한다. 클라이밍 할 때는 잡아당기는 동작이 많아 어깨가 유독 잘 발달하는 것 같았는데 복싱을 하면 힘의 방향이 밀어내는 식이어서 클라이밍과는 반대로 삼두와 가슴 근육이 더 잘 쓰이는 것 같다. 펌핑된 삼두 근육을 보며 전에 없던 뿌듯함을 느낀다. 잠이 들 때 가슴 근육이 약간 뻐근해 오는 감각을 느끼며 ‘오늘 진짜 운동 잘했다’는 생각에 다른 잡생각이 씻겨내듯 떨쳐나가며 노곤하게 잠에 빠져든다. 내 안에 정말 열정이 있을까 믿지 못하며 시작한 운동이지만, 복싱을 하고 오는 날이면 어느새 열정을 한껏 끌어내어 발산하고 온 내 몸을 느낀다. 그리고 생각한다. ‘복싱하길 정말 잘했다. 내일도 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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