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 일기

세크리파이스

by 오구리

새해가 밝자 내가 사는 작은 세상에도 변화의 바람이 불었다. 조직의 목표를 수립하고 스스로를 평가한다는 이른바 '공평한 KPI'의 도입. 없던 규칙이 생기면 저항이 따르기 마련이라며 다들 입을 모아 불만을 터뜨렸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조직의 공정함을 유지하기 위해 밤잠 설쳐가며 고민했을 누군가의 고뇌가 서려 있음을 안다. 비록 완벽하지 않더라도 모두에게 동기를 부여하려 했던 그 의지를 보았기에, 어떤 누구는 기꺼이 이 규범에 몸을 싣기로 했다.
​평가 기준이 공개되자 흥미로운 풍경이 펼쳐진다. 어떤 이는 100점 만점에 만족하고, 누군가는 가중치를 받아 120점이라는 한계치에 도전할 것이다. 사실 후자 같은 이들은 점수와 상관없이 이미 제 몫의 몇 배를 묵묵히 해내는 사람들이다. 숫자로 환산할 수 없는 헌신을 고작 점수 몇 점으로 제한하는 것이 못마땅할 법도 하지만, 그들은 묵묵히 자기 자리를 지킨다.
​정작 가관인 것은 전자들이다. 변화에 그토록 거세게 저항하며 '못 살겠다' 소리치던 기개는 어디로 갔는가. 막상 평가의 잣대가 들이밀어 지자 그들은 누구보다 빠르게 시스템에 기생한다. 혹여 내 점수가 깎일까 노심초사하며 기준을 조목조목 따져 묻는 그 비겁한 기민함. 타인의 희생이나 공평이라는 가치보다는, 당장 내 손 안의 숫자가 줄어들까 봐 겁부터 집어먹는 그 적나라한 생존 본능.
​변화는 인간의 가면을 벗긴다. 항쟁하던 자들이 순식간에 순응자로 변모하는 이 기괴한 적응력 앞에서, 나는 인간의 이면이 가진 그 간절한 두려움을 목격한다.


만약 풀스콥으로 일을 못하게 되면 1점일까? 0.8점일까? 그것조차도 묻지 못하는 그 얼버무리는 그 표정을 보며 나는 번역해서 다시 말해주었다.


"어떻게해도 1점슛이라는 거죠?"


3점슈터는 울겠다. 결국 순응된 재료를 담아 만든 커리가 맛있을것 같다.


그래도 3점슈터는 3점을 늘 쏘겠지, 쏴야지. 이겨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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