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할아버지와의 거리

by 오호라

외할아버지는 올해로 아흔셋의 연세에 별세하셨다. 외할아버지의 부고 소식을 듣기 한 시간쯤 전에 나는 엄마와 통화를 했다. 엄마가 말씀하셨다.

“이번 설에 외갓집에 다녀와야 할 것 같아. 할아버지가 편찮으셔서 언제 돌아가실지 몰라. 자식들 편하라고 설 연휴 때 가신다고 며칠만 더 사시겠다고 하셨는데…”

외할아버지가 중환자실에 입원하신 지 한 달이 되었고, 얼마 전에 연명치료를 중단하기 위해 일반병실로 옮기셨는데 나는 그조차도 그날 알았다. 외갓집은 여수에 있는 시골 마을이었는데, 가려면 큰 마음을 먹고 가야 할 정도로 내 느낌상 ‘아주 먼 곳’이었다. 그러다 보니 내가 외갓집에 다녀온 지 10년쯤 된 듯했다.


외할아버지는 손주가 거의 스무 명쯤 되었다. (정확히 헤아려본 적이 없고, 나도 헷갈려서 사촌이 몇 명인지 모른다.)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는 딸 여섯, 아들 둘로 총 팔 남매를 낳고 키우셨고, 우리 엄마는 그중에 넷째 딸이었다. 중간에 끼인 딸이어서 부모님의 애정과 관심을 많이 받지 못하고 자란 것이 우리 엄마 인생에서 큰 설움이었다. 외할아버지는 외할머니가 딸을 낳을 때마다 구박하고 외면했다고 하셨다. 외할머니는 ‘또 딸일까 봐’ 우리 엄마를 낳을 때 똥간에 숨어서 출산하셨다. 그런 외할아버지에게 넷째 딸의 딸인 나는 그리 애틋하지는 않은 중간 순위의 손녀 중 하나였다. 외할머니 외할아버지의 자식들도 좀 더 많은 딸을 낳고, 아들은 조금 적게 낳았기 때문에. 그래서인지 나는 외할머니가 나를 ‘해로마’(내 이름은 해림인데, 전라도 말투로 부르시면 이런 식의 발음이 되곤 했다.) 하고 부르시던 목소리는 기억하지만 외할아버지의 목소리는 더욱 희미하다. 외할아버지가 내 이름을 부르신 적은 있었는지, 손을 마주 잡고 눈을 마주 본 적이 있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외할아버지가 내 이름을 기억하실지도 확신할 수 없다. 물론 그에 대해서는 아무런 감정이 없다. 나도 이번에야 장례식에서 외할아버지 성함을 처음으로 또렷이 알게 되었으니.


결혼한 이후, 엄마는 명절에 친정에 가는 걸 거의 포기하고 살았다고 말씀하셨다. 지난 십몇 년 간 우리 집에서 안 씨 집안의 제사를 지내오기도 했고, 도로사정이 좋지 않았던 십여 년 전만 해도 청주에서 여수까지 다녀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빨리 가도 최소 다섯 시간, 휴게소를 들르면서 천천히 가면 하루 종일이 걸렸다. 세탁소를 운영하느라 명절 연휴 사흘을 온전히 쉴 수 없기도 했다. 그래서 외갓집에 갔던 계절은 주로 여름이었다. 외갓집은 근처에 바다도 있으니 여름휴가 겸 일 년에 한 번 겨우 겨우 다녀오는 곳이었다. 그마저도 중학생쯤 되면서부터는 공부를 핑계로 몇 년에 한 번 갈까말까 하게 되었다. 어릴 때 차멀미를 심하게 했던 나 때문이기도 했다. 울퉁불퉁한 시골길을 꽤 오래 들어가야 했는데, 자려고 해도 잘 수 없었고 토할 것 같은 괴로운 느낌을 오랫동안 견뎌야만 했다. 토를 한 적도 아마 몇 번 있었을 것이다. 게다가 어린 시절에 나는 외갓집에 가면 밥을 먹지 못했다. 밥에서 바다 비린내가 난다는 이유로 먹질 않았다. 아직도 미묘한 바다 비린내가 섞여있던 밥과 반찬들이 기억난다. 그 향은 내게 식욕을 떨어뜨릴 만큼 꽤 강렬했는데, 다른 손주들은 대체로 밥을 잘만 먹었다. 나는 밥을 먹는 척만 하고, 오렌지 주스와 과자들로 끼니를 때우곤 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인데, 지금은 지하수가 소독이 잘 돼서 나오지만 당시에 바닷가 근처 작은 마을은 물이 제대로 정수되지 않았었다고 한다. 엄마가 그 사실을 모르지 않았고, 그래서 오래간만에 친정에 왔어도 오래 있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런 엄마의 마음을 최근에야 가늠해 볼 수 있게 되었다.


“갈 때 얘기해 줘, 나도 일정 맞춰서 갈게.”

그렇게 진작 갔으면 좋았을텐데, 내가 엄마에게 이렇게 말을 하게 되기까지 생각보다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렸다. 내가 좀 더 일찍 철이 들었더라면, 외할아버지의 목소리가 그리 희미하지는 않았을텐데. ‘외갓집은 그저 먼 곳’, ‘가기 힘든 곳’, ‘가면 불편한 곳’ 그저 그게 내게는 계속 당연했다. 그 물리적 거리를 핑계로 마음의 거리도 먼 상태로 있게 내버려두었다. 외할아버지에게 나는 열몇명의 손녀 중 하나이지만, 나에게 할아버지는 한 분 뿐인데. 이렇게라도 내가 ‘가겠다’고 말한 건 아마도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렇게 전화를 끊고나서 얼마 뒤 외할아버지의 부고 소식을 들었다. 나는 아주 오랜만에, 그리고 처음으로 직접 운전해서 그 어느 때보다도 빠르게 순천까지 갔지만 할아버지의 모습은 디지털화된 영정 사진을 통해서나 뵐 수 있었다.


장례식에서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던 이모들과 외삼촌들, 사촌들을 만났다. 재작년에 결혼했지만 남편을 처음 만나는 친척들도 많아서, 남편과 함께 테이블을 돌면서 인사를 드렸다. ‘결혼했구나, 축하해’ 같은 말을 듣는데 기분이 묘했다. 발인을 하고 화장터에서 화장하고, 장지에서 마지막으로 인사를 드리며 흙 한 줌을 덮어드리기까지의 과정을 지켜보는 건 처음이었다. 이모 한 분이 크게 곡소리를 내며 우실 때 눈물이 약간 차올랐지만, 대체로 그 과정이 모두 나에게는 건조하고 담담했다. 평소에 할아버지를 생각하지도 않았으면서, 할아버지와 나만의 소중한 추억 하나도 만들지 못했으면서 눈물을 흘릴 수는 없었다. 묵념을 여러 번 하는 동안 할아버지께 죄송하다고 마음으로 말씀드렸다.


할아버지가 오래 사셨던 만큼 할아버지를 찾아뵐 기회가 사실은 많이 있었는데, 제가 그 시간들을 다 놓쳐버려서 죄송해요. 하지만 손녀의 죄송한 마음은 사실 아주 큰 건 아니니, 할아버지가 오랜 인생을 마치고 편히 쉬시는 데에 지장은 없으실 거예요. 엄마와 함께 할아버지에 대한 대화를 나누면서 많이 추억할게요. 할아버지, 손주들이 너무 많아서 할아버지도 바쁘시겠지만 천국에서 저도 지켜봐 주시고 종종 꿈에도 찾아와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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