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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프로 Apr 01. 2024

어라, 이건 내가 생각한 반응이 아닌데

(시무룩)

살면서 진짜 맛있게 먹었던 것은 오래 기억에 남는 법이다. 몇 년 전 자취할 때, 갑자기 과일이 먹고 싶어서 배민 B마트로 급하게 샤인머스캣을 시킨 적이 있다.


처음부터 샤인머스캣을 시킬 생각은 아니었다. 몇 번 먹어봐서 맛있는 건 알고 있었지만 가격이 비싸 자취생에게는 부담스러운 과일이었다. 그냥 딸기나 사과, 키위 같은 것들을 주문하려고 했는데 샤인머스캣이 반값 할인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홀린 듯 클릭해 버렸다.


30분 후, 탐스러운 초록송이가 문 앞에 도착했다. 식초물에 담가 뽀득뽀득 씻어 한 알을 입에 넣었는데, 오 마이 갓!!! 이건 이때까지 먹었던 샤인머스캣이 아니었다. 청포도맛 사탕 그 자체였다. 새콤달콤함의 극치. 이것이야말로 눈을 번쩍 뜨며 '미미(美味)!'를 외쳐야 하는 맛이었다. 아, 이래서 사람들이 샤인머스캣을 먹는 거구나. 내가 그동안 먹은 건 뭐였지? (안타깝게도 그 이후로 지금까지 그렇게 맛있는 샤인머스캣은 먹어본 적이 없다.)


"와, 이거 대박이다 진짜. 그냥 사탕인데? 와, 미쳤다."


나는 샤인머스캣 한 알을 입 안에 넣을 때마다 마치 1인극을 하는 사람처럼 고개를 저으며 육성으로 감탄했다. 혼자 먹기 아까운 맛이었다.


당시에 헬스장을 다니며 1:1 PT를 하고 있었는데, 곧 PT를 받으러 가야 하는 시간이었다. PT트레이너에게도 이 엄청난 맛을 알려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트레이너는 불친절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딱히 살갑지도 않은, 나보다 몇 살 어린 여자분이었다. 우리는 별다른 교감 없이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는 관계였다.


샤인머스캣은 1/3 정도 남아있었다. 나는 내일 먹을 몇 알을 빼고, 나머지 큼지막한 여섯 알을 떼어 깨끗하게 씻은 후 투명 봉지에 넣어 돌돌 묶었다.


급하게 옷을 갈아입고 나가려는데, 순간 망설여졌다. 샤인머스캣 한 송이를 주는 것도 아니고, 여섯 알이 들어간 봉지를 건네주는 게 맞는 건가? 괜히 주고 욕먹는 거 아니야? 그냥 내가 다 먹을까? 그렇게 친한 사람도 아니고. 근데 너무 맛있잖아. 나 혼자 먹기는 아까운 맛이라고. 알이 커서 6알도 충분히 먹을만한데. 이런 맛을 만나긴 쉽지 않아. 그냥 주자.


나는 6알이 들어간 봉지를 다시 가방에 넣고 집 앞에 있는 헬스장으로 향했다. 괜히 마음이 설렜다. 운동하기 전에 잠시 앉아서 날짜에 사인하는 시간이 있는데, 그때 이걸 줄 생각이었다.


'그럼 하나 먹어보겠지? 완전 놀랄 거야. 너무 맛있다고 난리 치는 거 아니야? 후훗'


나는 내심 살가운 반응을 기대하며 헬스장에 앉아 기다렸다. 이윽고, 정시가 되자 트레이너가 다가왔다. 나는 인사를 하고 사인을 한 뒤, 샤인머스캣이 담긴 봉지를 냉큼 내밀었다.


'이거 드셔보세요. 샤인머스캣인데 진짜 맛있어요. 완전 사탕이에요, 사탕. 조금밖에 안 남아서 양이 적은데 그냥 맛보시라고 가져와봤어요!'


'아, 감사합니다.'


트레이너는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가볍게 인사하고는 봉지를 열어볼 생각도 하지 않았다. 어라? 이게 아닌데. 역시 너무 약소한 선물이었나. 예상만큼 기뻐하지 않는 모습에 나는 살짝 민망했다(지금 생각해 보면 그렇게 기뻐할만한 선물은 아니긴 했지만).


'하긴, 샤인머스캣 한 송이도 아니고 고작 몇 알인데. 괜히 가져왔나. 그래도 나라면, 내 생각나서 몇 알이라도 가져온 것에 너무 고마웠을 것 같은데. 아닌가?'


내 속마음을 모른 채 강사는 바로 수업을 시작했고, 나는 김이 빠진 채로 그러나 (수강료가 아까우니) 열심히 운동을 했다. 이렇게 생각하면서.


'에라이, 그냥 나나 먹을걸.'




집에 와서 오늘 있었던 일을 찬찬히 돌아보았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내가 고마워해달라고 이걸 갖다 준 건 아니잖아.

나는 그냥 좋아하는 모습을 보고 싶고, 너무 맛있어서 나누고 싶은 마음에 가져간 거잖아.

상대방이 어떻게 반응하든 그게 무슨 상관이야?

내가 베풀고 싶어서 베풀었으면 된 거지.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했으면 된 거지.


여기까지 생각이 닿으니, 이내 마음이 가벼워진다.




중요한 것은 '주는 내 마음'이다. 주는 것이 내 자유인 것처럼, 어떤 반응을 할지는 상대방의 자유다. 보잘것없는 선물이든 큰 선물이든 내가 사랑의 마음으로 베풀었다면 상대방의 반응에 일희일비할 필요가 없다.


'내가 이걸 줬으니, 이렇게 반응해 주겠지?'

'내가 이만큼 줬으니, 다음에 나에게도 이만큼 베풀겠지?'

'내가 이걸 주면, 나를 좋게 보겠지?'


이런 기대감을 바탕으로 무언가를 줄 때는, 갈수록 마음이 무거워진다. 상대방이 내가 원하는 반응을 해주는지, 나중에 받은 만큼 되갚아 주는지, 나를 좋은 사람으로 봐주는지 확인할 때까지 마음속에서 내가 준 것을 놓을 수 없기 때문이다.


진심으로 주는 삶은 가볍다. 내가 주는 순간 끝이다. 내가 즐겁고 끝. 확인해야 하는 것이 없으니 마음에 남는 게 없다.


엄지손톱에서 우주를 발견할 수 있다는 말을 나는 좋아한다. 우리 모두는 연결되어 있다는 뜻이다. 내가 내보내는 사랑의 에너지는 돌고 돌아 언제나 나에게 그대로 돌아온다. 그게 꼭 정확히 지금 눈앞에 있는 상대방으로부터 돌아올 필요는 없다.


내가 발산한 사랑의 에너지는 언젠가 내가 힘들 때 누군가 건네는 따뜻한 위로로, 나를 일으키는 작은 친절로, 뜻하지 않은 우주의 선물로 돌아올지도 모른다. 그러니 지금 눈앞에 있는 상대방이 다소 실망스러운 반응을 보인다고 해서 부디 마음을 닫지 않기를. 베풀고자 하는 사랑의 마음으로 충만해지기를.


언제나 내가 먼저 조건 없이 베푸는, 사랑 충만한 사람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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