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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형제 중에 둘째인 아빠는 형이 서울로 데리고 올 때만 해도 공부를 더 시켜주려나 싶었다고 한다.
막상 따라온 서울에서 노래를 트는 일로 다방엘 취직하게 됐다는 얘기를 처음 듣던 날에는
그것이 과연 어떤 종류의 상실감이었을지,
아마도 이번 생에서는 영영 알 수 없는 기분이려나 짐작할 뿐이었다.
지게를 지고 소작일을 하던 아침마다 학교에 가는 애들이 얼마나 부러웠는지 들을 때면
시골집 초록 대문을 밀고 나와 우물을 뒤로 하고 잰걸음으로 걸었을 어린 병곤이를 떠올리곤 했다.
목가상을 지나 마을 회관을 지나 미나리꽝을 지나
할아버지의 산소가 있는 우사로 가는 그 비포장 도로 어디 쯤에 서서 종종 눈물을 훔치기도 했을까,
빈곤한 상상에는 언제나 약간의 신파가 더해졌다.
아빠는 환갑이 되던 몇년 전까지만 해도 장학 사업을 하고 싶다는 얘기를 입에 달고 살았다.
그렇게 잘은 사람이 퍽이나 잘도 장학 사업을 하겠다며,
당장의 아들 딸한테 쓰는 돈이나 좀 덜 아끼라고 때마다 엄마는 지치지 않고 역정을 냈지만
못 배운 게 한이라 이 다음에 순천엘 돌아가면 정병곤의 작은 도서관을 만들겠다는 계획을 안고
언젠가 도장을 파온 뒤부터 온 집안의 책에 찍어두는 것을 당장의 사명처럼 해내는 중이었다.
출처가 불분명한 문집들, 전권은 커녕 두 세권이 전부인 조정래와 최인호의 소설집 몇 종류, 다그치는 제목을 가진 지난 시대의 자기계발서 등
소장 목록으로 치자면 조악하달 수 밖에 없어서 그 작을 도서관의 흥행을 염려하는 시늉으로 엄마의 숙원 사업인 묵은 책 처리를 설득해 보지만 진전은 없다.
남동생과는 나눠 가진 유전자만큼이나 똑같은 성질을 가지면서도 전혀 상반된 기질을 가지고 자랐다.
안산에 있는 대학에 들어가자마자 동아리에 빠져서는 외박을 밥 먹듯 하며 내내 집에 들어올 생각을 않는 큰 딸의 기세를 꺾기 위해 용돈을 끊었지만 소용은 없는 일이었다.
주말이면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서빙을 하고
온갖 곳을 다니며 설문지를 돌리고
방송국 녹취록 타이핑 아르바이트를 구해 생활을 연명하며 카피라이터나 에디터가 되고 싶던 스물 무렵의 나는 경미하게 예술인 병을 앓았다.
반면 동생은 어렸을 적부터 딱히 잘한다거나 되고싶은 게 없는 것이 늘상 고민이었다고 하지만
늦깎이 대학생으로 성대에 다니던 수학 과외 선생님의 제안으로 경영학과에 진학하더니 졸업하기까지 제 손에 물 묻히며 돈 벌어 본 일은 없어도 학생 신분으로 회계사에 합격하는 독한 면모를 보였주었다.
국민학교까지 다니고 만 아빠는 검정고시 얘기를 곧잘 하곤 했다.
젓가락을 퉁기는 밤이면 하모니카를 배우고 싶다고도 했다.
대부분의 부자지간이 어째서 데면데면한 것인지 정확히 알 길은 없지만 대개 그 둘의 성격이 판박이기 때문은 아닐까
결국 자신과의 싸움에 다를 바 아닌 것처럼
우리집의 남성 둘 역시 유년기가 아닌 평생의 대부분을 미지근하였으나
이제 막 출근을 하던 무렵엔가
딴에는 공부 좀 한 축에 속하는 아들은 직접 가르쳐 줄테니 본인에게 수업을 듣겠냐거나 종로구 인근으로 검색한 하모니카 학원에 등록을 시켜주겠다고도 하였지만
몸을 쓰기보다는 주로 실내에서 카메라를 만지던 아빠는 사진관을 접고 시작한 조경 일에 온 몸이 고단하고
일요일이면 티비쇼 진품명품과 배구 경기만은 꼭 보고 싶었다.
아토피가 있는 성균이를 위해 순천집에 지을 황토방을 고민하고
지금부터라도 생각을 좀 달리하여 건물을 마련하고 나면 선화도 임대료 걱정없이 장사를 할 수 있을 테니까
신경쓸 거리도 한 두가지가 아니었다.
못 배운 설움이 제일 크다는 것도 항상 말뿐이라고
남매 둘이 갖는 술자리에서 우리는 종종 아빠 흉을 보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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