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화스튜디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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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폴

"가게 이름을 선화스튜디오로 할까?"

정확한 문장은 아니겠지만, 엄마가 그렇게 물었던 것을 기억한다.

1호선 종로 5가역과 효제초등학교 사이에 위치했던 동진사에서 일을 배우던 아빠가 드디어 자신의 가게를 갖게 되던 90년대 중반,

이제 막 사진관에서 스튜디오라는 명칭으로 바뀌어 가던 무렵

17분만에 현상에서 인화까지 가능한 것이 최첨단이던 시절이었다.


아빠는 지금도 적당히 술이 들어갔다 싶으면 그때의 감흥을 어제 일처럼 풀어놓는데,

순천에 계시던 할머니가 서울에 와 쌔삥한 가게를 보더니

왐마, 우리 빙고이가(병곤이가) 출세했다며 더 바랄 게 없다고 하셨다는 부분은 언제나 기쁨의 대목이어서 한껏 격앙된 연사가 된다.

그 놈의 소리 지겨워 죽겠다며 쓰다 만 휴지로 바닥을 닦던 엄마가

뭣도 모르는 본인이 직접 양념한 불고기가 별 맛도 없었을텐데 당신 어머니는 땀을 뻘뻘 흘려 가며 얼마나 맛있게 드시던지 덧붙이고 나면 오늘의 자리도 슬슬 파할 시간이 다가오는 것이다.


지금의 편의점이 브랜드마다 거리를 두어야 하는 것처럼 그때의 사진관도 그랬다고 한다.

당시에는 후지필름을 최고로 쳤던 것 같은데 이미 동진사진관이 후지의 초록을 선점하였기 때문에 반경 얼마 간에 또 다른 후지는 존재할 수가 없었고 아빠가 선택한 것은 코니카였다.

빙고이의 사진관은 큰 딸의 이름을 딴 '선화스튜디오'가 되지는 못하고 대개의 점포가 그렇듯 지명을 내세워 파란 간판을 건 '이화스튜디오'가 되었다.


신순심씨의 둘째 아들 정병곤씨가 살면서 이룬 최고의 쾌거였던 이화스튜디오는

디지털 카메라와 스마트 폰의 보급으로 2000년 들어 점차 사양 산업의 길을 걷게 되는데,

기천만원을 주고 들인 현상기를 헐값에 되팔던 즈음의 아빠는 집에도 들어오질 않고 가게에서 돗자리를 깔고 자곤 했다.


당시의 나는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 근처에서 카페 일을 하고 있었는데

롯데에서 건물과 부지를 매입해 공연장을 짓기로 했다고 통보를 받은 주인 언니가 몇 차례 법원엘 다녀온 뒤,

들인 공에 비하면 턱없을 보상금을 받고 가게를 접게 된 참이었다.

선화 너 가게할 생각 있으면 나한테 이거 사. 진짜 제일 좋은 걸로 골라서 새 걸로 했던 거야. 알지?

커피 머신만 해도 돈 천을 쫓아갈 텐데 제빙기와 업소용 냉장고까지 오백에 넘겨준다니

내 나이 스물 다섯

보증금이며 권리금 한 푼도 마련하지 못한 채로

이걸 들고 나는 어디로 가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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