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조고즈넉 Nov 10. 2022

우회전 깜빡이 불빛에 눈이 부시다

신호 대기 중 날아든 짧은 상념

하루 해가 많이 짧아졌다. 오후 5시면 벌써 세상이 어둑어둑해진다.

이제는 퇴근시간에 땡! 하고 사무실을 나와도 온 사방이 깜깜하다.

쌀쌀해져 가는 기온에 비례하여 어둠이 길어진다.

추위와 어둠은 집으로 가는 발걸음을 재촉하는 수완 좋은 바람잡이다.


집으로 가는 길.. 차로 길어야 20분 거리다.

아파트 단지 근처 도로에서 빨간불 신호가 걸려 앞 차들과 같이 섰다.

바로 내 앞에 선 차가 우회전 깜빡이를 깜박거린다.

드문드문 선 가로등만이 희미하게 빛나는 어둠 속에서 불빛이 번쩍인다. 바로 내 코 앞에서.


아파트 단지들이 모여 있는 1차선 도로다. 신호등 하나 건너 방지턱 하나가 서너번 반복되는 길이라 빠르게 달리는 차도 없건만. 그나마도 신호등에 걸려 서 있는 상황에서 열심히 깜박이는 앞 차의 우회전 신호가 유난히 내 시선을 사로잡는다.


그래 알겠어. 너 오른쪽으로 갈 거 다 알겠다구..

그래 그래.. 오른쪽으로 조심히 잘 가.


신호를 기다리는 무료함에 어린아이에게 말을 걸 듯 혼자 중얼거려본다.


그런데 어둠 속에서 깜박이는 주황색 불빛을 보고 있자니 최면이라도 걸린 걸까?

불현듯 그 불빛이 같이 우회전을 하자는 손짓처럼 느껴진다.


아냐 아냐.. 나는 직진해야 돼. 그래야 우리 집이 나와.

나는 너 따라 우회전 못 한다구.

그만 졸라.. 아무리 그래도 너 따라 우회전은 안 해.


조직생활을 하다 보면 자기 주장이 강한 동료나 부하직원들을 휘어잡고 일하는 상사를 만날 때가 있다.

그런 부류들은 좋게 표현하자면 업무에 대한 강한 소신과 넘치는 카리스마로 업무추진력이 돋보인다는 소리를 듣는다. 하지만 나쁘게 말하면 주위에 대한 고려 없는 독불장군 스타일 또는 독재자형 리더십이라 평가받기도 한다. 분명 나처럼 직진을 해야 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자꾸 우회전을 외치니 말이다.

다 같이 우회전합시다! 우회전해야 합니다!!


나는 INFP 답게 평화로운 분위기를 중요시하고 갈등이나 분쟁을 견디기 힘들어하는 성향을 갖고 있다. 그래서 자기 주장을 강하게 피력하기 보다는 위아래, 좌우, 앞뒤 상황에 나를 맞추는 편이다.

고기도 먹어본 놈이 잘 먹는다고 전투력도 마찬가지다. 싸워본 놈이 잘 싸운다.

나는 저렇게 자기 주장이 강한 동료나 상사와 맞서 버티는 힘이 부족하다.

'확 함 들이 받아?'라고 생각하다가도

'아니다. 부딪쳐봤자 일만 시끄러워지지. 저 인간도 뭔가 생각이 있으니 저러겠지.'하고 넘어가버리기 일쑤다.


그런데 우회전 깜빡이와 찰나의 대화에서 순간 머릿속에 어떤 생각이 스치고 지나간다.

온화하고 배려 깊은 성격이라고 포장해왔던 나의 업무 스타일이 사실은 그저 스스로 확신이 없어서 그랬던 건 아니었나?

'저런 말 안 통하고 꽉 막힌 무식한 놈을 보았나!'라고 내가 속으로 욕하던 그 사람들은 그저 지금 나처럼 우리 집은 직진이라는 확신이 있었던 거였나 싶기도 하다.


30초 남짓 짧은 신호대기..

별 생각을 다 하네..

오늘 많이 피곤했나 보다.

우회전 깜빡이한테 말도 걸고..

이러다 풍차를 향해 말 타고 달려가는 거 아닌가라는 생각까지 해본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