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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프로 Jul 18. 2024

비 오는 날의 정취 (feat. 파리의 추억)

요즘 계속 비가 오고 날이 흐려서 새벽에 일어나면 어둑어둑하다. 우드 블라인드를 살짝 젖히고 밖을 내다보아도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는다. 젖은 아스팔트 바닥에 자동차 헤드라이트가 비치는 것을 보고 '비가 오는구나' 알 뿐이다.


남편은 출근하기 전에 나에게 꼭 날씨를 물어본다. 그럼 나는 날씨를 검색해서 비가 오는지 안 오는지, 온다면 몇 시부터 오는지, 최고 온도와 최저 온도는 몇 도인지를 상세히 알려주곤 한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내 꿈이 기상캐스터였는데, 그 꿈을 주부가 되어 집에서 이루고 있다.


비가 오는 날이면 남편은 장화를 신고 출근한다. 정확히 말하면 장화라기보다는 '방수기능이 추가된 첼시부츠'지만, 어쨌든 비 오는 날 신으니 나에게는 그냥 '장화'다. 남편의 추천으로 나도 이번 여름부터 장화를 사서 비 올 때 신고 다니는데, 아주 신세계다. 비가 와도 발이 젖지 않아서 너무 쾌적하다. 물론 그래도 비 오는 날에는 잘 안 나가지만.


오늘도 평소처럼 남편이 출근한 후 책을 읽고 있었다. 밝아지려고 하는 하늘을 곁눈질로 종종 확인하면서. 그때, 남편에게 카톡이 왔다.


'날씨 대박

파리급으로 비 온다 밖에

역까지 걸어가다 무릎 아래로 다 젖음ㅋㅋㅋ'


'헐 진짜??? 대박

안보였어'


밖이 잘 보이지 않았고 이중창이라 빗소리도 거의 들리지 않았는데, '파리급'으로 비가 온다니. 남편의 카톡을 보자마자 나는 타임머신을 타고 작년 6월에 갔던 파리 거리의 한복판으로 돌아갔다.


일정을 끝내고 숙소로 돌아가려고 센 강 다리를 건너고 있었는데 하늘이...


먹구름이 심상치 않다!!! 숙소 갈 때까지만 참아줘!!!


그러나 다리 건너자마자 쏟아짐... 비 피할 곳이 없어 허둥대다가 냅다 뛰어 겨우 피신했다


그때의 폭우는 잊을 수가 없다. 길을 걷다 갑자기, 정말 갑자기 미친 듯이 퍼붓던 폭우. 물론 하늘에 먹구름이 잔뜩 끼어있어 비가 올 것이라 예상은 했지만, 한 방울, 두 방울 비를 맞고 우산을 채 다 펴기도 전에 양동이 물을 들이붓듯 그렇게 냅다 퍼부을 줄은 몰랐다. 우산이 있었음에도 머리부터 발끝까지 쫄딱 다 젖을 줄은.


'파리급으로 비 온다'는 말에 나는 대번에 밖이 어떤 상황인지 알 수 있었다. 이럴 때 참 좋다. 같은 경험을 공유할 때. 지금 이 순간과 연결된 과거의 순간을 떠올릴 수 있을 때. 내 경험의 폭이 넓어졌음을 확인하게 될 때. 앞으로 비가 대차게 오는 순간을 만날 때마다, 나는 6월의 파리 거리를 떠올릴 테니까.


블라인드를 올리고 창문을 열었다. 젖은 바람이 훅 밀려들어오며 그제야 쏴- 퍼붓는 빗소리가 들린다.


'와, 많이 오네. 시원하다.'


밖에 나갔을 때는 곤욕이지만, 집에 있을 때는 비 오는 날이 좋을 때가 있다. 맑은 날이 주는 것과는 다른, 집에서 비 오는 풍경을 내다보고 빗소리를 들으며 느낄 수 있는 정취가 분명 있다. 약간의 어둑함이 주는 분위기도 좋다. 왠지 영화 한 편 보고 싶어지는 느낌.


창문을 열고 시원한 빗소리를 들으니 마음이 차분해진다. 갑자기 글이 쓰고 싶어 방금 전까지의 의식의 흐름을 따끈따끈하게 기록했다(글을 다 쓰고 나니 갑자기 천둥번개가ㄷㄷ). 보통 저녁에 글을 쓰는데 아침에 글을 쓰니 성취감이 느껴져서 더 좋다.


오늘은 어떤 하루가 될까. 오후에 나갈 일이 있어 비를 뚫고 힘겹게 가야겠지만 그 안에서 나름의 재미를 찾아봐야겠다. 내리는 비만큼이나 힘찬 하루를 보내고 싶다. 모두들 안전하고 시원하고 재밌는 하루를 보내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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