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조고즈넉 Oct 20. 2022

오늘의 메뉴는? 피곤 절임

"자기야! 하늘 좀 봐봐. 색깔 봐 색깔.. 뭐 저렇게까지 이쁘냐"


"그러네. 이쁘게도 퍼렇네. 어젠 또 몇 시에 들어온 거야?"


"오늘이 아니라 어제 안에 들어간 것만도 감사하지. 그나저나 이런 날에 가야 하는 곳이 사무실밖에 없는 건가?"


"그냥 확 차 돌릴까? 오늘 동학사로 함 뜰까?"


"그래! 차 돌려버려!!"


신랑과 함께하는 30분 출근길, 가을 하늘 덕에 서로 흰소리를 주고받는다.

(공주에 위치한 절, '동학사'는 '땡땡이치고 어디 놀러나 가자'라는 우리 부부간에 쓰는 일종의 암호다.)

차를 돌리라고 데시벨 올려가며 서로 호기롭게 주고받는 대화 속에도

차는 성실히 앞만 보며 제 갈 길을 달린다.


가을 하늘은 어쩜 이다지도 유혹적인가?

오늘따라 궁극의 파랑을 보여주는 하늘은

출근 후 주야장천 컴퓨터 화면만 쳐다볼 나에게 너무 호사스러운 배경화면이다. 그래서 슬프다.


그런 날이 있다. 출근하면서 퇴근하고 싶어지는 그런 날.

아직 사무실에 도착도 하지 않았는데 내 마음은 이미 사무실을 나서고 있다.

떠나는 마음을 불러 세우고, 다독이고, 다그치며 가까스로 출근에 성공한다.


                 *출처: 그림왕 양치기

그런 날은 하루 종일 입 안에서 이 말이 맴돈다.


드럽게 피곤하네.. 드럽게 피곤해..


출근길 우연히 라디오에서 들은 후크송처럼 입안에서 뱅글뱅글 제자리를 맴돌며 반복된다.

나도 모르게 '드럽게'라는 말에 악센트를 넣어본다.

'피곤하~네~~'라고 말끝을 길게 늘여도 본다.

이래저래 말해보아도 성에 차지 않는다.

몸은 여전히 물 먹은 솜이불 같고 어깨에는 곰 한 마리가 아 있는 듯하다.

'매우', '정말', '심히'라는 고상한 표현으로는 지친 몸과 마음이 다 담아지지 않는다.

그래서 '드럽게'라는 다소 상스러운 표현에 고단한 마음을 얹어본다.

진정 내 몸과 마음이 피곤으로 더럽혀진 거 같다.


피곤 한 움큼을 골고루 흩뿌려
가만히 숨을 죽인다.
웃음도 활기도 총기도 빠져나간 자리에 남은 건
맛도 없이 질겨져 버리기만 한 영혼
이쪽으로 척, 저쪽으로 척
힘없이 엉겨 붙어 넘어간다.
위아래 좌우에서 보태오는 욕 한 바가지로
희미하게 남아있던 자존감마저 씻겨나가 버린 자리에
눈치와 압박을 고루 섞어 속을 채운다


이렇게 피곤 절임이 만들어진다.

휴식다운 휴식을 잃어버린 일상이 지속되면 피곤 절임은 늘 상에 올라오는 밑반찬처럼 함께 하게 된다.

이런 상황이 되면 따라붙은 말이 하나 더 는다.


드럽게 피곤하네.. 드럽게 피곤해.. 지겹다.. 지겨워..


그렇다. 듣기 좋은 꽃노래도 한두 번이라고 했다. 아무리 좋은 것도 반복되면 지겨운 법이다.

하물며 쩍쩍 들러붙는 피곤의 일상은 말해 무엇하겠는가.


오늘의 메뉴는?
피곤 절임
에잇! 또 피곤 절임이야!!


피곤 절임이 올라온 밥상을 걷어차 버리고 싶은 충동이 불쑥불쑥 올라온다.

하지만 차 버린 밥상을 주섬주섬 치워야 할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이라는 걸 안다.

대신 치워줄 사람도 다시 차려줄 사람도 없다. 그래서 슬프다.

오늘도 침 한번 꿀꺽 삼키며 움찔거리는 발 끝의 말초신경을 같이 눌러 삼킨다.



                     

매거진의 이전글 우회전 깜빡이 불빛에 눈이 부시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