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이야기
전국시대 중국 북쪽에는 중국인이 흉노(匈奴)라 부르는 유목민이 있습니다. 흉노가 중국의 북쪽을 약탈하자 북쪽에 위치한 위, 조, 연나라는 장성을 쌓아 흉노를 방어합니다. 전국시대를 통일한 진시황은 기원전 215년, 장군 몽염과 30만 대군을 동원해 흉노를 정벌하고 만리장성을 쌓습니다. 유방이 한나라를 건국할 때에 흉노에는 묵돌이라는 강력한 선우(군주)가 아버지를 죽이고 권력을 잡습니다. 묵돌선우는 주변 세력을 병합하며 강력해집니다. 기원전 200년, 한고조 유방이 30만 대군으로 흉노 정벌에 나서나 백등전투에서 묵돌에게 대패합니다. 한나라는 아우의 입장에서 형제 관계와 조공을 바치는 것으로 화친을 맺습니다. 기원전 133년, 한무제는 묵돌이 죽고 없는 흉노를 정벌해 고비사막 북쪽으로 몰아냅니다. 이후 흉노는 분열하며 쇠퇴기를 맞습니다. 한나라의 혼란으로 시작된 삼국시대를 지나 사마의의 손자 사마염이 조조의 위나라로부터 선양 받아 세운 진나라가 8왕의 난으로 다시 어지러워집니다. 진나라의 볼모였던 유연이 자립해 전조를 건국합니다. 흉노의 나라 전조는 이민족이 중원에 세운 최초의 독립왕조로 화북지방을 중심으로 하는 오호십육국시대의 서막을 엽니다. 동시대의 북량과 북하도 흉노의 나라입니다. 439년 멸망하는 북량을 마지막으로 흉노는 중국의 역사에서 사라집니다.
4세기 중반 유럽의 동쪽으로 훈이라는 유목민족이 몰려옵니다. 전투력이 뛰어난 훈족에 밀린 게르만족은 로마 제국의 저지선인 라인강과 도나우강을 건너 로마의 영역을 침범합니다. 게르만족 대이동으로 제국 유지조차 벅찼던 로마는 5세기가 되면서 직접 훈족을 상대하게 됩니다. 동로마제국은 매년 훈족에게 황금을 보내 평화를 삽니다. 445년, 서양인들이 ‘신의 채찍’이라 부르는 아틸라가 훈족의 왕위에 오릅니다. 아틸라는 동로마제국의 황금에 만족하지 않고 콘스탄티노플을 직접 공략합니다. 도시를 함락시키지는 못했지만, 매년 받던 황금의 양을 8배나 늘리고 도나우강 하류의 영토까지 받아냅니다.
게르만족과 발칸반도 그리고 동로마제국을 약탈한 훈족이 서로마 제국을 주목합니다. 서로마제국 황제 발렌티니아누스 3세의 누이인 호노리아는 반역을 도모하다 유배당하자 몰래 아틸라에게 사람을 보내 청혼합니다. 서로마를 공략할 명분을 얻은 아틸라가 청혼을 승낙합니다. 아틸라의 훈족은 라인강을 넘어 서유럽인 갈리아지역의 주요 도시들을 유린하며 오를레앙의 카탈루니아 평원으로 진군합니다.
로마의 유력한 군인 가문 출신인 플라비우스 아에티우스라는 사내가 있습니다. 서로마 제국을 지탱한 ‘최후의 로마인’이라고 평가하는 아에티우스는 아홉 살에 게르만족의 일족인 서고트족에게 볼모로 갔다가 3년 후 다시 훈족에게 볼모로 넘겨집니다. 17년 동안 훈족과 생활하며 성장기를 보낸 아에티우스는 훈족과 교분을 쌓으며 훈족의 군사력을 세세히 경험합니다. 아에티우스는 훈족과의 경험을 바탕으로 게르만족을 격파하며 갈리아 최고 사령관이 됩니다.
훈족의 진군을 저지하기 위해 아에티우스도 군사를 동원해 카탈루니아 평원에서 아틸라와 마주합니다. 451년, 카탈라우놈 전투에서 아에티우스의 서로마가 아틸라의 훈족에게 승리를 거둡니다. 453년, 아틸라는 자신의 결혼식 날 밤에 급사합니다. 아틸라가 죽자 훈족은 권력투쟁과 동맹국의 반란으로 급격히 몰락합니다. 469년, 동로마와의 전쟁에서 대패한 훈족은 이후 유럽의 역사에서도 사라집니다.
훈족이 흉노라는 가설이 있습니다. 중국은 흉노라 비하해 불렀지만 스스로는 훈이라 부른 기록이 있습니다.
최근의 유전학적 연구 결과 훈족은 흉노와 이란계 스키타이인의 혼혈로 확인됐습니다. 문자를 사용하지 않아 기록으로 남아있진 않지만, 흉노의 한 일파가 서진하며 스키타이인과 섞였고 이후 유럽에 나타난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박씨, 석씨와 함께 신라 왕족인 김씨는 한무제 때 한나라로 귀순한 흉노 출신 김일제의 후손이라는 설도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가을의 풍요를 표현하는 천고마비에는 흉노의 약탈을 걱정하는 중국인의 아픔이 담겨있답니다. 말이 살찌면 흉노의 약탈이 시작된다는.